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3화
403. 최덕배 1
서울역 반대편의 쪽방촌 골목.
인파를 헤치고 지하도를 따라서 여기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굽이굽이 휘어진 언덕길에 들어온 순간 검은 모자를 놓쳐 버렸다.
미로처럼 된 골목길과 오래된 건물들이 언덕을 따라 빼곡히 늘어서 있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길. 어디로 갔지?”
지갑에 있는 돈도 아까웠지만 신분증과 신용카드를 재발급받을 생각에 짜증이 치솟았다.
“일단 분실 신고부터 해야겠네······”
혹시 카드를 사용할지 몰라 신고부터 하려고 폰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대화 소리가 들린다.
-헉헉헉. 형. 형이 여긴 왜 왔어?
-일 끝나고 집에 가는데 네가 막 뛰고 있길래 따라왔지. 근데 그거 뭐야? 너 또 지갑 훔쳤어?
-······
-야 당장 돌려줘!
-헉헉. 아 안 돼. 왕팔 형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늘까지 돈 20만 원 맞춰오라고 했단 말야!
-그렇다고 소매치기를 해?
-헉헉. 형. 나도 진짜 훔치기 싫어. 근데······ 근데······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누군가가 내 지갑을 훔쳐 간 소매치기를 탓하고 있다.
그런데 그 소매치기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고 한다.
어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지갑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있지?’
천천히 골목을 돌아가자 또 다른 골목 하나가 나온다.
끝이 막혀 있는 골목에서 커다란 키의 남자가 검은 모자를 닦달하고 있었다.
검은 모자는 내 지갑을 훔쳐 간 녀석.
그리고 키가 큰 남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
그 순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덕배야. 네가 여기에······ 왜 있어?’
185cm 정도의 훤칠한 키에 구릿빛 피부.
웨이브진 머리카락을 단발로 늘어뜨린 최덕배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 때문에 꽤 남성적인 외모지만 나이를 숨길 수 없는 앳된 얼굴이다.
당장이라도 ‘덕배야’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이름을 외치면 경계할까 봐서 가까스로 참을 수가 있었다.
그 순간 검은 모자를 쓴 놈이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혀 형. 지 지갑 주인······”
덕배의 나이는 올해 19살.
검은 모자가 덕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생각보다 어린 소매치기범이다.
순간 덕배가 날 힐끔 쳐다보더니 검은 모자에게 손을 내민다.
“동준아. 지갑 내놔.”
“어? 어.”
사색이 된 검은 모자가 내 장지갑을 덕배에게 건넨다.
덕배는 지갑을 받은 뒤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깍듯하게 숙인다.
“저기 아저씨. 지갑은 그대로 돌려드릴 테니 경찰에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얘도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그깟 지갑.
지금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지갑을 되찾은 것보다 덕배를 찾았다는 게 내게는 더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기분 같아서는 소매치기를 한 검은 모자에게 돈을 다 내주고 탭댄스라도 추고 싶었다.
그 순간 난 덕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신고 안 할 테니까 너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예? 제 전화번호를 왜요?”
난 곧장 매니저들이 주로 쓰는 수법을 사용했다.
“너 길거리 캐스팅이라고 들어 본 적 있지? 키도 크고 잘 생겼는데 연예인 하면 되겠네. 아 여기 내 명함인데······”
덕배를 만나서 들뜬 나머지 너무 초짜 매니저처럼 떠벌렸다.
명함을 받아든 덕배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런 거 다 사기라고 하던데요?”
“아냐. 못 믿겠으면 우리 회사로 가자. 굴렁쇠 엔터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일행들이 다가온다.
“뭐야?”
고개를 돌려 보자 덩치 좋은 다섯 명 정도가 각목을 들고 있었다.
“동준아! 형님들 수금하러 왔다!”
“약속은 지켜야지~”
남자들이 나타나자 동준이라 불린 녀석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조금 전 20만 원을 구해야 한다는 건 아마도 이 인간들 때문인 모양이다.
그 순간 덕배가 동준이라는 녀석을 지키기 위해 앞을 가로 막아선다.
아무래도 덕배와 이야기를 나눠보려면 쓰레기들 청소부터 해야 할 모양이다.
* * *
난 동준이라는 녀석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몇 살이야?”
“열여섯······이요.”
“어리네. 저것들이랑은 무슨 관계고?”
“그냥······ 이 동네 형이에요.”
“동네 형은 무슨. 딱 봐도 조폭인데.”
