제 414화
414. 집으로
덕배는 경주의 종합병원에서 링거와 영양제를 맞으며 꼬박 하루를 자고 난 후에야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나도 그 옆 침대에서 똑같이 주삿바늘을 꼽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 역시 첫날 이후에는 거의 잠도 못 자고서 덕배를 도왔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덕배는 여전히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동생에게 합격 소식을 알릴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 둘은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 말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기에 곧바로 퇴원 수속을 밟은 뒤 유진이와 미소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한울이의 상태도 봐야 했지만 오늘이 바로 유진이의 큰아버지가 강탈해 간 암사동 집을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등기를 이전받자마자 가보려고 했었지만 워낙 집 상태가 험해 그동안 수리를 하느라 이제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몇 시간을 달리자 강북 칠성 병원이 보이기 시작한다.
곧 내릴 때가 되자 덕배가 뒷자리에 앉은 유진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나. 고마워요. 저희한테 집까지 내주시고.”
유진이는 되찾은 집을 흔쾌히 덕배와 한울이를 위해 임대로 내어줬다.
덕배의 말에 유진이가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말한다.
“어차피 집은 사람이 살아야 폐허가 안 돼. 그리고 너랑 한울이 그리고 동준이네 식구가 살아 주면 아마 돌아가신 우리 엄마 아빠도 언니 부부도 좋아하실걸? 원래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셨거든.”
서울까지 올라오면서 친해진 터라 유진이는 덕배와 말을 편히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끼이익.
칠성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고개를 돌려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조금만 기다려 가서 한울이만 보고 바로 내려올게.”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한울이한테 안부 전해주시고요.”
“삼촌! 나도요!”
“응.”
인사를 마친 덕배와 난 차에서 내려 곧장 병실로 향했다.
* * *
칠성 병원 1563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동준의 할머니만 있었다.
“아이고~ 오셨어요 팀장님?”
박동준의 할머니가 힘들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아닙니다. 누워 계세요. 그런데 한울이는 어딜 갔습니까?”
“폐 검사 때문에 내려오라는 연락이 와서 동준이가 데리고 내려갔어요.”
폐 검사라는 말에 덕배가 화들짝 놀란다.
“할머니. 혹시 우리 한울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덕배의 목소리가 떨리자 박동준의 할머니가 웃음을 짓는다.
“아냐. 많이 좋아져서 검사한다고 간 거니까 안심해.”
“정말요? 혹시 저 안심시키려고 거짓말을 하시는 거 아니죠?”
“이 할미가 언제 허튼 말을 하든?”
“그건 아니지만······.”
“많이 좋아졌으니까 안심하렴. 검진 마치고 금방 올 거야.”
그제야 덕배가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드르륵.
한울이가 탄 휠체어가 들어온다.
이동식 산소 호흡기를 차고 있지만 한울이의 표정은 한껏 더 밝아져 있었다.
“형······ 합격했어?”
덕배가 조심스레 휠체어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응. 합격······했어. 형 이제······ 배우야······.”
덕배는 한울이와 시선을 맞추고 동생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한울이가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난 그럴 줄 알았어. 형은 뭐든 잘하니까······.”
숨을 쌕쌕거리며 말하는 동생의 말에 덕배의 반달로 휘어진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래. 이제 형도 배우 됐으니까 우리 한울이. 빨리 나아서 형이랑 새집 가서 살자.”
한울이가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박동준과 침대에 누운 박동준의 할머니를 번갈아 쳐다본다.
“동준이 형이랑 할머니는?”
“당연히 같이 가야지.”
한울이가 배시시 웃는다.
“다행이다······.”
그 순간 병실 안은 핏줄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들 모두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 * *
한울이의 상태가 좋아진 터라 며칠 안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난 한울이가 퇴원하면 다 같이 암사동 집에서 보자고 말한 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유진와 미소를 데리고 암사동 집으로 향했다.
큰길에서 큰 승합차 세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주택가 이면도로로 들어가자 금방 유진이네 옛집이 나왔다.
“다 왔다.”
유진이의 집은 대략 80평 정도 넓이의 땅에 세워진 2층 단독 주택.
지붕은 없이 옥상이 있고 지하실이 있는 집이었다.
유진이는 그 집을 보자마자 몸을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큰아버지에게 빼앗긴 후 영원히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감격에 찬 유진이가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야. 여기가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미소 친엄마랑 친아빠가 살던 곳이야. 그리고 미소도······ 여기서 살았고.”
미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창밖을 쳐다본다.
“엄마. 여기에서 내가 살았어?”
“응. 우리 미소 태어나서 병원에 3일 있다가 바로 이 집으로 왔어.”
“아~ 그렇구나~”
그사이 난 차 시동을 끄고 문을 열었다.
