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8화
408. <지리산> 촬영 현장 1
끼이익.
천왕산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산장 거실 중앙에 화목난로를 두고 이태풍과 고재수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촬영은 잠시 중단된 상태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배역에 몰입한 상태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촬영 준비를 하던 스태프들은 신종기 대표를 보고도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벌써 몰입 시작했군······’
워낙 인상 깊은 모습이었기에 급히 폰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자 이태풍의 눈이 우리 쪽을 향했다.
이제라도 몰입에서 깨어나 신종기 대표에게 인사할 줄 알았지만 이태풍은 우리가 아닌 강시아를 향해 말을 건다.
“이제 왔어? 우리 딸?”
현재 촬영 중인 <지리산>이란 영화는 한국 대학교 산악부 동아리 출신 일곱 명이 10년 만에 지리산 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소재를 다룬 재난 스릴러물이다.
영화의 내용은 갑작스러운 폭설에 동아리 멤버들이 천왕산장으로 대피한 이후.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동아리 멤버인 사이코패스 ‘오명진’이 나타나 10년 전 일에 얽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태풍은 <지리산>에서 10년 전 동아리 회장이었던 ‘강대현’ 역을 맡았는데 그는 아내도 잃고 혼자서 딸 ‘강영아’를 키운다는 설정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집에 혼자 남는 딸을 걱정해 동아리 모임에 데려왔다.
그 결과 사이코패스 오명진에게서 딸을 지키느라 온갖 일을 겪게 되게 된다.
이태풍은 영화 내내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드러내는 역할이었기에 강시아를 향한 눈빛은 더없이 다정했다.
강시아는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리자 당황했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활기차게 답했다.
“응! 아빠!”
강시아 역시도 눈 깜짝할 사이 연기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이태풍이 웃으며 양팔을 내뻗었다.
“추운데 뭐해? 이리 와.”
“알았어~”
강시아는 빠르게 달려가 이태풍에게 안겼다.
이태풍은 강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우리 딸. 뭐 하다가 이제 왔어?”
“밖에서 놀다가 왔어. 눈사람도 만들었어.”
“지리산에는 반달곰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곰이 우리 영아를 앙~ 하고 물어가 버리면 어쩌려고?”
“정말?”
“그러어~엄. 아앙~”
순간 강시아가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힝~ 무서워.”
이태풍이 웃으며 강시아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빠가 우리 영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거야. 평~생~.”
강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내민다.
“약속?”
“약속!”
이태풍이 손가락을 걸며 눈웃음짓는다.
극 중 초반부인 씬 22에서 두 부녀가 약속하는 장면.
그 모습을 본 박선재 감독과 스태프들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주요 아역이라 연기력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졸지에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해버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강시아를 최지영에게 맡겨서 키운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화목난로 맞은편에 앉은 고재수는 싸늘한 표정으로 난로에 땔감을 넣어댄다.
타다닥.
마른 나뭇가지 장작이 불에 붙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재수는 배역 몰입을 하느라 불길에 타오르는 나무를 그저 빤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허허. 이거 아무래도 내가 끼면 안 되는 분위긴데?”
신종기 대표는 자신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는 두 배우를 보며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자 박선재 감독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두 배우가 한참 몰입하고 있어서요.”
“아냐. 아냐. 나한테 인사하는 게 뭐가 중요해? 영화가 잘 되어야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오히려 보기 좋은데 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종기 대표는 이은주 팀장을 데리고 방해가 되지 않게 산장 한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촬영 계속하지?”
“예. 대표님.”
나 역시도 강시아의 엄마와 덕배를 데리고 그 곁으로 향했다.
우리가 자리를 비켜주자 박선재 감독은 중단했던 촬영을 재개할 준비를 한다.
“자. 제대로 된 인사는 식사 때 다시 하시고 바로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배우들은 스탠바이 해주세요.”
오랜 조감독 생활을 한 덕인지 박선재 감독이 그럴싸하게 지시를 내렸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자 강시아도 이태풍의 품을 빠져나와 연출부 막내의 곁으로 가 앉았다.
화목난로를 두고 이태풍과 고재수는 서로를 노려보며 촬영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때 올해로 경력 20년 차인 촬영감독 이태식이 손을 들어 올린다.
“박 감독. 여긴 스탠바이.”
“촬영팀은 됐고 조명팀과 음향팀은요?”
