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9화
399. <화란전> 크랭크인 1
녹음실 스피커로 소년 합창단원의 그것과도 같은 맑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서연우의 음역이 넓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정제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속성의 쇳소리가 아닌 너무도 맑은 서연우의 미성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어서 서연우가 애절한 목소리로 클라이맥스를 부를 땐.
일순간 내가 ‘김법민’이라도 된 듯 먹먹한 감정이 깃들어 자연스레 가슴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사이 이렇게 실력이 일취월장했을 줄이야.
서연우의 노래가 워낙 아름답고 애절한 까닭에 녹음실에 있는 모두 말문이 막혀 멍하게 서연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1절이 끝나고 잠시 반주의 시간.
감흥에 한껏 젖은 이동민 실장이 연신 감탄사를 터트린다.
“쟤가······ 언제 저렇게 실력이 늘었지?”
이동민 실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방선우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원래 잘했을 거예요.”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이드 녹음할 때마다 들었지만 저 정도 실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이크만 잡으면 자연스레 수축이 되어서 그랬대요. 처음부터 다들 연우는 가수 되기 힘들다고 했잖아요.”
서연우는 오랫동안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었다.
다만 그곳에선 자기 노래가 아니라 유명한 가수의 모창을 불러야 했었다.
클럽에 온 손님들이 잘 아는 곡을 불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절이 오래되다 보니 아예 자신만의 목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처음 서연우가 회사에 왔을 때도 다들 서연우의 노래를 듣고선 입을 모아 말했었다.
개성 없는 목소리라고.
솔로 가수로는 성공하기 힘들겠다고.
좋은 모창 가수니까 예능 프로에는 어울리겠다고.
그랬던 서연우가 중국에 갔다 온 이후 바뀌었다고 한다.
“분명 그랬었는데······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연우가 오자마자 자기 목소리를 찾기 시작하더라고요.”
중국에서의 일?
‘설마 가수를 시켜준다고 말한 덕분인가?’
난 인천공항에서 주영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보고 서연우에게 약속을 했었다.
반드시 가수로 만들어주겠다고.
아마도 그 이후 서연우는 진짜 가수가 되기 위해 죽도록 노력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약속 하나만을 믿고서 말이다.
‘자식.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고맙고 기특한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여간 그때부터 연우가 체리블라썸이랑 하나 누나 트레이닝 시키면서 자기 색깔을 찾았대요. 전 연우 보이스 컬러의 변화과정을 지켜보면서 곡 작업을 한 거고요.”
운이 좋게도 서연우는 가수의 목소리에 맞춰 곡을 뽑는 천재 작곡가 방선우의 전폭적인 도움까지 받고 있다.
어쩌면 이번 앨범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서연우가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 2절 시작한다. 2절도 들어보세요. 장난 아닐걸요?”
방선우가 녹음 부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엔 서연우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변했다.
마치 1인 오케스트라라도 된 듯 서연우는 팝페라 가수처럼 2절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1절과 같은 미성이었지만 이번엔 거기에 웅장함이 더해졌다.
덕분에 아름다운 고음인데도 녹음실 스피커를 터트릴 듯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서연우가 그동안 한 노력에 감탄하며 난 천천히 눈을 감고 그의 노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달칵.
화연가(花戀歌)가 반주가 끝남과 동시에 컨트롤 패널의 녹음 버튼이 자동으로 위로 올라온다.
이어서 녹음을 끝낸 서연우가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녹음 부스를 나온다.
“야. 방선우. 곡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어? 이 곡 부르려면 가수가 죽어 나겠는데?”
서연우가 투덜대면서 다가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한잔 마신다.
하지만 다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서연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이동민 실장이 넋을 잃고 있고 내가 감격에 차 있는 걸 보고도 서연우는 무슨 일인질 알아채지를 못하고 있다.
본인은 그저 가이드 보컬을 한 것뿐이라며 말이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건 여전했다.
방선우가 웃으며 서연우를 쳐다본다.
“내가 왜 그렇게 어렵게 곡을 만들었는지 몰라?”
“모르겠는데?”
방선우가 날 쳐다본다.
“형. 얘 바보죠?”
그 순간 난 서연우를 향해 벅찬 감정을 손뼉으로 표현했다.
짝짝짝.
“최고다! 우리 연우!”
“예?”
서연우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이동민 실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서연우에게 다가가 덥석 하고 껴안아 버렸다.
“연우 너. 이 자식! 이렇게 노랠 잘했으면서 왜 이제껏 숨겼냐?”
“왜 왜 이래요? 실장님.”