“자자. 어서 내려서 들어가 봐야지?”
내가 재촉하자 유진이가 차 문을 달칵 연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주택의 하늘색 쇠 철문 앞에 선다.
난 바꾼 열쇠를 유진이의 손에 안겼다.
“자 여기.”
열쇠를 받아든 유진이는 눈물이 가득 한 채 쇠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잠시 그 철문에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언니 형부······ 나 이제······ 왔어······요. 우리 미소랑······같이요······.”
오랫동안 힘들었던 세월이 떠올랐는지 유진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난 잠시 미소를 껴안고 유진이가 추억에서 빠져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유진이가 기운을 차리고는 연하늘색 철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유진이가 미소를 부른다.
“미소야. 같이 열까?”
“응!”
유진이와 미소가 양손에 힘을 줘 연하늘색 철문을 연다.
끼익.
수리해 놓은 터라 무거운 쇠 철문의 문이 가볍게 열린다.
순간 내가 유진이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펼쳐졌다.
“오 오빠. 이 이건······.”
내 선물을 본 유진이가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 * *
하늘색 철문을 열고 들어간 유진이의 암사동 주택은 과거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짙은 고동색 장독 여섯 개가 붉은 흙 위에 일렬로 놓여 있었고 곁에는 분홍색 아동용 자전거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은 주황색 줄로 늘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제 막 빤 듯한 티셔츠 2개가 걸려 있었고.
그리고 마당 한쪽에는 무화과나무와 감나무 사이좋게 서 있었고 그 밑으로 이랑이 있는 조그마한 텃밭이 가꾸어져 있었다.
나는 이 집의 명의를 이전받은 후 유진이를 대신해 집의 상태를 확인했다.
큰아버지란 작가는 집에 애착이 없었던지 이 집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제대로 성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난 사비를 들여 <신의 이름으로>의 제작을 맡은 블루드래곤 쪽 스태프들에게 집수리를 부탁했다.
드라마 제작사들은 인테리어 회사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간단히 수리만 할까 싶었지만 난 유진이의 옛날 사진을 건네주며 똑같이 복원해 줄 수 있냐 물었다.
그 순간 블루드래곤은 인테리어 회사가 아닌 자사의 소품팀을 총동원해 다큐에 나왔던 현장을 완벽하게 복원해버렸다.
“어때? 신경 좀 썼는데? 마음에 들어?”
유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진짜······ 고마워요.”
유진이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때 미소가 엄마의 곁에서 손수건을 내민다.
“울지마. 엄마 울면 나도 슬프단 말이야······.”
미소의 눈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유진이가 무릎을 꿇고 미소를 꼬옥 껴안았다.
“미안 엄마가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그래.”
“옛날 생각?”
유진이는 미소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집을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 미소도 2살 때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혹시 기억나?”
이 집은 미소가 자란 곳이자 유진이의 부모와 유진이의 언니 부부가 함께 살던 곳이었다.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니. 기억 안 나.”
유진이가 일어나 미소의 손을 잡는다.
“그러면 엄마랑 돌아볼까? 혹시 모르잖아. 자세히 보면 기억이 날지도.”
“응!”
난 잠시 떨어져 두 사람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기다렸다.
* * *
유진이가 미소의 손을 잡고 마당 한쪽으로 걸어간다.
처음엔 유진이의 엄마이자 미소의 할머니가 애지중지했다는 장독대다.
달그랑.
짙은 고동색의 장독을 열어본 유진이가 날 쳐다본다.
“오빠. 여기에 장은 왜 안 채워뒀어요?”
“실은 거기도 채워 넣으려고 생각했는데 집마다 장맛이 다르잖아. 그래서 안 채워놨어. 나중에 네가 채울 수 있게.”
“나 장 담그는 법 몰라요.”
“대신 기억은 하고 있잖아. 어떤 맛인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나중에 그 맛대로 만들어 넣으면 되지. 그전에는 동준이 할머니가 쓰시게 하고.”
“그러면 되겠네요.”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유진이와 언니 이름이 함께 새겨진 무화과나무와 감나무의 줄기를 만지작거린 뒤 아동용 자전거로 향했다.
“이 자전거. 내가 엄청 좋아하던 건데······.”
“그게 가장 신경 쓴 작품이야.”
소품팀은 사진 속 분홍색 자전거와 똑같은 새 제품을 구한 다음 사진 속 자전거처럼 채색해 놓았다.
자전거 옆에 달린 작은 보조 바퀴에는 그 당시에 붙여 놓았던 스티커까지 재현해 놓았고.
“꼭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온 것 같아요.”
“한번 타봐.”
“지금 타기에는 좀······ 아닌 거 같아요.”
