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394. 한현호 1
커다란 주황색 에르메스 포장 박스를 보자 한우주 작가는 멍하니 넋을 잃었다.
이지연 작가도 이 정도는 생각하지를 못했는지 멈칫한다.
조금 전 온 선물은 굴비 송이버섯 한우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유강석 대표는 씀씀이의 차원이 달랐다.
나 역시 종종 쓰던 수였는데 이렇게 과한 선물은 생각보다 제법 효과가 좋았다.
이런 비싼 선물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눈치를 보면서도 받는 경우인데 그때 상대는 무조건 100% 내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딱 잘라 거절하는 경우였다.
거절하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긴 한데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당신을 이 정도 선물을 줄 만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만 전해진다면 이후에는 쉽게 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한우주 작가는 그 둘 다 해당하지 않았다.
한우주 작가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걸 본 순간 유강석 대표는 이때다 하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저희 규리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큰 실수를 했지만 얘가 실력 하나만은 진짜배깁니다. 그리고 이건 그저 밉게만 보지 말아 달라고 사과의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일절 없습니다.”
한우주 작가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날 애타게 쳐다본다.
난 그 즉시 유강석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유 대표님. 우리 작가님이 부담스러워하시니 넣어 두시죠.”
“하하하. 그 그런가요?”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내 모습이 조금은 의외란 표정이다.
“그리고 작가님도 사과를 받으셨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바로······요?”
사과한 뒤 민규리에 대한 PR이라도 더 해볼 생각이었나 본데 어림도 없다.
어디서 영향력을 뻗치려고.
내가 쓰던 수인 만큼 대처 방법도 뻔히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여유를 줘서는 안 되었기에 난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가리켰다.
“저희가 배달시킨 생선회가 곧 올 거라서요.”
먹지도 못하는 값비싼 가죽 가방 따윈 필요 없다.
지금 내게는 곁에서 배를 부여잡고 꼬르륵 소리를 내는 미소에게 먹일 회 한 점이 간절히 필요할 뿐이었으니까.
에르메스 가방이 매운탕을 포함한 VIP 생선회 세트에 밀리는 순간이었다.
유강석 대표가 당황해 말한다.
“그 그러면 식사비라도 제가 내게 해 주십시오.”
“‘배달의 겨레’로 결제한 거라 이미 지불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다음엔 제가 제대로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유강석 대표가 에르메스 박스를 쇼핑백에 다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규리의 실수를 사과한 걸 빼고는 아무것도 못 이룬 터라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이어서 유진이에게도 사과를 한 두 사람은 내 배웅을 받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유강석 대표가 갑자기 날 붙잡는다.
“정 팀장님. 잠시만 밖에서 이야기할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너무도 간곡한 표정으로 부탁하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생선회 오기 직전까지만입니다.”
* * *
엘리베이터 앞.
민규리는 조심할 사람이 사라지자 벌써 입술을 삐죽대고 있다.
매니저인 내가 돌아가서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고 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모르겠다.
그 모습에 실망한 유강석 대표가 한숨을 푹 내쉰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강석 대표가 민규리에게 선물 가방과 키를 내민다.
“규리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에 먼저 타고 있을래?”
“저 혼자 내려가라고요?”
“네가 세 살짜리 애도 아닌데 엘리베이터도 혼자 못 타?”
유강석 대표가 조금 참을성을 잃었는지 언성이 높아진다.
“아녜요. 내려갈게요.”
민규리는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고서는 홀로 내려갔다.
유강석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면목이 없습니다. 정 팀장님.”
“죄송은요. 연예인들 저러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요.”
유강석 대표가 머쓱한 표정을 짓다가 말한다.
“그런데 우리 정 팀장님은 작가님들이랑 정말 친하시네요?”
“뭐 두루두루 도움을 주고받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전 매니저 출신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현장 PD님이랑 작가님들은 아직도 대하기 힘들더라고요.”
“아닙니다. 알아도 여전히 대하기 힘드신 분들입니다. 그 맘 저도 잘 압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유강석 대표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본론을 말한다.
“실은 회사가 너무 급성장했는데 중간을 채워줄 사람이 없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중간이라면 임원직 말씀이십니까?”
“예. 회사를 인수하면서 그쪽 대표들을 임원으로 앉혔더니 다들 자기 밥그릇만 챙기기 바쁘더라고요.”
유강석 대표는 엔터 회사의 사업 기획부서 출신.
이 업계를 잘 알긴 해도 매니저 경험이 없다 보니 회사 차원에서 배우들 관리가 안 된다는 걸 토로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정 팀장님. 혹시 TNT 엔터의 부대표 자리에 관심 없으십니까?”
스카우트 제안일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번에 NO. 2의 자리라니.
