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4. 첫날 2
달칵.
다섯 번의 전화 연결 끝에 통화가 이뤄졌다.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원장님. 네. 저 미소 이모요. 저기 실은요······.”
-아 네. 미소 이모~. 아 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오후 5시까진 같이 있어 줄게요. 아휴~ 고맙긴요. 호호. 미소가 얼마나 착한데요.
원장님 혼자서 운영하는 소규모 유치원이라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직접 진행하다 전화를 늦게 받았단다.
그런데 유진아.
그 이야기 언제 끝나니?
두 사람의 대화가 꼬리물기를 하며 놓을 기색이 없었다.
3분 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슬쩍 눈치를 주자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원장 쌤. 하여간 이따가 들를게요.”
-아이고. 우리 미소 이모 오면 애들 난리 날 텐데. 연예인 왔다고······.
“연예인은 무슨요. 이제 겨우 소속사에서······.”
-호호. 유치원 오시면 따뜻한 팥죽이나 먹으면서 이야기 좀 해요. 그 회사 조민성 배우가 그렇게 좋더라 난?
“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해요.”
전화를 끊은 유진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자세한 이야기가 또 남은 거야?
그럼 이제까지 한 건 뭔데?
어쨌건 미소가 혼자 집으로 가지 않게 되었으니 사고를 당할 일은 사라진 셈이다.
‘됐다. 이제 미소는 살았어.’
현장 촬영만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야지.
늘 해맑게 웃던 미소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미소가 좋아하겠다. 방송국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랄라~.”
엄마 미소가 가득한 유진이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콧노래를 부르던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냐. 그냥······ 좋아 보여서.”
유진이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우리 미소 소원이었는데요. 진짜 고마워요 오빠.”
흥얼대며 대본으로 시선을 돌리는 유진이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더 고맙다고.
하여튼 오늘은 유진이와 미소를 절대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요즘 호텔비는 얼마나 하더라?
아니다.
모텔······ 정도로 합의 봐야겠다.
이 시점에 내 통장 잔고가 5백만 원 정도 되려나?
가난한 지갑 형편에서 회귀했다는 사실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래도 제일 깨끗한 모텔 방으로 구해 줘야겠다.
* * *
드라마계의 대모 이지연 작가는 종종 현장에 나와서 자기의 작품 진행을 살피는 습관이 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호통을 쳐대는 거로도 유명하고.
그 덕에 그녀의 현장 방문은 매번 지랄 파티로 이어지곤 했다.
배우가 울고 매니저는 달래고 AD는 뒷수습하고 PD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작가한테 싹싹 빌고.
하지만 시청률 30%를 넘나드는 작품을 수차례 집필한 최고 반열의 작가이기에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진이는 이제 곧 그 이지연 작가 앞에서 연기를 펼쳐야 했다.
대본을 읽으며 촬영을 준비하던 유진이에게 잠시 후 생길 일을 알려줬다.
“작가님이······ 오신다고요?”
“어. 30분 정도 뒤에?”
새카맣게 밑줄이 그어진 대본 책이 정유진의 불안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오빠. 나 자신 없는데요?”
평소엔 강단 있는 유진이었지만 첫 녹화라 그런지 약간은 겁을 먹은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 니가 연습하는 걸 내가 쭉 지켜봤는데 괜찮아. 한 부분만 고치면 완벽할 것 같더라.”
“어디요?”
나는 유진이가 23번의 NG를 냈던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세 번째 문장에 네 번째 단어. 아 그리고 이지연 선생님은 딕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시거든. 특히 대사가 복잡한 부분에서 실수하기 정말 쉬우니까 입에 붙을 때까지 이 부분만 반복해.”
“알았어요.”
내 설명을 들은 유진이는 발음이 익숙해질 때까지 대본 연습을 이어갔다.
아직 배우로서 자아가 강하지 않다 보니 매니저의 조언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난 내친김에 대본의 지문과 대사를 해석해 주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게 연기에도 도움이 되니까.
내 대본 해석을 들은 유진이가 신기해했다.
“와 대박. 오빠. 어떻게 그렇게 대본 분석을 잘하세요? 트레이너 선생님보다 한 수 위인 거 같아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진이를 향해 속으로 답했다.
