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5화
395. 한현호 2
<화란전>의 OST 앨범은 최소 12곡.
그런데 그중 단 한 곡도 못 주겠다고 말하자 한현호는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한테 곡을 못 준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예. 진심입니다.”
“어이가 없네. 대체 이유가 뭔데? 엉?”
“앨범 컨셉도 안 나왔는데 작곡가한테 찾아와서 협박하는 가수한테 어떤 작곡가가 곡을 드리겠습니까?”
실제로야 한현호가 폭행 사건을 일으켜 구속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배제하는 거였지만 그건 나만이 아는 미래.
난 한현호가 알아먹을 수 있게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한현호는 이해할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웃기고 있네. 그러면 지금부터 내 이야기 잘 들어. 만약 이번 OST에 내 이름 안 걸리잖아? 그러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각오라뇨?”
“조만간 할 재계약이 물 건너간다는 소리지. 바로 너 때문에!”
한현호와의 계약은 6개월이 남았다.
굴렁쇠에 오고 나서는 2년마다 자동 갱신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한다.
딴에는 협박이라고 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그가 굴렁쇠에서 사라져주면 굴렁쇠 엔터의 이름이 추문에 연관되진 않을 테니까.
한현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비열한 웃음을 짓는다.
“아 참. 그리고 보니 에이스 엔터에서 한번 만나자고 했는데 거기나 가봐야겠다.”
한현호는 그 말을 남기고 녹음실을 나가 버렸다.
깜짝 놀란 이동민 실장도 급히 한현호를 따라 나선다.
“야. 한현호! 거기 서! 기다려봐 인마. 에이스 엔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두 사람을 놓아둔 채 방선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우야. 괜찮아?”
“아. 예. 그냥 억지를 너무 쓰셔서 좀 당황한 것 말고는요.”
“걱정하지 마. 앨범 만드는 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니까. 그냥 넌 곡 퀄리티만 신경 써.”
방선우는 한현호가 사라진 복도를 힐끔 쳐다본다.
“근데 형. 회사에 남자 가수가 마땅히 없잖아요. 현호 형님 없으면 어떻게 해요?”
“남자 가수가 필요하면 내가 구해다 주면 되지. 너 나 못 믿어?”
가슴을 탕탕 치자 방선우가 피식 웃는다.
“제가 형을 왜 못 믿어요.”
그때 나갔던 이동민 실장이 돌아왔다.
“후우. 윤호야. 저 인간이 좀 다혈질이긴 한데 또 금방 식는 성격이야. 아마 내일쯤 되면 사과하러 올 텐데 내일은 내가 잘 말해 둘 테니까······.”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진짜로 한현호 씨에게는 곡을 안 맡길 생각이니까요.”
이동민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어? 기 꺾으려고 한 게 아니고?”
“예. 요즘 한현호 씨한테서 들리는 소문이 안 좋더라고요.”
“소문? 무슨 소문?”
난 덤덤히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일부분을 말하기 시작했다.
* * *
한현호는 186cm의 키에 배우를 해도 될 정도로 잘생긴 외모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거기다 발라드와 OST의 왕자로 불릴 정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그를 사랑한 여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약 같은 건 하지 않았기에 회사에서도 사생활까지 터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달 전부터 만나는 여자친구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
윤명희.
그녀는 엔젤 기획이라는 소규모 기획사의 배우로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남미 스타일의 미인이었다.
한현호는 그녀를 본 순간 단번에 반했고 15살의 차이도 무시한 채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당연히 윤명희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결국 거듭된 한현호의 애정 공세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 이후 윤명희는 꽤 일편단심으로 한현호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명희가 잘 대해주기 시작하자 한현호는 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바람을 피우게 된다.
윤명희는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그걸 구속이라 느낀 한현호는 그 여자친구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국 선을 넘었던 기록이 여전히 내 다이어리에 남아 있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2월 15일]
-PM 10:00 전체 회의 (회의 내용 : 한현호 폭행으로 체포. 여자친구이자 배우인 윤명희의 소속사 엔젤 기획에 배상 여부 결정.)
여자친구를 심하게 때려 체포된 한현호는 결국 구속까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윤명희가 깊은 상처를 입어 더는 배우 생활을 못 하게 되었기에 굴렁쇠 엔터는 상대 회사에 배상금을 치러야 했었다.
그리고 굴렁쇠 엔터는 구속된 한현호와의 계약을 끊어버렸고.
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이동민 실장에게 한현호가 여자친구를 때린다는 걸 말했다.
