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9화
409. <지리산> 촬영 현장 2
박선재 감독이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하자 이태식 촬영감독이 씩씩대며 눈을 부라린다.
“박 감독. 지금 뭐랬어?”
“말씀드렸잖습니까? 같이 못 하겠다고요.”
“대체 왜?”
“콘티는 씹어버리고 멋대로 촬영하시잖습니까? 솔직히 전 지금 이게 제 영화인지 이 감독님 영화인지 분간도 안 갑니다.”
이태식 촬영감독이 언성을 높인다.
“이봐 박 감독! 자네는 마누라 말만 듣고 아주 영화를 거덜 내려는 건가? 이 영화에 돈이 얼마나 걸린 줄 알아?”
“압니다. 그래서 조심하려는 거구요.”
“그럼 내 조언을 들어! 되지도 않는 콘티 따위에 목숨 걸지 말고!”
“그 콘티. 제가 직접 만든 겁니다!”
총감독과 촬영감독의 다툼이 더욱 심해지자 신종기 대표가 손을 들어 올린다.
“이거 내 앞에서 뭣들 하는 건가?”
그러자 이태식 촬영감독이 억울하다는 듯 말한다.
“대표님.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새파란 입봉 감독을 도와주라고 해서 여길 왔는데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됐고. 우선 업무를 떠나 조금 전 발언부터 사과하지.”
“예?”
“마누라 말만 듣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 말이야. 그건 좀 너무했네. 안 실장은 엄연히 이 영화의 제작 실장이지 않나?”
이태식 촬영감독이 못 이기는 척 대꾸한다.
“알겠습니다.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나 말고 박 감독한테!”
이태식 촬영감독이 박선재 감독에게 시선을 돌린다.
“박 감독. 내가 좀 오버한 거 같아. 미안······해.”
박선재 감독이 조금은 진정한 말투로 답한다.
“그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이번엔 박선재 감독을 향해 말한다.
“박 감독. 촬영하다 보면 이 정도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잖아. 서로 다 큰 어른들이니 적당히 화해들 하고 영화에만 집중해. 상영 일자 빠듯한 거 아는 사람이 왜 이러나?”
박선재 감독이 짧게 한숨을 내쉰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 시각 이후. 이 감독님이 두 번 다시는 자기 연출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굳이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자 잠잠해졌던 이태식 촬영감독의 언성이 다시 한번 올라간다.
“박 감독! 그러다 영화 망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그리고 스태프 롤에 내 이름도 올라가는데 나보고 입을 닫으라고? 말 잘 듣는 딸랑이 촬영감독을 쓸 거면 딴 사람 구하든지.”
박선재 감독이 미간을 찌푸린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제가 따로 구해보겠습니다.”
박선재 감독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태식 촬영감독이 신종기 대표를 쳐다본다.
“대표님. 대표님이 부탁해서 산장에 틀어박힐 것도 각오하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저도 안 되겠습니다. 그냥 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어허! 이 사람들. 진짜 이럴 거야?”
이태식 촬영감독은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야! 촬영팀. 다들 접어! 우린 필요 없으시단다.”
촬영팀이 눈치를 살피며 답한다.
“가 감독님. 아무리 그래도······”
“뭐야? 내 말 안 들려? 니들 앞으로 나랑 일 안 할 거야?”
촬영팀 네 명은 대부분 이태식 촬영감독과 수년간 호흡을 맞춘 사이다.
그러다 보니 신종기 대표보다 촬영감독의 말에 따라 짐을 싸기 시작했다.
신종기 대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벌컥 화를 낸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감독 없으면 촬영 어떻게 하라고?”
“아 못 들으셨습니까? 저 필요 없다잖아요!”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젠 내가 나설 시간이다.
“대표님.”
신종기 대표가 고개를 돌린다.
“왜? 정 팀장.”
“중재는 이쯤 하시죠.”
신종기 대표가 짜증 어린 표정을 짓는다.
“정 팀장까지 왜 이래? 정 팀장이라도 말려야지.”
“이 상황에서 박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을 어떻게 뽑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다른 분을 모셔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영화판에 이 감독보다 잘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순간 난 이태식 촬영감독의 곁에서 장비를 챙기는 오동호 촬영기사를 가리켰다.
“여기 있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눈을 끔뻑거린다.
“뭐? 이 어린 친구가?”
“예. 나이는 어려도 경험은 꽤 있습니다.”
이어서 난 오동호 촬영기사를 보며 물었다.
“오 기사님. 카메라를 잡을 생각 없으십니까?”
“제 제가요?”
“예. 오 기사님이 촬영한 영화는 전부 봤습니다. 하나같이 훌륭하시던데요.”