내가 어?
이지연 작가랑 어?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으면서 대본에 관해서 이야기한 게 몇 번인데!
하여간 이지연 작가의 모든 대본을 달달 외고 있는 나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본에 집중하자. 작가님 오실 때까지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넵! 선생님!”
자신감을 되찾은 유진이는 그 뒤로 한참 대본을 곱씹어 가며 대사 연습을 이어 갔다.
정확한 가이드의 영향인지 연습하면 할수록 유진이의 연기는 더욱 매끄러워지고 있었다.
* * *
“됐어. 그만하면 합격. 이제 가자.”
“어딜요?”
“이지연 작가 만나러. 이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아야지.”
이지연 작가는 배우를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테스트를 한다.
그렇다면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가득한 저 멀리 있는 세트장보단 이지연 작가 앞에서 보여주는 게 낫다.
하지만 유진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빠. 매는 최대한 늦게 맞는 게 좋은 거래요. 때리는 사람 힘이 떨어졌을 때요.”
그럴싸한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개똥철학에 동조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이지연 작가님도 마냥 무섭기만 한 분은 아냐.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
“제가 들은 소문과는 다른데요?”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지만 난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저었다.
“잘못 들은 거야. 어서 가자.”
‘뭐 맞을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대본과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유진이와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저기 오신다.”
소형 버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분홍색 롤스로이스 차량이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딸가가라라락.
바닥에 깔린 자갈돌이 마구 튀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차가 멈추자 운전석에서 머리를 질끈 묶은 젊은 여성이 무거워 보이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내렸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김솔잎 작가?’
그러고 보니 이 무렵 그녀가 이지연 작가의 보조 작가였지.
김솔잎 작가는 앞으로 10년 후 이지연 작가와 쌍벽을 다투는 대작가가 된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대충 이때쯤 김솔잎 작가가 독립하며 대박이 터졌으니까.
‘작품 이름이랑 시청률을 적어 뒀었는데 파란 하늘이었지 아마?’
난 내 기억이 맞는지 보기 위해 다이어리 앱 V10을 펼쳤다.
그런데······.
다이어리의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12일]
-PM 01:3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보고 사항) 경기도 구리 세트장 정유진 NG 23번. 현장에서 작가에게 대판 깨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이 다이어리?
일정이 변하기도 하는 건가?
설마 내가 유진이의 연기를 봐준 것 때문에 다이어리에 적힌 미래가 사라진 거야?
의문이 꼬리를 잇다 빠르게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한 일에 따라 다이어리의 일정이 변한다.’
그렇다면 이 다이어리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다.
10년 치 일정이 적힌 것만 해도 엄청난데 변화하는 미래도 확인할 수 있다는 거니까.
너무 놀라 오른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앗 뜨뜨뜨.”
혀 데었다.
“괜찮아요?”
“어. 괜찮아. 그리고 너도 미리 숨 좀 고르고 있어. 이지연 작가님이 좀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타입이거든. 바로 연기하라고 하실 수도 있으니까.”
유진이가 연기를 준비하는 동안 혹시나 또 일정이 바뀐 부분은 없는지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그런데.
오늘의 일정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12일]
-PM 05:30 강동경희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미소가 죽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건 왜 안 사라지지?’
분명히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서 미소가 집으로 못 가게 막았는데?
설마 내 행위에 따라 예정된 결과를 막을 수 있다는 가설이 틀린 건가?
그 순간.
머릿속으로 유명한 영화의 한 장면이 지나갔다.
<데스티네이션>.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명작이지만 이 타이밍에 그 영화가 떠오르는 건 좀 아니잖아!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한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화를 건 것만으로는 미소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당장 미소부터 데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이지연 작가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한다.
‘이대로 이지연 작가의 눈에 들 기회를 포기하고 가야 하는 건가? 유진이가 이 기회를 얻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었는데!’
그 순간 미소가 사고를 당하는 시각이 떠올랐다.
오후 3시.
앞으로는 대략 한 시간 반 정도가 남은 시각이다.