직설적이고 대담한 제안에 감탄이 나온다.
유강석 대표는 날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 이 업계의 비즈니스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드를 잘 아는 매니저 출신의 파트너가 없어 한계가 있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파트너를 찾았는데 정 팀장님이 딱 입니다. 정 팀장님만 와 준다면 단기간에 업계 1위도 자신 있습니다.”
“전 고작 2년 차 팀장인데요?”
“그게 중요하죠. 2년 차 팀장! 나이를 떠나 사람은 능력에 맞는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는 게 제가 가진 생각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도 업계 선배들이 보기에는 새파랗게 젊은 놈 아닙니까?”
유강석 대표가 패기 넘치게 말했지만 난 그럴 생각 따윈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키우고 싶은 배우들과 함께하고 싶은 거였으니까.
“좋은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전 굴렁쇠 엔터에서의 제 위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유강석 대표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곧바로 다음 제안을 꺼냈다.
“그 그러면 부대표로 딱 2년. 2년만 절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TNT가 업계 1위에 오르면 공동 대표가 됩시다. 어떻습니까?”
회귀 전 잠깐이나마 왜 업계 1위를 했었는지 알 것 같다.
유강석 대표의 이런 강력한 추진력과 대범한 제안 때문이었다.
물론 망한 이유도 1위를 한 이유와 같았다.
너무 씀씀이가 큰 터라 수입이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배달의 겨레’ 배달원이 내렸다.
난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물었다.
“1501호죠?”
“아 예.”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배달원이 내가 가리킨 곳으로 가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 제안도 거절하겠습니다.”
“하아~ 그렇······습니까?”
“예. 전 굴렁쇠가 좋아서요. 대신 절 좋게 봐주셨으니 조언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민규리. 너무 오냐오냐 키우지 마십시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머리 꼭대기에 올라타고도 남을 타입입니다.”
어차피 회사가 망할지도 모르니까 내실을 다지라는 조언은 듣지도 않을 터.
그럴 바에야 민규리나 잘 챙기라고 하는 게 백번 나은 조언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대답을 마친 유강석 대표는 뭔가 생각에 잠긴 채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향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난 곧장 1501호를 향해 달렸다.
얇게 저민 돌돔 회와 보글보글 끓고 있을 얼큰한 뼈 매운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 * *
유진이와 미소를 집에다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왔다.
<화란전> OST 앨범 제작 제안을 받았기에 후속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에 오자마자 이동민 실장이 있는 가수 2실로 향했다.
링링을 위한 글로벌 아이돌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이동민 실장이 날 환히 반긴다.
“소식 들었다. 화란전 OST 앨범 따냈다며?”
“예. 그렇게 됐습니다.”
계약 때문에 강지영 본부장에게 직접 OST 수주 건을 보고했고 회사에선 소문이 다 났단다.
“짠돌이 같은 방송국 놈들한테 20%나 뜯어내고. 하여간 용하다 우리 윤호.”
이동민 실장의 뒤에서도 2실의 선배들이 축하를 보내온다.
“정 팀장. 잘했어!”
“수고했어. 윤호 아니면 누가 그렇게 할까 싶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자 이동민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우 걔 성격이라면 벌써 작곡 시작했겠지?”
“아뇨. 대본부터 보고 곡 작업하라고 했으니까 아직은 아닐 거예요.”
“그래? 그럼 빨리 가보자.”
난 이동민 실장과 함께 곧장 지하 녹음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도중 이동민 실장이 묻는다.
“근데 앨범을 통으로 받아냈으면 최소 12곡이잖아. 노래 부를 가수들은 어쩌려고?”
“일단 혼불은 빼고 강하나한테 1곡 체리블라썸한테 2곡 세리에게 2곡을 주려고요.”
“그럼 나머지는?”
“가수 1실의 트레비앙의 리더 오지아 그리고 강지윤 씨도 후보고. 나머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죠. 뭐.”
트레비앙은 한소유 실장이 키우고 있는 힙합 아이돌이었고 강지윤은 1실에 소속된 경력 12년 차의 여자 가수였다.
순간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한현호는? 설마 OST의 왕자를 빼려고?”
42살의 한현호는 올해 20년 차의 중견 가수로 과거에는 발라드의 왕자라고까지 불리던 인기 가수다.
한때 음반 100만 장을 팔아치우던 가수로 팬덤도 꽤 남아 있고 맑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도 여전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영화와 드라마의 OST를 자주 불러 OST의 왕자로도 불리고 있었다.
게다가 두 달 전에는 영화 <동천>의 OST 차트 1위 전체 음원 차트 2위를 한 기록도 있었고.
하지만 난 그를 쓸 마음이 없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후.
여자친구 폭행 사건으로 구속되는 상종 못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지하 2층에 도착했다.