오동호 촬영기사의 과거 이력들을 주르륵 열거하자 짜증 가득한 얼굴이던 신종기 대표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대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영화. 저 친구한테 맡기면 문제없다는 거 맞지?”
“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오 기사님은 이미 단편 영화의 촬영감독을 세 번 이상 해본 분입니다.”
신종기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정 팀장이 장담한다면야······ 오케이! 알았어.”
신종기 대표는 내 말만 믿고 오동호 촬영기사를 쳐다본다.
“오 기사. 이참에 촬영감독 해볼 생각 있나? 대우는 경력 3년 차 촬영감독 수준에 맞춰주지.”
“아 아니 그게······.”
“왜 싫어? 실력대로 대접해 주려는 건데?”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승진 제안에 촬영팀 전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막내를 촬영감독으로 올리자 선배들인 자기들을 깡그리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연공서열이 아닌 실력으로만 택했을 뿐이었다.
그때 이태식 촬영감독이 언성을 높이며 덤벼들기 시작한다.
“신 대표님. 진짜 이러실 겁니까? 저 매니저가 대체 뭐라고······”
신종기 대표가 싸늘한 표정으로 이태식 촬영감독을 노려본다.
“정 팀장이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야. 흥행에 관해서는 내가 제일 신뢰하는 사람이지!”
“예? 그 그게 무슨······”
이태식 촬영감독이 당황했지만 신종기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야 이 감독.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핫바지 빙다리로 보여? 내가 중재를 했으면 적당히 알아서 양보도 했어야지!”
신종기 대표는 한국 영화 배급사 2위의 대표에 재벌인 LT 그룹의 멤버.
사업 욕심이 많아서 이런 현장까지 들락거리지만 막말로 보통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인물이다.
그제야 이태식 촬영감독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LT 엔터와아예 끝장이 날 상황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대 대표님······ 그 그게 아니라······”
“됐어 더 말하지 마.”
신종기 대표는 이태식 촬영감독의 말을 끊고 오동호 촬영기사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오 기사. 다 들어서 알겠지만 촬영감독을 맡아 볼 마음은 있나?”
오동호 촬영기사가 조심스레 대답한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 팀장이 추천했는데 부족할 리가 있나?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박 감독만 잘 보필해.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니까.”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동호 촬영기사가 날 쳐다보고도 고개를 숙인다.
반면 이태식 촬영감독은 화를 참지 못하고 부르르 떨다 결국 몸을 홱 돌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쾅!
천왕산장의 오래된 문이 덜렁거린다.
그 이후 오동호 촬영기사만 빼고 촬영 팀 전부가 쭈뼛대며 장비를 챙겨 이태식 촬영감독을 따라 가버렸다.
쿵.
신종기 대표는 콧방귀를 낀 뒤 현장 스태프들에게 말한다.
“자자. 상황 끝났으니까 일들 해야지. 일정 빡빡하다면서?”
“아 예. 대표님.”
스태프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자기 자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오동호 촬영감독은 이태식 촬영감독이 벗어 놓은 스테디 캠으로 다가간다.
스테디 캠은 촬영 시 카메라가 흔들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진동을 감쇄해주는 완충기와 수평 유지대가 연결된 특수 장비.
촬영팀이 모두 나갔기에 이제 촬영감독이 된 오동호가 혼자서 특수 받침대가 달린 옷을 입으려고 하고 있었다.
스태프들이 도와주려 움직였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나서서 오동호 촬영감독을 도왔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독님.”
“감독이라뇨. 전 그냥 촬영기사인데······”
“아까 신 대표님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이제부터 오동호 씨가 ‘지리산’의 촬영감독이십니다.”
“하아~ 암담하네요. 이 정도 규모는 저도 처음인데······”
“제작비 조금 더 들어갔다는 거 빼면 달라질 거 없잖습니까? 그리고 ‘지리산’ 콘티 대로만 찍으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장비를 착용한 오동호 촬영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콘티가 워낙 잘 나왔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근데 뒤에서 잡아주는 사람은 제가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협소한 공간에서 스테디 캠 장비를 착용하고 카메라만을 보면서 움직이다간 다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스테디 캠을 사용할 땐 늘 보조가 한 명 달라붙어야 했다.
“예. 부탁드립니다.”
오동호 촬영감독의 허락을 받은 순간 난 곧장 덕배를 불렀다.
이태풍과 고재수의 연기를 코앞에서 지켜볼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덕배야. 이리 와.”
덕배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다가온다.
난 덕배에게 촬영감독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라고 한 뒤 설명을 이어갔다.
