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390. <화란전> 대본 리딩 1
MBS의 드라마 <화란전>.
시대 배경은 실제 역사와 다르게 선덕 여왕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가상의 신라 시대.
선덕 여왕의 남편 음갈문왕(飮葛文王)이 새롭게 신라의 왕이 된 이후 세 명의 부인을 들인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각각의 세 왕후는 정화 유화 도화라는 이름의 공주들을 낳게 된다.
왕후와 공주 6인의 여성들이 벌이는 차기 왕권을 건 암투와 전쟁.
그래서 ‘꽃들의 전쟁’이란 의미로 <화란전>이란 제목이 되었다.
오복희 PD는 그 드라마의 주요 배역인 공주를 비롯해 왕후 그리고 왕과 왕의 예언가 등에 S급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1 왕후 역에는 TK 엔터의 S급 여배우 이태연.
양이지의 엄마 이태연은 40대 여배우 중에서도 손에 꼽는 연기력과 인지도를 가진 배우다.
그래서 그동안 조연이 아닌 주연만 고집해 왔었는데 이번엔 조연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3 왕후 역은 에이스 엔터의 32살 S급 여배우 윤주연이 캐스팅되었다.
윤주연은 최근 스릴러 영화 <해안도로>에서 500만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연기파 배우다.
더군다나 왕의 예언가 ‘무무’ 역할에도 블레스 엔터 S급 배우 이수한이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내 덕분에 말이다.
“제 덕에 그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뇨? 대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폰 스피커 너머로 오복희 PD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전~부 박수무당 정 스타 픽은 무조건 하겠다며 알아서들 출연료도 깎고 들어왔어요.
심지어 TK 엔터 김태권 대표는 현장까지 직접 와서 TK 엔터 배우 명단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출연료를 대폭 삭감해도 상관없다며 말이다.
내 픽을 따라 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러면 정화 공주와 도화 공주역은 누굽니까?”
-정화 공주에는 TK 엔터 한상희. 그리고 도화 공주에는 TNT 엔터 출신의 민규리가 발탁됐어요.
한상희는 소주 브랜드 ‘진짜 이슬’ 광고의 메인 모델이다.
최근 연기력에서도 A급이란 평가를 받으며 연기자와 모델을 병행하는 28살의 핫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내가 놀란 건 도화 공주역의 배우였다.
올해 24살인 민규리.
그녀는 회귀 전 내가 쓰러지던 날 황룡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여배우였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민규리요?”
-혹시 정 팀장님이 아는 배우예요?
“아 아닙니다. 잠시······ 헷갈렸습니다.”
-으흠~ 그래요? 하여간 민규리 걔. 신인인데 어찌나 귀엽고 연기도 잘하던지 홀딱 반할 정도였어요. 정 팀장님도 보시면 마음에 들걸요?
그럴 리가.
내 죽음의 이유 중 절반은 민규리가 안긴 스트레스 때문이었는데.
스폰을 비롯해 그녀가 벌였던 수많은 일을 뒤처리하느라 내 수명이 몇 년은 줄 정도였었고.
하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민규리는 내년 6월에 방영하는 주말드라마 <아침 바닷소리>에 레슨 한 번 받아 본 적 없이 2천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연이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니저들은 민규리를 향해 ‘악마의 재능’이라 불렀다.
그런 민규리가 우리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게 된다는 소식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했다.
다만 현재의 민규리는 스폰서와 손을 잡지 않은 신인 여배우.
그녀를 판단하는 건 만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어쨌든 배우들의 성격을 제외하고 구성원들의 실력만 본다면 <화란전>은 최고의 캐스팅이 이루어졌다.
오복희 PD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한다.
-덕분에 최고의 캐스팅이 이뤄졌어요. 그리고 유진 씨 준비 잘 시키세요. 주연이 밀리면 안 되잖아요.
“믿고 맡겨주십시오.”
-믿을게요.
달칵.
전화를 내려놓은 난 곧장 정 팀의 회의를 소집해 <화란전>에 대한 홍보 전략을 지시했다.
그리고 난 유진이의 준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곧장 집으로 향했다.
* * *
천호동의 집.
2층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진이와 미소가 대본을 펴놓고 연습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이 맡은 배역은 어린 유화 공주와 성인 유화 공주.
유화 공주는 권력을 증오하면서도 권력과 싸우기 위해 패도를 걸을 수밖에 없는 복잡한 인물이다.
권력을 가질 것이냐.
도태되어 죽을 것이냐.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기해야 하는 터라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연습을 본 순간 우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처럼 복잡한 생각을 하지도 않고 놀이를 겸해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주······ 소 소녀. 배 배가 고프옵니다.”
유진이가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채 미소를 향해 두 손을 뻗는다.