이동민 실장이 날 쳐다본다.
“윤호야. 아무래도 얘 바보 맞는 거 같다.”
서연우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쳐다본다.
“형. 이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왜 그러겠어? 그게 네 데뷔곡이니까 그렇지.”
그제야 서연우는 이 곡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임을 알았다.
“이게 제 곡이라고······요?”
방선우가 피식 웃는다.
“연우 너 말고 이 곡을 소화할 가수가 몇이나 있겠어? 나 처음부터 네 음역에 맞춰서 만든 거야.”
서연우가 감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형. 진짜······ 제가 이 곡 불러도 돼요?”
“당연하지. 내가 너 가수 시켜준다고 했잖아.”
서연우가 감격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고마워요······ 윤호 형.”
“고맙긴. 그동안 날 믿고 이토록 노력해줘서 내가 더 고마워.”
난 고개를 숙인 서연우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가볍게 떨리던 그의 몸이 천천히 떨림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화란전> OST의 첫 번째 가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서연우가 자기 곡이 된 <화연가(花戀歌)>를 다시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방선우가 말한다.
“곡 편곡되면 그때 또 불러. 그리고 이참에 월하여인도 불러보자.”
“그건 왜?”
“그것도 너 생각하면서 만든 거야. 너 중음도 탄탄하게 잘 내잖아.”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알았어.”
서연우는 마지못해 녹음 부스에서 한 곡을 더 부르기 시작했다.
<월하여인>.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황룡사 9층 석탑을 찾아간 음갈문왕이 밝은 달 아래서 같이 황룡사 건축 현장을 거닐던 선덕여왕을 기리며 부르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첫째 아내를 이유도 모른 채 잃어야 했던 감정이 담긴 사모곡이었기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을 담아 불러야 했다.
다만 음역대는 조금 전과 달리 두터운 중음과 저음을 오가야 하는 곡이었다.
하지만 서연우는 그마저도 쉽게 해내었다.
1인 오케스트라.
서연우를 떠오르게 하는 말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서연우는 과거 모창을 하느라 자기 목소리가 없던 때와 달리 모든 음역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짙은 감정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 * *
다음 날 팀장급 회의.
어제 있었던 한현호 체포사건과 그 뒤처리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어서 강감찬 대표가 어제 있었던 <화란전>의 OST 녹음에 관해 묻는다.
“연우가 두 곡을 받았다고?”
“예. 화연가와 월하여인을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순간 웅성이는 소란이 일었다.
팀장들 또한 서연우가 오고 난 이후 그의 노래를 들어봤었기 때문이다.
가수 1실의 박현식 팀장이 인상을 굳히고 묻는다.
“정 팀장. 서연우가 한현호를 어떻게 대신해? 아무리 정 팀장이 데려온 사람이지만······ 좀 너무한 거 아냐? 적어도 한현호급으로는 데려와야지.”
올해 45살인 박현식 팀장은 한현호와는 꽤 친했던 사이.
그래서인지 여전히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기에 가지고 온 녹음 파일을 내밀었다.
“일단 들어보고서 판단하시죠. 아직 OST는 베이스 멜로디만 있어 완성된 건 아닌데 대신에 연우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성민석 홍보팀장이 회의실에 연결된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다.
그로부터 5분간.
회의실에 모인 모두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서연우의 목소리에 취하기 시작했다.
* * *
서연우의 노래가 끝이 났다.
다들 서연우의 노래가 준 충격에 깨어 나오지 못해 회의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크흠. 자 잘하는군.”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강감찬 대표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반대하는 사람 있나?”
조금 전 투덜댔던 박현식 팀장도 넋을 잃고 들었을 정도였으니 반대가 있을 리 없다.
강감찬 대표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 연우. 데뷔 준비도 같이 시키지.”
“예. 대표님!”
한현호의 빈자리를 그렇게 서연우가 완벽히 채우게 되었다.
다만 이쯤에서 그칠 생각은 없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가수를 영입해 가수 2실의 규모도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방상영 이사와 배우 1실 가수 1실 그리고 김동수가 없는 배우 3실도 덩치를 키우기 위해 무차별적인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
더군다나 조만간 최만식 대표는 주주들의 의견이라면서 우리 사주에 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고.
그러니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 쪽도 하루라도 빨리 규모를 키워야 했다.
물론 그걸 위한 준비는 착실히 되고 있었고.
* * *
<화란전>의 크랭크인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운전해 경주 세트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축 늘어져 있던 유진이와 미소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유진이와 미소는 기지개를 펴다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왕궁 세트장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린다.
