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393. 로비
<화란전>은 사극으로써는 이례적으로 아시아를 넘어 중동 아프리카까지 뻗어 나가며 대성공을 거두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의 OST 앨범을 우리 회사가 혼자 다 먹는다면 자연스레 내가 선택한 가수들의 해외 진출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 이외에도.
정 팀의 너튜브에 OST 앨범을 싣고 국가별 자막을 세세히 달아둔다면 조회수를 통한 막대한 광고 수익을 올릴 수가 있었다.
오복희 PD가 재차 묻는다.
“진짜 곡 비가 필요 없어요?”
“예. 대신에 OST 앨범 전곡을 너튜브에 올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복희 PD가 웃음을 짓는다.
“뭔가 생각이 있으신가 보네요?”
“저 아시잖습니까?”
“하긴 정 팀장님이 어떤 사람인데······ 알았어요. 곡 비도 안 받는데 그 정도야 상관없죠. 그런데 그것보다 시간이 촉박한데 12곡이나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무조건 됩니다.”
방선우라면 하루에 한 곡씩이라도 뽑아낼 수 있다.
오복희 PD가 소파 옆자리에 앉은 류한준 CP를 쳐다본다.
“CP님. 어떻게 해요? 고? 아니면 스탑?”
“어차피 너나 나나 윗선에 찍혔잖냐. 두 번 찍힌다고 별것 있어? 당연히 고지.”
“알았어요.”
오복희 PD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알았어요. 그럼 굴렁쇠가 맡아서 앨범 제작해주세요.”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 최고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믿을게요. 그리고 곡 비는 말씀하신 대로 없는 대신에 앨범 판매 순익의 20%를 드릴게요. 어때요? 이 정도면 만족하세요?”
“예? 20%를······ 주신다고요?”
방송국이 자체 제작하는 드라마의 경우 OST 앨범 수익 배분을 받기 힘들다.
하지만 오복희 PD는 <화란전>의 PD로 자기를 뽑아 준 보답을 이렇게 해 주고 있었다.
오복희 PD가 씩 하고 웃으며 말한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MBS한테 제대로 뽑아먹을 생각 하시라고요.”
까칠한 오복희 PD에게서 특별 대우를 받다니.
회귀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상황이다.
“최고의 가수를 모아서 앨범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체리블라썸과 강하나만 동원하더라도 이슈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추가로 가수를 영입해야 할 것 같았다.
앨범에 싣는 것만으로도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OST만으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오복희 PD가 또 하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KBC에서 우릴 상대로 대하사극 기획 중인 거 아세요?”
“아뇨. 처음 듣는데요?”
“정희왕후라고. 내년 1월부터 50부작으로 방송한다네요. 목표는 우리고요.”
순간 제대로 들은 건가 싶었다.
‘이게 왜 지금 제작되지?’
회귀 전 <화란전>이 내년 상반기의 최고 시청률을 달성한 사극이라면 하반기는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의 아내이자 당대를 쥐고 흔든 한 여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정희왕후>의 몫이었다.
<정희왕후>의 최고 시청률은 23%로 <화란전>보다 떨어졌지만 KBC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 드라마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정희왕후>의 도예수 CP는 사극만 30년을 해온 한국 최고의 CP.
그의 손을 탄 작품은 전부 명품 사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쯤 그 <정희왕후>는 시나리오를 가다듬고 있을 시기인데 무려 6개월이나 앞당겨 촬영을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편성이 1월이라면 너무 빡빡하지 않을까요? 오디션도 아직 안 치렀잖습니까?”
“주연 오디션은 오늘 기획사에다 쫙 다 통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어차피 KBC 조선 시대 사극들은 경험 있는 베테랑들이 많으니까 주연만 뽑으면 바로 시작 가능할걸요? 세트장은 지난번 드라마 때 사용한 곳을 그대로 쓰면 되고요.”
진짜로 진행할 모양이다.
“그러면 연출은 누가 맡기로 했답니까?”
“이선창 PD가 연출한다네요. 작가는 가예은이고요.”
두 사람 모두 다 회귀 전에도 <정희왕후>를 맡은 제작진이다.
즉 핵심 제작진에서 변수가 없다는 뜻.
이대로 가면 회귀 전처럼 명품 사극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쪽도 능력자들이 붙었으니 만만치 않겠네요.”
오복희 PD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형 작품들이 서로 부딪히면 시청률을 깎아 먹을 게 뻔한데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 왜 우리를 저격했답니까? 적당히 피했으면 시청률 나눠 먹을 일은 없었을 텐데.”
“박 대표 연임 문제 때문에 일정을 바꿨대요.”
KBC 박찬식 대표는 내년 초에 임기가 끝난다.
그러다 보니 올해 말부터 내년 1월까지의 실적이 가장 중요했다.
방송국 수익 중 가장 큰돈을 벌어다 주는 건 예능과 드라마 뒤에 붙는 광고.