순간 미소가 짐짓 점잖은 공주의 모습으로 꾸짖는다.
“거짓이니라! 아버님의 치세가 태평한데 굶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
미소가 목소리를 내리깔자 유진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살피며 씨익 하고 웃는다.
악당처럼 비열하게 말이다.
“아버님의 치세? 흐흐흐. 공주님이셨소?”
“아 아니다. 내 말이 헛나왔다!”
순간 유진이가 손을 내뻗어 미소를 꽉 껴안았다.
‘공주를 납치하는 납치범 1’을 연기하며 말이다.
“공주라면 몸값을 지불해 주셔야겠소!”
미소가 무엄하다는 표정으로 외친다.
“난 공주가 아니니 당장 놓거라. 그러면 내 너를 용서해주겠다!”
그때였다.
유진이가 미소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기 시작한다.
“미소 공주. 정녕 공주가 아니란 말이오? 이렇게 이쁜데~에~?”
미소가 다음 연기를 하려던 순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 엄마. 엄마. 나 고 공주 맞아. 꺄하하하. 그만해. 그만!”
그제야 유진이가 웃으며 미소를 풀어준다.
“우리 공주님. 연기 정말 많이 늘었는데?”
미소가 배시시 웃으며 반달눈을 한다.
“진짜?”
“응. 진짜!”
이어서 유진이는 성인이 된 유화 공주의 연기를 보여주며 미소를 따라 하게 만들었다.
유화 공주가 표현하는 감정을 눈앞에서 보여주며 미소가 공감할 수 있게 말이다.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론 화를 내고.
최지영에게 연기 치료를 받은 덕인지 두 사람 모두 희로애락의 감정을 수발하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잘하네.’
두 사람의 연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난 현관에 서서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5분이 지날 무렵.
미소가 내가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삼촌 왔다!”
아무리 놀이라지만 배역에 깊이 몰입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할 정도다.
“오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난 그제야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했다.
“아. 배우 캐스팅이 완료됐는데 상대역들이 만만치가 않아서 말해주려고 들렀어.”
오복희 PD가 전해준 배우들의 이름을 말해줬다.
캐스팅 명단을 들은 유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렇게나 대단한 분들이 다 우리 드라마에 나온다고요?”
이태연에 윤주연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S급들이 가득 출연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어. 다들 드라마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고 지원한 거지.”
유진이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제껏 조연만 해 온 유진이는 여러 주연을 압도하며 화제성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유진이가 생글거리며 미소짓는다.
“재미있겠네요.”
“재미있다고?”
“예. 요즘 들어 최지영 배우님이랑 연기하면서 알게 된 건데······ 상대가 잘하면 잘할수록 더 재미있어요. 뭐랄까 합이 맞다고 해야 할까요?”
최지영을 상대로도 여유로운 모습에 깜짝 놀랄 수밖엔 없었다.
“잘됐네. 그래도 일단 대본 리딩 때까지 잡힌 일정은 취소해 둘 테니까 대본 리딩에만 올인 하자.”
“으흠. 그러면 최지영 선배님 댁에 가서 함께 숙식하며 연습할래요.”
유진이가 미소를 쳐다본다.
“미소야. 엄마랑 같이 최지영 선생님 집에 가서 연습할까? 맛난 것도 먹고 선생님이랑 같이 자고.”
“응! 그러면 나 또 대게 먹어도 돼?”
“우리 미소. 대게가 대~게 대~게 먹고 싶어?”
미소가 집게 손을 하고 외친다.
“응~ 대게를 대~게 먹고 싶어!”
“알았어. 엄마가 제일 큰 대게 사줄게.”
유진이의 말을 듣고 최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했다.
전화를 받은 최지영이 기쁜 목소리로 답한다.
-진짜요? 잘됐네요. 마침 나도 연기 연습 상대가 필요했어요.
“지금 바로 데려가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시아는 상당히 좋아졌어요. 발음 교정만 해주니까 완전 잭과 콩나무예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자라는 거 있죠?
강시아는 <지리산>에서 이태풍의 딸로 나오는 중요한 핵심 배역이었기에 난 최지영에게 강시아의 교정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이 지났다고 강시아는 최지영도 인정할 정도로 연기력이 늘었다고 한다.
회귀 전 내가 봤었던 강시아의 재능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다.
-시아랑도 같이 연습하면 도움 많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유진이랑 미소도 데리고 와요.
“예. 배우님.”
난 캐리어에 유진이와 미소의 짐을 챙겨 두 사람을 데리고 최지영 배우의 집으로 향했다.
* * *
유진이를 최지영 배우의 집에 맡기고 온 다음 날.
체리블라썸의 메인 보컬인 세리의 생일이 되었다.