“오빠. 여긴 진짜 장난 아닌데요?”
“삼촌! 궁전! 짱 커요!”
MBS는 5년 전 <대 삼국 시대>라는 사극 때문에 대형 세트장을 지어 놓았었다.
당시 경주시의 도움을 받은 데다 MBS도 장기적인 계획으로 거대한 세트장을 지었다.
신라 시대의 왕궁인 월궁을 그대로 따라했기에 그 규모가 일반 사극 세트장의 3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 드라마는 MBS의 야심 찬 계획과는 달리 최악의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에는 돈 낭비를 했다고 불리는 세트장이지만 우린 그 덕분에 최대한 빨리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아직도 세트장 한쪽은 개조를 하느라 공사판을 방불케 했지만 말이다.
내가 <화란전>을 MBS에서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이 세트장이 큰 몫을 했다.
신라 시대 세트장에 별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을 경우 조연급 배우들을 더 고용할 수도 있고 스태프들에게도 안정적인 페이를 지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전투 신을 위해서 대규모 인력도 쓸 수 있고.
“진짜 엄청난데요?”
함께 따라온 정상봉과 이미리 대리 양소리 대리도 이런 큰 현장은 처음이라 얼이 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자. 다들 그만 놀라고 PD님께 인사드리고 기자 인터뷰 준비나 하자.”
현재 KBC에서 <정희왕후>의 오디션을 준비 중이란 소문에 MBS의 고위 임원진들이 잔뜩 긴장한 상황이다.
그래서 크랭크인 첫날부터 기자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하지만 우선은 오복희 PD에게 도착했다는 인사부터 해야 했다.
난 일행들을 이끌고 모니터링을 위한 장비를 설치 중인 제작팀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에는 제작팀원들이 모니터링 화면과 기계들을 전선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오복희 PD는 콘티 파일을 보며 고민에 빠져 있었고.
“PD님. 저희 왔습니다.”
“시간 딱 맞춰 왔네요.”
오복희 PD가 우릴 향해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곁에 있는 AD를 소개해준다.
“저기 보자······ 여기 인사들 해요. 여긴 우리 금은동 AD. 내가 없을 땐 현장을 맡기도 할 거고 B팀을 전담할 때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친해져 두세요.”
190cm 정도의 큰 키에 빼빼 마른 남자가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금은동 AD.
그는 내년에 PD가 된 뒤 MBS에서 5편의 드라마를 연속으로 성공시킨 후에 별도로 드라마 제작사를 설립하는 능력자다.
즉 김성운 PD와 오복희 PD처럼 이 사람 역시도 친해져야 하는 사람이다.
“안녕하십니까. 금 AD님.”
금은동 AD가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말수가 별로 없는 터라 유진이와 미소도 간단히 인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 오복희 PD가 날 잠시 따로 부른다.
“정 팀장님. 이야기 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만 나와 보실래요?”
“예.”
오복희 PD를 따라 천막을 나섰다.
순간 오복희 PD가 한숨을 내쉬며 세트장 한쪽을 가리킨다.
“정 팀장님. 저기 보이죠?”
출연 배우 대기 장소로 쓰이는 천막 아래 두 무리가 떨어져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이태연과 한상희를 중심으로 TK 엔터 출신들이 모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에이스 엔터 쪽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 순간 오복희 PD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가 있었다.
“벌써 기 싸움이 시작된 겁니까?”
드라마의 경우 서열과 라인에 따라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촬영 순서.
편한 시간에 와서 빨리 찍고 돌아가는 배우가 있는 반면 밤새워 촬영을 기다리고 새벽에서야 자기 촬영 분량을 마치고 가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다들 쟁쟁한 배우들이다 보니 당장 오늘부터 촬영 순서에 태클이 들어오고 있단다.
“그나마 지금은 진정해서 이 정도지 아깐 욕만 안 했지 장난 아니었어요. 유진 씨는 괜히 얽히지 말고 어느 쪽 편도 들지 마세요. 그리고 스케줄은 최대한 지켜주세요.”
주연은 어떤 경우에도 촬영이 제일 우선시 된다.
그런데 유진이가 정해진 일정을 어기게 되면 나머지 여배우들이 또다시 기 싸움을 벌일 수가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유진 씨가 주연이라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어요.”
오복희 PD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그때였다.
현장에 나타난 민규리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한 뒤 가장 좋아 보이는 의자를 골라 털썩 앉아 버렸다.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여배우가 민규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진이가 앉을 주연 대기 의자를 신인인 민규리가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폭풍 전야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