높은 시청률이 나와야지 광고비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올해는 내가 유진이와 함께 MBS와 SBC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바람에 KBC가 죽을 쒀버렸다.
그래서 박찬식 대표는 <정희왕후>를 앞당겨 자기 연임을 위한 실적에 반영하려고 하고 있었다.
운명을 바꾼 대가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흰 저희 나름대로 홍보에 신경 쓸 테니까 정 팀장님네도 홍보에 신경 좀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OST 앨범을 내는 것 역시도 홍보를 위해 계획한 거란다.
<정희왕후>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더욱 OST 앨범에 공을 들여야 했다.
하나라도 차별성과 화제성이 있어야 <화란전>이 더욱 빛날 테니까.
그렇게 우린 몇 가지 의견을 더 의논한 뒤 PD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한우주 작가와 함께 새로 구한 작업실로 향했다.
* * *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최고급 레지던스 오피스텔.
이곳은 컨시어지 서비스가 있어 식사와 청소도 호텔처럼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띠리릭.
1501호의 문을 열었다.
50평이 넘는 작업실은 통유리 창을 통해 압구정 거리가 한눈에 보인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온갖 기기들이 빌트인으로 들어간 최신식 쓰리룸이다.
이어서 오피스텔을 둘러본 미소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우와~ 여기 짱 좋아요!”
유진이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오피스텔을 훑어본다.
집이나 물건에 대해 욕심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좋은 걸 몰라보는 건 아니었다.
한우주 작가는 새로 구한 작가실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미안해한다.
“첫 작업실치고는 너무 화려한 것 같아요. 팀장님.”
“아닙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아름드리나무 아래서>의 수익으로만 17억이 들어온 데다 늘 집에서만 사는 작가이기에 최대한 좋은 곳을 골랐다.
그때였다.
[발신자 : 이지연 작가]
“이 작가님이랑 김 작가님 오셨네요.”
“일찍 오셨네요.”
이지연 작가와 김솔잎 작가도 집들이 겸을 대신해 오기로 되어 있었다.
통화를 마친 난 인터폰으로 1층 열림을 눌렀다.
잠시 후.
집으로 들어온 이지연 작가가 선물을 건네며 감탄사를 터트린다.
“한 작가. 복 터졌네. 나 처음 작업실 구했을 땐 5평짜리 고시원 같은 원룸이었는데······.”
이어 들어온 김솔잎 작가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입을 쩍하고 벌린다.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김솔잎 작가의 축하 선물도 받아든 다음 거실로 향했다.
이지연 작가가 앉자마자 오늘 있었던 일을 묻는다.
“한 작가. 오늘 첫 대본 리딩은 어땠어?”
“재미있던데요?”
“S급들이 많은데 누가 대본 분량을 늘려달라고 협박은 안 했고?”
“아뇨. 그런 일은 없었는데······ 리딩 도중에 배우가 도망쳤어요.”
이지연 작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그게 뭔 소리야?”
“민규리가 오 PD님한테 질책을 받으니까 바로 뛰쳐나가더라고요.”
이지연 작가가 피식하며 웃는다.
“풉. 걔 골 때리네? 근데 오 PD가 가만히 있었어? 절대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안 그래도 오 PD님이 따로 불러서 따끔하게 혼냈어요.”
이지연 작가도 그런 골 때리는 배우들이 가끔 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도망만 갔으니 다행이네. 나 때는 분량 때문에 집까지 찾아와서 협박한 인간들도 있었는데 뭐.”
더한 막장을 만날 수도 있지만 잘 어르고 달래면서 가는 게 드라마라며 이지연 작가는 자기 이야기를 해줬다.
그때였다.
이지연 작가가 인터폰을 쳐다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시작될 때가 되었는데······.”
“예? 뭐가요?”
이지연 작가의 말이 마치자마자 벨 소리가 울린다.
띵동~
이지연 작가가 씨익 웃는다.
“왔네.”
올 게 왔다.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한우주 작가의 작업실 집들이도 있지만 이제부터 일어날 일 때문이다.
작가에게 이뤄지는 로비.
그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이지연 작가를 쳐다본다.
이지연 작가가 빙긋이 웃는다.
“몰라? 원래 작품 들어갈 때 되면 로비도 들어오잖아.”
나 역시 하던 일이다.
리딩 현장에서 내 배우가 밀렸거나 분량이 빠질 것 같다 싶으면 바로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작가 사무실로 달려갔다.
분량을 확보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순간 한우주 작가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어 어떻게 해요?”
“작가님 선택에 따라 달렸습니다.”
“안 받아야 하는 거 아녜요?”
그때 이지연 작가가 웃으며 대답한다.
“그거야 한 작가 마음이지. 대부분은 솔직히 다 받아.”
“예?”
“몰랐어? 작가들 이런 거로 부수입 짭짤하게 올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작가님이······ 왜 이러시지?’