“이쪽은 조금만 세팅하면 끝납니다.”
“음향팀 끝났습니다!”
이태식 촬영감독은 신종기 대표가 박선재 감독을 위해 특별히 붙여준 베테랑이다.
현장에서는 촬영감독이 총감독 다음으로 중요했기에 신인인 박선재 감독을 위해 경력 많고 능력 있는 이를 붙인 듯했다.
꽤 까칠하고 강압적인 사람이긴 해도 일은 잘한다는 평이 있었다.
그런데 이태식 촬영감독 곁에 있는 촬영기사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저 사람은······ 우동호 아냐?’
올해 25살인 우동호는 앞으로 5년 뒤 모든 영화감독이 찾게 되는 한국 최고의 촬영감독이 된다.
감독의 의도를 어떤 누구보다 잘 살려내면서도 아름다운 영상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학창 시절부터 여러 아마추어 영화제에서 수상한 인재였는데 현재 카메라 선이나 정리하는 보조 팀원이라니!
‘아깝다. 이 영화도 우동호 씨한테 맡기면 더 좋을 텐데······’
너무도 아쉬웠지만 이미 촬영팀이 있는데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스태프들의 준비가 끝나자 박선재 감독은 모니터링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난 그 틈을 타 덕배에게 <지리산>의 대본이 적힌 태블릿을 건넸다.
“덕배야. 잠시 네가 하던 배역은 잊고서 이 대본 보면서 두 사람이 연기하는 거랑 비교해 봐. 내일 오디션에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최지영 배우에게 연기를 배울 때는 여배우와의 호흡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남자 배우들끼리 날을 세우는 연기를 직접 보고 배울 기회였다.
오디션에서도 국선과 부딪히는 장면이 있었기에 참고하기에는 딱 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난 덕배에게 잠시 <화란전>은 잊고 이태풍과 고재수의 연기에 집중하라고 일렀다.
고개를 끄덕인 덕배는 곧 촬영이 시작될 씬 33 부분을 찾아 읽어나갔다.
그때 박선재 감독이 손을 들어 올린다.
“자. 다들 조용하시고.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그와 동시에 이태풍과 고재수가 날 선 표정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차가운 삭풍의 바람이 불 듯 두 사람의 말에는 매서움이 가득했다.
* * *
이태풍과 고재수가 열연을 펼치기 시작하자 덕배는 두 사람의 연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내 눈은 박선재 감독이 보고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어떤 연기를 펼치든 관객들이 보는 장면은 저 작은 모니터 안의 영상이니까 그런데 모니터 안에서 어이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촬영감독이 왜 멋대로 하는 거지?’
촬영감독은 총감독이 만든 콘티를 바탕으로 영상에 담는 일을 하는 사람.
하지만 모니터 속의 영상은 감독이 직접 만든 콘티와 전혀 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현장에 비치된 콘티를 거듭 확인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콘티를 그린 박선재 감독은 두 사람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잡아서 관객들이 표정 연기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지금 모니터 화면에선 두 사람의 전신이 와이드 샷으로 나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건 이태식 촬영감독이 독자적인 연출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박선재 감독은 왜 보고만 있지?’
혹시 따로 지시라도 한 건가 싶어 박선재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박선재 감독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반면 이태식 촬영감독은 신이 나서 촬영에 열중한 상태였고.
그 모습을 보니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었다.
‘박선재 감독을 초보라고 무시하고서 이태식 감독이 멋대로 촬영하는 거군.’
이번 영화는 모든 제작비를 LT 엔터에서 투자했다.
그리고 이태식 촬영감독은 신종기 대표가 직접 추천한 사람이다 보니 박선재 감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분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랬든 저랬든 영화의 총책임자는 박선재 감독.
현장을 말아먹든 볶아먹든 연출은 총감독의 권리였다.
그러니 이태식 촬영감독의 경험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건 월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난 곁에 있는 안유주 제작 실장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안유주 제작실장이 고개를 돌리자 폰 메모장에 글을 적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촬영 감독님이 멋대로 찍으시는 것 같은데 언제부터 저랬습니까?]
안유주 제작 실장이 입술을 꾹 닫은 채 내가 건넨 메모장 아래에 글을 적는다.
[첫날부터요. 촬영은 자기가 책임진다며 계속 제멋대로 하시고 계세요.]