회사 소강당에서 생일 파티를 진행하며 동시에 너튜브로 온라인 팬 미팅을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으로 송출했다.
동시 접속자 수만 무려 1만 5천 명.
그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세리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세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앞에 두고 말이다.
이어서 산더미 같은 선물 증정식까지 한 뒤에야 팬 미팅 겸 생일 축하 행사가 완료되었다.
팬들을 배웅한 뒤 들뜬 체리블라썸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들어온 난 세리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세리야. 자 선물.”
“감사합니다!”
세리가 쇼핑백을 열고 내가 담아온 선물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이건······.”
테두리에 벚꽃 모양의 장식이 된 액자들이 하나씩 나온다.
그 안에 담긴 사진은 하나같이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날 처음 만났을 때 힘든 시절의 사진.
방선우에게 첫 번째 곡을 받았을 때 찍은 사진.
으로 박선녀 안무가에게 안무를 지도받는 사진.
체리블라썸이 으로 무대 위로 올라갈 때의 사진.
으로 1위를 했을 때의 사진.
컴백 했을 때의 사진.
그리고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에서 앵콜을 하는 사진까지.
소중한 기억들이 담긴 사진을 본 순간 세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빠······.”
“세리야. 생일 축하해.”
가방이나 구두를 선물로 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그보다는 추억의 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싫어하면 그땐 주말에 데려나가 백화점 쇼핑을 시켜줄 생각이었고.
하지만 세리는 액자를 껴안고 감격하며 내 품에 덥석 안겨들었다.
그리고는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뇨. 이게 제일 좋아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흐흑.”
난 손수건을 건네준 뒤 눈물 콧물을 흘리는 세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 울어. 세리야. 내일 음방 이잖아.”
우연희가 다가와 세리의 등을 토닥이며 달랜다.
본인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그래. 좋은데······ 왜 자꾸 울어? 얜. 흑.”
은아까지 다가와 세리를 달래며 눈물을 흘리자 그나마 이성적인 양은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다들 못 말린다니까? 그만 울어 울보들아!”
세리가 콧물을 흘리며 발끈한다.
“나. 우 울보. 아니야~ 흐흑.”
양은비가 못 말리겠다는 듯 주머니에서 휴지를 뽑아 코에 대어 준다.
“울보 맞으면서. 그러니까 여기다 흥 해~”
세리가 코를 흥하고 푼다.
“푸에에엥~”
양은비는 세리의 콧물을 닦아주며 반달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양은비의 눈에도 눈물이 한 방울 젖어 들고 있었다.
“우리 메인 보컬. 고생했고 앞으로도 더 잘하자? 생일 다시 한번 축하해.”
“고 고마워. 언니.”
늘 티격태격해도 언제나 자매처럼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리는 내가 준 액자를 거실 한가운데 전시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행복한 생일을 마무리 지었다.
* * *
대본 리딩 날이 밝았다.
어젯밤 늦게 최지영 배우의 집에서 돌아온 유진이와 미소는 푹 자고 일어난 뒤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예상한 대로 기자들이 달려들어 사진을 찍어댔다.
우린 플래시의 세례로 눈이 멀 만큼 시달린 뒤 MBS 경비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화란전>의 대본 리딩실은 MBS 본관 911호.
문을 열고 들어가자 5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넓은 직사각형 테이블 뒤로 스태프들이 앉을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다.
일찍 온 탓인지 대본 리딩장에는 굴렁쇠 배우 2실 송지환과 조연 일부밖에 없었다.
송지환이 날 반기며 손을 흔든다.
“여어! 정 팀장!”
“송 배우님!”
송지환 배우에게 인사를 꾸벅하자 유진이와 미소도 따라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왕 선생님!”
미소의 말에 송지환이 껄껄대며 웃는다.
그는 이른바 국왕 전문 배우였기 때문이다.
“허허허. 왕 선생님? 그래. 말 되네?”
송지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배우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왔네.’
민규리가 연분홍 재킷에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동글동글한 얼굴형에도 불구하고 콧대가 높고 눈이 큰 편이었다.
귀여움과 예쁨이 같이 조합된 외모 덕에 남성 팬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은 여배우 민규리.
하지만 내게는 그저 만병의 근원인 헬리코박터균 같은 녀석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인 배우 민규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아~”
대본 리딩장으로 들어온 민규리가 애교 가득한 웃음으로 선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워낙 싹싹한 태도였기에 다들 흔쾌히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애가 아주 싹싹하네?”
“감사해요. 선배님들. 저 열심히 할게요!”
다들 예쁘고 귀여운 신인배우의 행동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가식적인 민규리의 본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인사를 끝낸 민규리가 갑자기 우리 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