이동민 실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게 신뢰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호 형님이 여자친구한테 주먹을 휘두른다고 합니다. 상습적이라는데 아마 사고 한번 날 것 같습니다.”
이동민 실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현호. 그놈이······ 여자에게 손을 댄다고?”
“예.”
“그 그러면 당장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아마도 여자친구 쪽에서는 절대로 맞은 게 아니라고 할 겁니다. 여자친구가 현호 형님을 많이 좋아하나 보더라고요.”
한현호의 여자친구 윤명희가 당시 날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선명히 떠올랐다.
자기는 맞은 게 아니라 그냥 욕실에서 넘어진 거라고.
그러다 결국 일주일 뒤.
술에 취한 한현호는 무자비하게 골프채를 휘둘렀고 뼈가 부러진 후에야 그 믿음이 끝이 난다.
이동민 실장이 화를 거두지 못한 채 묻는다.
“골치 아프게 됐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현호라면 당장에 나나 이동민 실장을 곤궁에 빠뜨리려 할 게 뻔하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사람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실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대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불안해하는 이동민 실장을 달랜 나는 방선우의 태블릿으로 <화란전> 대본을 전송했다.
“선우야. 대본부터 읽고 앨범 컨셉에 관해 구상이라도 좀 해볼래?”
“알았어요.”
방선우가 고개를 끄덕인 뒤 컨트롤 패널 앞에 있는 책상으로 향한다.
방선우가 태블릿을 보고 <화란전> 대본에 집중하는 사이 나 역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이동민 실장 말고는 증거를 가져오기 전엔 가수 1실이나 방상영 이사가 내 말을 믿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한현호를 앨범에서 배제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들을 찾아야 했다.
* * *
30분이 지났다.
태블릿으로 <화란전>의 대본을 읽던 방선우가 갑자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듯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방선우도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앨범 컨셉뿐 아니라 악상까지 떠올랐다며 환하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일단······ 된 거 같아요. 악상도 떠올랐고요.”
“벌써?”
“예. 한 5곡 정도 나왔어요. 흐릿하지만 나머지 곡들도 대충 나온 거 같고요.”
방선우는 그 짧은 시간에 무려 5곡이나 악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머지 곡들은 대본을 더 봐야겠지만 그 역시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초반 15화만으로도 주요 캐릭터들은 다 나오기 때문이었다.
천재 방선우의 능력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면 앨범 컨셉부터 좀 이야기해줘.”
방선우가 신이 나 자신이 떠올린 컨셉을 말한다.
“앨범 컨셉은 타이틀과 같이 ‘화란전’으로 잡았어요. 꽃들의 전쟁. 화려하고 격렬하게. 그리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왕권을 둘러싼 경쟁이 드라마의 내용이니만큼 장엄하고 서사적인 느낌도 살려야겠죠.”
그 모든 요소를 동시에 다 넣는다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아무래도 여자 가수들 위주로 써야겠네?”
방선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70% 정도는요? 그래도 남자 보컬을 뺄 수는 없어요. 대하 드라마 OST에는 캐릭터 테마송이 필수잖아요. 그리고 웅장한 서사 곡에는 남자 보컬들이 좀 더 필요할 거 같고요.”
“그럼 남자 싱글곡은 몇 곡 정도 될 거 같아?”
“최소 세 곡에서 네 곡이요. 왕 테마송이랑 예언가 테마송. 그리고 국선 테마송에는 반드시 남자 가수가 들어가야 할 거 같아요. 아 김법민의 테마송에도요.”
김법민은 극 중 유화 공주를 연모하는 김춘추의 아들 역의 주연급 조연이었다.
“그러면 어떤 보컬이 필요한데?”
“음. 한 곡은 종훈 형에게 부탁드리면 될 것 같은데 나머지는 무거운 중저음 대의 목소리를 가진 분이 필요해요. 그리고 한 명은 하이톤의 가수요.”
순간 몇몇 가수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최소 두 명의 남자 가수. 알았어. 어떻게든 데려올게.”
한동안 발라드와 댄스만 만들던 방선우는 오래간만에 다양한 곡을 만들어 볼 기회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그때였다.
이동민 실장의 폰으로 전화가 울린다.
누구인지 확인을 하자 방상영 이사의 전화였다.
“방 이사님이 전화를 해왔네.”
생각한 대로 한현호가 소란을 일으킨 모양이다.
“현호 형님 때문이죠?”
“그래. 그사이에 달려가서 일렀나 보네.”