난 다시 폰을 받아들고 글을 적었다.
[저한테 진작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습니까?]
[저도 그럴까 생각했는데 신 대표님이 추천하신 분이기도 하고······ 지금 촬영 감독님 빠지면 상영 날에 절대 못 맞출 것 같아서요. 그래서 감독님은 일단 찍고 나중에 편집으로 커버하시겠대요.]
‘이대로는 안 되겠군.’
드라마의 왕이 작가라면 영화판의 왕은 감독.
특히나 <지리산>의 시나리오는 박선재 감독이 직접 썼기에 그보다 더 작품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촬영감독이 베테랑이라고 할지라도 감독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특히 초반부터 저렇게 제멋대로 한다면 앞으로는 더욱 큰 사고를 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영화는 원래의 의도가 아닌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이대로 뒀다간 영화의 흥행에도 이태풍과 고재수의 커리어에도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았다.
결국 난 결단을 내렸다.
[실장님. 저기 오동호 촬영 기사님이 실력이 좋습니다. 이태식 촬영감독을 충분히 대체하고도 남는 실력잡니다.]
[오 기사님이요?]
안유주 실장이 25살의 앳된 오동호를 보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표정을 짓는다.
보통 촬영감독은 경험이 많을수록 능력도 뛰어난 편이기 때문이다.
[어리긴 해도 20살 때부터 단편 영화제 ‘아전’ ‘태후의 운명’ ‘양화주’에서 촬영감독을 맡았던 분입니다.]
단편 영화제는 별로 챙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안유주 실장은 이선 필름이라는 소형 영화사의 경리 겸 비서로 일하며 온갖 시나리오와 영화를 섭렵했었다.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다행히도 그녀는 내가 말한 작품들을 알고 있었다.
[저도 그 작품들 알고 있어요. 미장센이 엄청 좋은 작품이었는데 그게 저 오 기사님이 찍은 거라 이거죠?]
고개를 끄덕이자 대안을 찾은 안유주 실장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박선재 감독은 조재경 감독에게 짓밟히고 공학범 감독 때문에 온갖 마음 고생을 다 했었다.
그 고생도 참으며 겨우 메가폰을 잡았는데 촬영감독을 잘못 만나 이런 일마저 겪을 줄이야.
하지만 오동호 촬영 기사가 있었기에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안 실장님. 어떻게 하실래요?]
안유주 실장은 아내로서 그리고 이번 작품의 제작실장으로서 결단을 내린 눈치였다.
[사고 한번 칠게요.]
단호한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난 메모를 적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돕겠습니다.]
* * *
“컷! 여기까지.”
박선재 감독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촬영을 멈췄다.
순간 날을 세우며 격론을 벌이던 이태풍과 고재수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몰입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태풍도 이태풍이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고재수의 모습에 신종기 대표가 감탄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 정 팀장이 데려온 사람이 다르긴 다르군. 안 그런가 박 감독?”
“아 예······ 뭐······”
박선재 감독이 대답을 탐탁치 않게 하자 신종기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친데?”
박선재 감독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안유주 제작실장이 먼저 대답에 나섰다.
“신 대표님. 사실 촬영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이태풍과 고재수의 연기도 뛰어났고 감독이 NG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고 하자 신종기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문제?”
“촬영이 콘티 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그 순간 이태식 촬영감독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안 실장. 그 말.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잘 알고 계시네요.”
“지금 뭐랬어?”
이태식 촬영감독의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안유주 제작실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몰라서 물으세요? 콘티는 아예 참조도 안 하시고 촬영하고 계시잖아요.”
“이봐 콘티에만 사로잡히면 될 것도 안 돼. 현장감을 살리려면 그때그때 맞춰서 유도리를 발휘해야 하는 거야. 알아?”
“멋대로 하는 게 언제부터 유도리가 됐죠?”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지금 말이면 다인 줄 아나!”
촬영감독과 제작 실장이 정면 출동을 일으키자 현장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서서 안유주 실장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박선재 감독이 나보다 한발 먼저 나서 촬영감독을 들이받아 버렸다.
“이 감독님. 이제까지 참았지만 더는 함께 촬영 못 하겠습니다.”
난 잠시 사태를 관망하며 두 사람에게 힘을 보탤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이태식 촬영감독을 <지리산>에서 몰아내야 이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질 테니 말이다.
‘이태식 감독. 당신 아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