“네······”
사정을 들어보니 소매치기는 8년 전 지금은 소탕된 앵벌이 조직에 끌려가서 강제로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내 지갑에 손을 댄 건 내 앞에 각목을 들고 나타난 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그렇다 이거지······”
대충 사정을 듣는 동안 일행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어이~ 그쪽은 뭐야? 옷차림을 보니 덕배 저놈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나이는 대충 20대 중반 정도.
단단한 체형에 만두귀를 한 놈이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두귀를 보면 유도 아니면 레슬링 경험이 있는 놈이었다.
그때 덕배가 앞으로 나섰다.
“왕팔이 형. 이 사람은 내버려 둬요. 그냥 지나가던 분이에요.”
왕팔이라 불리는 남자가 날 힐끗 쳐다본다.
“아 그래? 그럼 꺼지세요. 단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놓고 옷도 벗어 놓으시고~ 아참. 그래도 다 벗으면 쪽팔릴 테니까 팬티 한 장까지는 봐 드릴게.”
순간 덕배가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저씨. 얼른 도망치세요. 저놈들 진짜 막 나가는 놈들이에요.”
“넌 어쩌려고?”
“전 걱정하지 마시고 아저씨라도 피하세요.”
덕배도 꽤 주먹을 잘 쓰는 편이었지만 상대의 수가 많다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물러설 생각이 없다.
덕배를 여기서 놓친다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됐어. 쟤들이 날 그냥 보내주겠냐? 딱 봐도 속옷까지 벗길 낌새인데 뭘?”
난 덕배의 옆에 선 다음 입고 있던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왼손에 둘둘 감았다.
왼팔이 두툼해지자 제법 그럴싸한 방어 도구가 되었다.
덕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속삭인다.
“아저씨! 지금 이거 장난 아니에요! 쟤들 그냥 협박만 하는 애들 아니라고요. 진짜 조폭이에요!”
“걱정하지 마. 족보도 없는 조폭 따위론 날 어떻게 못 하니까.”
그때였다.
왕팔이 피식 웃으며 각목을 바닥에 두드린다.
둔탁한 각목 소리가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며 퉁퉁하고 울린다.
“어이~ 무슨 동창회 하냐? 둘이 뭘 그렇게 속닥거려? 앙?”
난 덕배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일단 저것들부터 정리하고 다시 이야기하자?”
난 만두 귀의 우두머리를 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어이~ 덤벼! 왕팔이!”
왕팔이라는 놈이 이를 드러낸다.
“미친 새X.”
화가 난 왕팔이가 옆에 있는 녀석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야! 제껴!”
“예!”
왕팔의 지시가 떨어지자 일행들이 각목을 쥐고 달려온다.
순간 난 곁에 있는 덕배를 향해 말했다.
“덕배 넌 나서지 말고 백업이나 잘해!”
“아 아니 아저씨! 잠깐만요!”
난 당황한 덕배를 놓아둔 채 앞으로 나섰다.
좁은 골목길.
네 명이나 되는 왕팔의 일행들이 한 명씩 줄을 지어 덤벼든다.
“아저씨. 영웅 놀이는 영화에서나 하쇼!”
부웅~
맨 앞에 선 놈이 각목에 힘을 담아 휘둘렀다.
협소한 공간 탓에 각목을 휘두를 각도가 뻔했기에 날아오는 각목의 궤적에 맞춰 캐시미어 코트가 감긴 왼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응? 뭐야?”
그와 동시에 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첫 번째 놈의 턱에 스트레이트 주먹을 날렸다.
퍽.
턱에 정타를 맞자 첫 번째 놈의 다리가 풀리며 정신을 잃어버린다.
이어서 난 왼손에 감은 코트를 마치 방패처럼 사용하며 차례차례 덤벼들던 놈들을 기절시켰다.
쿠웅-쿵.
마치 수수깡이 넘어지듯.
네 명이 일렬로 좁은 골목에 쓰러져 버렸다.
“휴우~”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상황에 왕팔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 뭐야? 너?”
왕팔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나? 샐러리맨.”
매니저이긴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순간 뒤에서 덕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왕팔이 형 유도 배웠어요! 조심하세요!”
그때였다.
왕팔이 각목을 옆으로 집어 던지고는 호기롭게 외친다.
“자세를 보니 권투를 배웠나 본데 원래 길러리 싸움은 유도가 짱이지. 야. 덤벼!”
왕팔이라는 놈은 맨손으로 붙어 보자며 두 손을 앞으로 내민다.
내 옷깃을 붙잡으려는 자세.
유도를 전문적으로 배운 이에게 옷깃을 잡히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
옷깃을 잡히는 순간 업어치기를 비롯해 온갖 유도 기술에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팔은 두툼한 목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먹 한 방으로 쓰러뜨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만약 주먹 한 방으로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내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때 왕팔이 갑작스레 덤벼들었다.