이지연 작가는 어떤 누구에게도 로비를 받지 않는다.
로비를 받는 순간 어떻게든 배역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저렇게 말한다는 건 뭔가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기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우주 작가가 이지연 작가의 눈치를 살핀다.
“받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되고 안 해도 되고. 막말로 작가가 갑인데 누가 따지기라도 할 것 같아? 어림도 없지.”
곤란해진 한우주 작가가 김솔잎 작가를 쳐다본다.
“저 쳐다보지 마요. 저 입봉 때는 저런 거 들고 온 사람도 없었으니까.”
김솔잎 작가는 보조 작가 시절에 이지연 작가를 대신해 이런 로비는 직접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되어도 로비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어떻게 할래? 한 작가.”
이지연 작가의 질문에 한우주 작가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안 받을래요. 전 받으면 미안해서······ 분명 대본에 영향이 미칠 거예요.”
그때였다.
이지연 작가가 환하게 웃는다.
마치 그 대답이 정답이라는 듯 말이다.
“맞아. 돈 앞에 장사 없어. 일단 받고 모른 척하겠다? 내가 그러다 망가진 작품을 한두 번 봤겠어?”
로비를 받으면 작품이 흔들린다.
이지연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비싸고 좋은 선물? 자기 돈으로 사면 돼. 우린 돈 많이 버는 작가들이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런 데 흔들리지 마. 그거면 내가 알려줄 건 끝이야.”
한우주 작가가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작가님······.”
이지연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무 감격해 하지 마.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리고 거절은 내가 하는 게 낫겠지? 나도 공동 저자니까.”
이지연 작가는 자신이 직접 궂은일을 하겠다며 나섰다.
인터폰을 들자 매니저도 아닌 퀵 기사가 서 있었다.
이어서 이지연 작가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기사님~ 퀵 보낸 사람한테 전화해서 한 번만 더 보내면 배역 뺀다고 해 주세요. 네. 그렇게만 전하시면 알 거예요. 이지연이 말했다고 하면 돼요. 말을 못 알아 처먹거나 퀵비를 안 주거나 하면 다시 인터폰 누르시고요.”
이후 몇몇 매니저들은 직접 선물을 들고 왔지만 입구에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우린 첫 대본 리딩을 마친 한우주 작가를 축하하기 위해 생선회 VVIP 세트를 주문했다.
10분이 지났을 무렵.
띵동~
인터폰이 울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달 기사인 줄 알았는데 인터폰 화면에서는 TNT 대표 유강석과 민규리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장삼덕 실장만 되어도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가 직접 찾아온 마당에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
* * *
띠리릭.
작업실 현관문이 열리자 유강석 대표가 검은색 쇼핑백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민규리가 표정을 굳힌 채로 들어왔다.
유강석 대표는 이지연 작가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거실에 서서 말이다.
“이 작가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그래 유 대표. 오늘 사고 쳤다며?”
유강석이 아차 하고 오늘 일을 재차 사과하려 한다.
그러나 이지연 작가가 한발 빨리 민규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로구나. 리딩 현장에서 욕하고 도망갔다던 애가.”
아무리 제멋대로인 민규리라지만 이지연 작가의 카리스마 앞에선 살짝 겁을 먹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큰 실수를 했어요~”
민규리가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사과는 나한테 말고 우리 메인 작가한테 해야지. 아까 제대로 사과도 안 했다며?”
민규리가 그제야 한우주 작가를 향해 인사한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아까 PD님 앞에서는 너무 겁먹어서 깜빡했어요. 앞으론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거짓말이다.
분명 기분이 상해서 모른 척 고개를 숙였을 거다.
한우주 작가는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시간을 가지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대신 두 번은 없어요. 알겠죠?”
“네······.”
유강석 대표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바꾼다.
“작가님. 그래도 우리 규리가 용기를 내서 따로 사과하러 온 거니까 이쁘게 좀 봐주십시오.”
이쯤 하면 됐다 싶어 내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들 하시죠?”
이지연 작가가 못 이기는 척 어깨를 으쓱였고 나는 유강석 대표와 민규리에게 방석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 주방에서 병 밀크티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그때 이지연 작가는 유강석 대표가 가져온 쇼핑백을 쳐다본다.
“유 대표. 혹시 배역 잘릴까 봐서 한 작가한테 뇌물이라도 먹여보려고 온 거야?”
“뇌물이라기보다는 성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하하하. 이거를 참······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 없으면 꺼내지 마. 그냥.”
그런데 그때였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저 유강석입니다.”
유강석 대표는 쇼핑백에서 박스를 꺼냈다.
그런데 검은 쇼핑 백에서 나온 건 에르메스 로고가 찍힌 주황색 박스.
얼핏 봐도 가방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다면 최소 천만 원 이상의 물품이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회귀 전의 나처럼 유강석 대표는 다른 매니저들과 차원이 다른 로비를 해대고 있었다.
‘제법인데? 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