“촬영하는 동안에 감독님이 주변 상황을 인지 못 하니까 넘어질 수 있거든. 그러니까 네가 감독님 허리에 손을 대고 잘 잡아드려. 그러면서 태풍이랑 재수 씨 연기도 자세히 살펴보고.”
“네 형.”
덕배가 긴장한 표정으로 오동호 촬영감독의 허리에 손을 댄다.
준비가 끝났기에 난 박선재 감독에게 말했다.
“바로 촬영 들어가시죠 감독님.”
박선재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 뒤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 * *
조명팀과 음향팀이 다시 세팅을 시작했다.
이태식 촬영감독이 사라진 후 박선재 감독도 조금은 긴장된 표정이다.
이제 실수하면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감독의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촬영 현장에서 가해지는 모든 부담을 홀로 견딜 수 있어야 온전한 감독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선재 감독이 심호흡하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씬 33 들어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오동호 촬영감독이 손을 들어 올린다.
박선재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예. 오 감독님.”
“저······ 조도를 좀 낮추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촬영감독은 단순히 피사체를 찍는 것 이외에도 주변의 조명이나 소품 심지어 의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장을 지휘하곤 한다.
그래서 촬영장의 넘버 2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어린 오동호 촬영감독이 그 권한 중 일부를 언급하자 다들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전 이태식 촬영감독이 월권하다 쫓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선재 감독은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콘티를 벗어나 멋대로 촬영한 게 문제였지 촬영감독의 일을 막으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예. 콘티를 벗어나는 것만 아니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혹시라도 제가 감독님 의도를 벗어나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잠깐 한숨을 쉰 오동호 촬영감독은 눈빛을 번뜩이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조명팀부터였다.
“조명을 살짝만 어둡게 해주시겠어요? 박 감독님.”
“어둡게?”
“예. 콘티 대로라면 긴박한 상황인데 조명이 너무 밝은 것 같습니다. 일단 10 룩스 정도만 낮춰주실 수 있을까요?”
조명 감독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10 룩스 정도면 후 보정으로 하면 되잖아.”
“그게 끝이 아니라서요.”
“그러면 또 뭐?”
“화로에 땔감을 두서너 개만 더 넣어서 빛에 붉은 톤을 조금 섞어 주세요.”
선이나 정리하던 막내 촬영기사가 촬영감독답게 하나씩 지시하자 다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더군다나 두 배우의 의상이 너무 깔끔하니 조금 흐트러트려 달라고 지적했을 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조명 감독이 날 쳐다보며 웃는다.
“정 팀장이 물건 하나는 제대로 골랐는데?”
프로는 프로를 알아보는 법.
조명 감독은 그때부터 오동호를 촬영감독으로 인정했다.
“조명팀! 지금부터 오 감독님 말에 따라서 바로바로 움직여! 만호. 땔감 한 개씩 넣으면서 촬영 감독님이 바라는 색감이 나오는지 체크 해봐.”
“예. 감독님.”
“그리고 소품팀이랑 의상팀도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해? 촬영 감독님의 지시 사항 못 들었어?”
“예!”
오동호 촬영감독의 마이크로 컨트롤이 이어질수록 이태식 촬영감독이 사라진 불안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박선재 감독이 들뜬 표정으로 싸인을 내렸다.
“준비됐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씬 33. 레디~ 액션!”
박선재 감독이 슛을 외치자마자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오동호 촬영감독이 찍어낸 영상은 이태식 촬영감독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박선재 감독의 의도를 그대로 살린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자신만의 색감을 더해 콘티의 긴박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역시 오동호야.’
모니터로 비친 영상의 퀄리티가 확연히 달라지자 박선재 감독이 들뜬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다.
“좋습니다~ 오 감독님. 거기서 조금 더 타이트하게 페이스 샷 잡아주세요. 예. 오케이.”
오동호 촬영감독은 두 배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게 카메라를 잡았다.
주연배우와 메인 악당이 대화를 나누다가 천천히 적의를 가지는 모습이 선명히 드러난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꽉 깨문 어금니 때문에 살짝 튀어나오는 턱관절의 근육들.
느릿느릿 말하는 갈라진 입술의 움직임까지.
오동호 촬영감독이 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포커스를 잡았기에 이태풍과 고재수의 날 선 감정들이 영상에 생생히 담기고 있었다.
역시나 촬영감독을 바꾼 건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지리산>의 영화도 내 배우들의 커리어도 함께 지킬 수가 있었다.
그 순간 안유주 제작실장이 모니터를 확인한 뒤 내게 쌍 엄지를 세우며 입 모양으로 말한다.
‘감사해요 팀장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