유진이가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옛날 생각이 나는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무지개 수실이 달린 자전거 손잡이를 만져본다.
그때 미소가 호기심을 보였다.
“엄마. 그럼 내가 이거 타 봐도 돼?”
유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대신······ 마당에서만 타?”
“응. 알았어.”
미소가 냉큼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그러자 유진이가 자전거의 안장 뒷부분을 잡아준다.
“엄마 꼭 잡아야 해?”
“응~”
미소가 끙차 하면서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처음 타 보는 자전거라서 어색했지만 보조 바퀴가 달려있어서 넘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 나 잘 타?”
“응. 잘 타.”
“그래도 놓으면 안 돼~”
“그래~”
미소가 신나게 페달을 굴렀지만 유진이는 이미 조금 전부터 자전거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미소가 생각보다 훨씬 잘 탔기 때문이다.
이내 마당 끝까지 간 미소가 방향 전환을 위해 핸들을 꺾었다.
그제야 미소는 유진이가 손을 놓고 있는 걸 확인했다.
“어? 엄마?”
미소가 놀라 자전거의 핸들이 흔들린다.
유진이가 다급히 외친다.
“괜찮아! 미소야! 보조 바퀴 있으니까 안 다쳐. 겁먹지 마.”
“그래 미소야. 페달만 제대로 굴리면 절대 안 넘어져.”
미소는 잠시 당황했지만 나와 유진의 격려에 금방 용기를 내었다.
“끄응~차~”
미소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혼자의 힘으로 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보조 바퀴가 연신 땅에 닿으며 비틀대던 자전거는 이내 균형을 잡고 똑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소의 입에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하하하. 엄마~ 나 봐! 나 이제 잘 타지?”
단번에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미소의 밝은 웃음이 낮은 담장을 타고 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묻어놓았던 유진이의 과거는 행복한 미소의 웃음소리와 함께 천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 * *
미소가 첫 자전거 시승을 무사히 마쳤다.
유진이가 얼른 달려가서 미소의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미소야. 재미있었어?”
“응! 처음엔 좀 놀랐지만 진짜 재미있었어.”
미소는 앞으로 매일 자전거를 타겠다며 큰소리를 친다.
“대신 엄마 없을 땐 타면 안 돼. 알았지?”
“응.”
“약속?”
“약속~”
유진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미소가 그 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배시시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난 어서 들어가자 재촉했다.
“유진아. 마당을 봤으니 이제 방도 봐야지.”
유진이가 눈을 끔뻑인다.
“설마. 방도 옛날처럼 고쳐놨어요?”
“당연하지.”
과거 SBC의 다큐 <휴먼스토리> 촬영을 위해 유진이가 줬었던 사진 속에 집의 안팎이 자세히 찍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빠. 돈······ 얼마 썼어요?”
“별로 안 들었어.”
“아니 딱 봐도 엄청 많이 들었잖아요. 제가 낼게요. 아니 내게 해주세요.”
“걱정하지 마. 블루드래곤이 도와줘서 큰돈은 안 들었어. 그리고 선물에 돈을 받는 게 어디 있어?”
“그래도요······.”
“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일하자. 그거면 돼.”
유진이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요 오빠. 진짜로요.”
이후 유진이는 차수연 제작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 실장님. 여기 암사동인데 인테리어 해주신 거 잘 봤어요. 진짜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리 소품팀도 작업하면서 재미있었대요.
차수연 제작실장과 전화하는 유진이의 눈에선 연신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자 미소가 날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삼촌. 엄마. 오늘 자꾸 울어요.”
“그러게······.”
“사진 속에 엄마는 늘 웃던데.”
“그러게? 엄마가 울보가 됐나 보다. 그치?”
“응. 엄마 울보 됐어.”
난 미소와 함께 장난스레 앞담화를 하며 유진이의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전화의 말미에 차수연 실장이 말한다.
-그런데 혹시 개 한 마리랑 고양이 한 마리 못 보셨어요?
“개하고 고양이요?”
-네. 저희 공사할 때 놀러 오던 녀석들인데 새끼를 배고 있던데요?
순간 유진이의 옛날 사진에 찍혀 있던 암컷 흰색 포메라니안 ‘럭키’와 암컷 치즈 태비 코리안숏헤어 ‘미미’가 떠올랐다.
두 마리는 유진이의 언니 부부가 키우던 녀석들.
유진이가 이 집을 나올 때 미소만으로도 벅차 언니 부부가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큰아버지한테 넘기고 왔었단다.
얘들만이라도 키워달라고.
하지만 큰아버지 부부는 두 마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기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그 녀석들인가?’
사진 속 모든 걸 되돌렸지만 돌리지 못한 건 오로지 유진이의 가족들뿐.
그런데 그 가족 중 일부라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