전화를 받자 역시나 생각이 맞았다.
-이 실장. 당장 회의실로 올라와. 정 팀장이랑 같이.
“예. 이사님.”
전화를 끊은 이동민 실장이 날 쳐다본다.
“윤호야. 나 혼자 올라갈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고. 작업이나 해.”
“아닙니다. 같이 올라가시죠.”
이동민 실장이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뒤로 미룰 필요는 없었다.
이미 한현호를 앨범에서 배제할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 *
굴렁회 엔터 회의실.
강감찬 대표가 자리를 비운 터라 강지영 본부장과 방상영 이사 가수 1실 한소유 실장 그리고 한현호의 담당인 이영섭 팀장만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간판 가수 입에서 에이스 엔터로 이적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데 대한 질책이 나온다.
특히 한현호의 담당인 이영섭 팀장은 굉장히 서운한 기색으로 외친다.
“이 실장님. OST 싱글도 아니고 앨범이라면서요?”
이동민 실장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서 어쩌자고?”
“세 곡이 무리라면 두 곡만이라도 넣어주십시오. 그러면 현호 형은 제가 잘 달래 보겠습니다.”
“그게 내 맘대로 돼?”
이동민 실장이 딱 부러진 대답으로 거부하자 이영섭 팀장은 이번에 날 쳐다본다.
“정 팀장. 너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 현호 형이 자기한테 곡을 안 주면 내일 당장이라도 에이스 엔터로 넘어간다는데 어쩔 거야? 응?”
그때 방상영 이사가 중재에 나섰다.
“문제를 해결하라고 부른 거지 싸우자고 부른 게 아닙니다.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봅시다. 이영섭 팀장은 자중 좀 하고.”
“하아~ 예. 이사님.”
이영섭 팀장을 진정시킨 방상영 이사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 한 곡은 싱글. 그리고 다른 한 곡은 피처링으로 어때? 이 정도로면 나쁘지 않잖아.”
방상영 이사는 조민성을 뺏긴 이후 날 대하는 태도가 한층 신중해졌다.
정면충돌했다가 박살이 난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꽤 합리적인 제안을 했지만 난 그 역시도 선을 그었다.
“죄송합니다. 방 이사님.”
방상영 이사의 눈썹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왜? 내가 부탁하는 거라서?”
“아닙니다. 그 부탁 이전에······ 다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게 뭔 소리야?”
40을 넘어간 왕년의 탑 가수.
현시점에서 가장 핫한 작곡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이걸 모르다니.
어이가 없었다.
난 여전히 화가 난 이영섭 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 이해가 안 가시는가 본데······ 이 팀장님한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뭘?”
“가수와 작곡가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실 겁니까?”
“당연히······.”
이영섭 팀장이 말을 하다 멈춘다.
지금 말한 건.
1년에 한두 번 괜찮은 성적의 곡을 부르는 가수 한현호와 연일 초대박 곡을 생산해내는 작곡가 방선우 중 누굴 골라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이었으니까.
한현호가 아무리 대단한 가수라고 한들 방선우가 올해 벌어들인 저작권 수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더군다나 대부분 작곡가와 달리 방선우는 회사의 소속.
이건 방선우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 20%는 굴렁쇠의 몫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현호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방선우를 몰아붙였다.
가수가 초대박 작곡가를 몰아붙인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오히려 어떻게든 작곡가에게 곡을 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매니저 선에서 거르지 않고 이렇게 회의를 열었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난 말문이 막힌 이영섭 팀장을 더욱 몰아세웠다.
“한현호 씨가 한때 백만 장을 판 가수인 것. 인정합니다. 회사에 공을 세운 것도 맞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한국 최고의 작곡가인 방선우한테 뭐라고 해도 된다는 건 아닐 텐데요?”
“그 그건······.”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오 PD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막말로 선우가 곡이 안 나온다고 뻗대면 그 이후의 사태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 아니······.”
이영섭 팀장만은 한현호가 아무리 개같이 굴어도 어르고 달랬어야 했다.
그리고 내게 아니 방선우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협조’를 구해야 했던 거였고.
한 곡만 부탁한다고.
그런데 이영섭 팀장은 실장과 본부장 그리고 이사에게까지 이 사실을 알려 문제를 키워버렸다.
덕분에 내 발언은 그 어떤 때보다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현호와 방선우.
누구를 택해야 할지는 초짜 매니저도 알 정도로 분명해졌다.
순간 이영섭 팀장이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 미안하게 됐다. 정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