띠잉.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지하 녹음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때였다.
-야. 방선우. 내가 부르면 OST 대박 나는 거 알지? 제대로 뽑힌 곡으로 세 곡만 줘. 내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방선우와 앨범을 만들 들뜬 기대를 하고 내려왔건만 날 맞이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어? 이게 뭐야?”
“실장님. 이거 현호 형님 목소리인데요?”
“그러게?”
한현호가 앨범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 녹음실까지 내려와 곡을 내놓으라며 방선우를 겁박하고 있었다.
‘이 인간이······.’
난 이동민 실장과 함께 곧장 4번 녹음실로 달려갔다.
* * *
굴렁쇠 엔터 4번 녹음실.
문을 열자 올해 42살인 발라드의 왕자 한현호가 소파에 앉아 방선우를 겁박하고 있었다.
186cm의 큰 키에 꽃미남인 그는 다정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꽤 폭력적인 인간이었다.
한현호가 거칠게 몰아세우자 방선우는 마치 선생님께 혼나는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작곡가를 혼내는 가수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난 녹음실에 들어가자마자 외쳤다.
“선우야! 뭐 해?”
방선우가 고개를 들어서 날 쳐다본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안도가 깃든다.
“형······.”
난 고개를 끄덕인 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방선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부터는 저랑 이야기하시죠 현호 형님.”
한현호가 비키라며 손짓을 한다.
“어이~ 정 팀장. 그런데 매니저는 좀 빠지지? 지금 가수와 작곡가가 이야기하는 거 안 보여?”
“그 작곡가의 매니저가 저입니다. 그러니 저랑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한현호가 가소로운 듯 코웃음을 쳤다.
“이제 하다 하다 작곡가도 매니저를 두나?”
“처음 선우를 데려올 때 제가 책임지기로 하고 데려왔으니까요.”
한현호는 소파 등받이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너 요즘 잘나간다더니 위아래도 모르나 보네.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압니다. 우리 회사에서 OST의 왕자를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걸 알면서 날 막아? 이 자식 이거 간땡이가 부었네.”
“말 함부로 하지 마시죠 형님.”
한현호가 날 노려보며 묻는다.
“야. 한 가지만 묻자. 막말로 OST 12곡 중 세 곡 달라는 게 무리한 요구야?”
“아직 어떤 곡들로 앨범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곡부터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일단 곡이 나오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는 게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곡이 뭐든 간에 내가 소화 못 할 곡이 있어? 그리고 내가 부르면 니들한테도 도움 될 거잖아. 안 그래?”
한현호는 자신이 도움을 주는 거라며 적반하장으로 외쳤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드라마가 화제가 될 것 같으니까 침 바르려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회사로 오는 동안.
MBS는 민규리가 도망쳤던 부분만을 잘라내 배우들이 펼친 대본 리딩 영상을 너튜브에 업로드했다.
그로 인해 현재 실시간 검색어 순위 2위가 바로 <화란전>이었다.
방송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정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드물었기에 한현호는 <화란전>이 성공할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 모양이다.
화제의 드라마에 OST를 부르게 되면 음원 차트 순위 1위도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현호와 내 다툼이 격해지자 이동민 실장이 끼어들며 언성을 높였다.
“현호야. 그쯤 해라. 작곡가한테 와서 이렇게 강짜를 부리는 건 경우가 아니잖냐?”
이동민 실장은 한현호보다 3살이 많다.
같은 음악인 출신인 데다가 한때는 한현호의 프로듀서이기도 했었고.
다만 한현호가 경력도 대단하고 굴렁쇠 엔터 설립 초창기부터 함께 한 식구다 보니 이동민 실장도 그를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형 말이 좀 심한 거 아냐? 강짜라니? 지금 회사에 이런 대형 프로젝트의 주제곡을 부를 사람이 또 누가 있냐고!”
“아무리 그래도 작곡가한테 이러는 건 아니지.”
한현호가 이동민 실장을 노려본다.
“형. 설마 다른 회사 가수에게 곡을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그래서 지금 핑계 대는 거야?”
이동민 실장이 주춤한다.
“그게······.”
“어? 이 형 진짜 수상하네?”
“아니······ 그러니까 아직 아무것도 안 정해졌다니까? 앨범 컨셉도 안 나왔는데 왜 이리 서둘러?”
“장난해? 쉬운 이야기를 복잡하게 하니까 그러지! 간단하잖아? 나한테 곡 줄 거야? 말 거야?”
난 언성을 높이는 한현호를 상대로 딱 잘라 말했다.
“다른 가수를 쓰든 말든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뭐?”
“그리고 죄송하지만 이번 앨범에 현호 형님 자리는 없습니다.”
앨범의 자리?
당신의 자리는 감옥이야 한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