‘안 되겠군.’
난 그 순간 쓰러진 놈들이 떨어뜨린 각목을 쥐어 들었다.
그리고는 달려드는 왕팔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빠각!
“컥.”
달려오던 왕팔이 각목에 머리를 맞아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쿠웅.
왕팔의 커다란 몸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바보냐? 누가 맨손으로 싸워준대?”
뒷일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CCTV가 없으니 뻔뻔하게 우겨야겠다.
겁을 먹어서 내가 뭘 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다행히 죽으라고 휘두른 건 아니다 보니 기절만 했을 뿐 숨은 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젠 입을 맞출 시간.
목격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덕배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 아저씨. 무 무슨 특수부대 출신이에요?”
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면제.”
* * *
녀석들을 모두 제압하고 곧바로 서재일 검사에게 신고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10명이나 나타났다.
“가만히 있어!”
“아 XX. 왜 우리만 잡아? 맞은 건 우린데!”
경찰들은 왕팔과 일행들에게 수갑을 채운 뒤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너희들 앞으로 들어온 고소만 열다섯 건이야. 왕파리!”
왕팔과 일행들은 쪽방촌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명 왕파리파란다.
머릿수는 얼마 안 되지만 수법이 유독 잔인하고 악랄하게 착취하는 놈들이었다고.
난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왕파리파를 보며 서재일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사합니다. 검사님.”
-감사는 무슨요. 나중에 잠깐 들어와서 참고인 조사 좀 부탁드립니다.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온갖 나쁜 놈들은 제가 아닌 정 팀장님이 잡으러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이거 제가 검사 옷을 벗어야겠는데요?
“아닙니다. 검사님.”
-아참. 할 말이 있으니 좀 늦어도 제 사무실로 좀 들어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서재일 검사가 나중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안도한 난 덕배에게 고개를 돌렸다.
덕배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저기 아저씬······ 대체 정체가 뭐예요?”
“말했잖아. 평범한 샐러리맨이라고.”
뭐 정확히는 회귀한 매니저지만.
그런데 그때였다.
옆에 있던 박동준이 무릎을 털썩 꿇는다.
“아 아저씨. 진짜 죄송해요. 살려주세요······”
왕팔을 너무 가볍게 제압한 까닭인지 박동준은 바싹 얼어버렸다.
생각해보니 아까 전 지갑을 받으며 사정도 듣느라고 박동준을 용서할 겨를이 없었다.
이게 다 왕파리파 자식들 때문이다.
덕배가 박동준의 앞을 가로막으며 함께 빌기 시작한다.
“아저씨. 동준이는 이제 16살인데 좀 봐주세요. 얘가 잘 못 되면 얘네 할머니는 굶어 죽어요. 얼마 전 할머니가 뺑소니 차에 치어서 얘가 대신 돈 벌고 있거든요.”
박동준이 눈에 눈물을 그렁대며 말한다.
“죄송해요 아저씨. 왕팔이 형이 제가 돈 번다고 상납하라고 해서요. 돈 안 가져오면 진짜 죽을 만큼 때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니 신고만큼은 제발······”
박동준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는 폐지를 줍다 뺑소니를 당해 며칠째 누워만 있다고 한다.
세상엔 왜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쓰레기들이 많은 건지.
먹먹함에 가슴이 아파 온다.
난 한숨을 내쉰 뒤 덕배를 지나 무릎을 꿇고 비는 박동준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순간 내가 때리려는 줄 알고 박동준이 움찔한다.
이렇게 간이 작은데 소매치기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난 박동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예?”
박동준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일어난다.
“걱정하지 마. 신고할 거였으면 아까 경찰들 왔을 때 신고했어. 사정 알았으니까 더는 빌지도 말고.”
박동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흑흑. 죄 죄송해요.”
고작 16살의 나이.
이 모든 일을 홀로 견뎌내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었다.
박동준을 달랜 난 덕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야지. 덕배야. 너 연예인 안 할래?”
박동준을 용서해주고 같이 싸우고(?) 조금 친근하게 굴었더니 약간은 서로 편해졌다.
그러나 덕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단번에 내 제안을 거절했다.
“죄송해요.”
“응? 왜?”
“저······ 동생 때문에 돈 벌어야 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연예인이라뇨. 저 그럴 여유 없어요.”
덕배는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고 사느라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동생이 있다고?
분명 회귀 전에 덕배는 혈혈단신으로 굴렁쇠에 왔었는데?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동생도 없이 혼자 굴렁쇠에 왔다는 건 그 동생에게 올 수 없는 사고가 생긴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