동시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침착해 윤호야. 둘 다 할 수 있어. 유진이 연기 보여주는 데는 5분 정도면 돼. 그러니까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유치원으로 달려가서 미소를 데려오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터질듯한 심장을 억누른 채 유진이를 이끌고 이지연 작가에게 데려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야 했으니까.
* * *
이지연 작가는 편당 고료를 1억 이상 받는 S급 작가다.
4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화려한 호피 무늬 코트에 7cm가 넘는 힐을 소화하는 그녀는 작가가 아니라 배우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힐을 신고 빙판을 걷는 건 무리인지 플랫슈즈를 신은 김솔잎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작가님.”
“또 그놈의 잔소리. 그만 좀 해. 셔럽~.”
훗날의 대작가 김솔잎도 당장은 그저 일개 보조 작가 겸 시종 신세일 뿐이다.
미소의 문제가 걱정되지만 일단 눈앞의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난 이지연 작가에게 도착하자마자 깍듯하게 인사했다.
담당하는 배우인 유진이의 이름을 말하면서 말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지연 작가님.”
“이설란 역을 맡은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작가님 작품을 진심으로······.”
이지연 작가는 코끝에 걸린 붉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메트로놈의 추처럼 그녀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놉놉놉~ 나 상투적인 아부는 싫어해~.”
“지 진짜 좋아하는데요······.”
이지연은 당황한 유진이를 위아래를 쓰윽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이설란? 마스크는 괜찮은데 연기는 어떤지 모르겠네. 연기 한번 볼까?”
생각대로 연기 테스트부터 하는 이지연 작가다.
나쁜 말로 하면 작품에 미친 거고 좋은 말로 하면 작품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고.
“예. 작가님.”
유진이가 당차게 대답하곤 이설란 역의 연기를 시작했다.
유진이가 연기에 몰두하자 이지연 작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현재 유진이가 보여주는 연기는 이지연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이설란’ 바로 그녀였으니까.
회귀 전.
유진이가 NG를 낼 때마다 이지연 작가는 ‘이설란’에 대해 해석해 줬었다.
여주인공의 친구역인 이설란은 경찰로서 당찬 성격이니 딱 부러지는 말투로 분명한 딕션을 하라고.
그때의 기억을 살려 유진이에게 조언해줬더니 상상 이상의 연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덕분에 유진이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뭐랄까?
연기에 빨려 들어간다.
그래 그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상황이 상황인데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까.
이지연 작가의 얼굴에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성공이다.
아니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 * *
유진이의 짧은 연기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유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지연 작가는 유진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제법이네. 목소리에 개성도 있고 대본도 잘 숙지한 것 같고. 흐음~.”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런데 이지연 작가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너 이름이 뭐라고?”
이지연 작가는 어지간한 스타가 아니면 배우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로 유명했다.
현장에서 만난 배우들은 그저 대본상의 캐릭터 명으로 부르면 되니까.
그런 그녀가 유진이의 이름을 묻다니.
‘꽂혔구나!’
들뜬 표정의 유진이가 이지연 작가의 질문에 답했다.
“예! 굴렁쇠 엔터의 정.유.진입니다.”
“굴렁쇠면 거기 강 대표님이 하는 회사 아냐?”
“예. 강감찬 대표님이 저희 대표님이십니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까딱한다.
끄떡도 아니고 옆으로 까딱.
“알았어~. 그리고 유진이라고? 나 유진 팍 좋아하는데.”
유진 팍이랑 정유진이랑 무슨 상관?
뭐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이름이 같으니 다행이다.
“유진~. 근데 연기는 누구한테 배웠어? 굴렁쇠에 이 정도로 캐릭터 분석을 해 주는 선생이 있었나?”
배우에 비해 굴렁쇠 엔터의 트레이너들은 생각보다 수준이 높지 않았다.
운영 이사인 이기철이 서울예술종합대학교의 출신을 낙하산으로 꽂아둔 탓이다.
김동수 실장과 최현민 트레이너도 역시나 서예종 라인이고.
이지연 작가의 질문에 말릴 새도 없이 유진이가 답했다.
“아. 이 대본 읽는 건 여기 매니저 오빠가 도와주신 거예요. 선생님.”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힐끔 들어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미간을 찌푸린 특유의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