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화
39. 넌 여기 왜 와?
“만약에 김 작가가 수틀려서 이대로 드라마 엎고 KBC나 MBS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 당신들 다시는 나 안 보고 싶어? 엉?”
정삼룡 CP의 질책에 제작사 임원들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이나 방송사 CP가 가진 힘은 절대적이니까.
특히 정삼룡 CP처럼 차기 국장 후보군에 오른 인물의 눈 밖에 난다면 차기작은커녕 SBC와는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도 크다.
조응구 대표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CP님. 김 작가님.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차수연도 냉큼 일어나 고개를 따라 숙였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빠지겠습니다.”
차수연 제작 실장이 자신의 선에서 커버를 치려 했다.
조금 삐걱거리기는 하겠지만 제작 파트는 다른 사람을 붙여도 일은 진행되니까.
그보단 다른 드라마 편성을 위해서라도 CP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는 게 급한 상황이다.
분위기가 점차 살벌해지던 그때.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던 김솔잎 작가가 나섰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거참. 내가 김 작가 볼 면목이 없네.”
CP가 판을 만들어 준 상황.
김솔잎은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단단히 하려는 듯 넌지시 입을 열었다.
“조 대표님. 차 실장님. 이런 식으로 서로 낯붉힐 일 안 만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블루드래곤 스태프들의 고개가 한층 아래로 떨어졌다.
김솔잎 작가는 한 호흡을 쉬다 연이어 말했다.
“저 이 선생님 모시고 방송국 물만 5년을 먹었어요. 이렇게 생초짜 취급하시면 저도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김솔잎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물 작가 이지연이다.
김솔잎 작가가 블루드래곤의 제작진을 다시 한번 힐끗 째려보자 블루드래곤 스태프들은 다들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솔잎 작가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제 말은 여기까지. 저기 그리고 CP님도 고정하세요. 저 다른 방송국 안 가요. 저야 정 CP님 얼굴 보고 선택한 건데 이러시면 제가 뭐가 돼요?”
김솔잎 작가가 다시 표정을 밝게 고치자 정삼룡 CP가 옳다구나 하고 그 말을 받았다.
“하하하. 그리 생각해 주면 내가 고맙지.”
정삼룡 CP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조응구 대표와 차수연 실장은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블루드래곤의 스태프들은 머릿속에 김솔잎 작가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게 새겨졌다.
“아 그리고 차 실장님.”
“예. 예. 작가님?”
“차 실장님 실력 저도 잘 아니까 빠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차수연 제작 실장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김솔잎 작가가 은근슬쩍 어리다고 무시했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김솔잎 작가는 이지연 작가에게 배운 현장 장악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면 노을이 역. 결정 난 거죠?”
“물론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 데리고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김솔잎 작가의 허락에 차수연 실장은 스태프를 시켜 급히 두 배우를 데리고 오라 했다.
* * *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진이의 폴더 인사에 김솔잎 작가와 정삼룡 CP가 환히 웃었다.
“그리고 진희 씨도 정말 잘하셨는데 아쉬워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시고 다음에라도 함께 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정중한 차수연 실장의 사과가 이어졌다.
그런데 박진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돌발 발언을 꺼냈다.
“차 실장님 조 대표님. 저 이 드라마에 꼭 출연해야 해요!”
“응?”
“어?”
“그게 무슨 소리야?”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챙기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이다.
박진희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으니까.
“저······. 이번 오디션이 마지막이에요. 이번 드라마에 출연 못 하면 은퇴할 거거든요.”
아니.
저 뻥카를 여기서 쓴다고?
회귀 전 박진희가 탑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있을 때 나도 당했던 전술이다.
그런데 설마 이때부터 이런 쇼를 벌이고 있을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노련한 정삼룡 CP도 걸려든 눈치다.
5살에 데뷔한 박진희와는 아역 시절부터 현장에서 봐왔던 인연이 있었으니까.
정삼룡 CP가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진희야! 은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 최근 3년 동안 아역 이미지 벗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근데 이번도 안 되면 별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어흐흑.”
박진희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심사위원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진이의 배역이 흔들릴 리는 없었다.
정삼룡 CP가 그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때 눈치를 보던 차수연 실장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김 작가님. 진희 씨 연기도 나쁘지 않으니 셋째 역할을 부탁하면 어떨까요?”
차수연 실장에게도 모두의 시선이 옮아갔다.
쟤를 셋째 김가을 역에?
유진이가 맡은 김노을과 극 중에서 가장 많이 티격태격하는 역할인데?
차수연 제작 실장의 제안에 정삼룡 CP는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그거 괜찮네. 진희 씨 연기도 어디 빠지는 편은 아니고.”
곧이어 조응구 대표까지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솔잎 작가도 슬슬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셋째 가을이 역에 오디션을 보겠다고 신청한 사람만 15명이에요. 그냥은 곤란하고. 오디션에 통과하시면 저도 반대할 생각은 없어요. 근데 둘째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인데 괜찮아요?”
셋째인 가을이 역은 꽤 반항적인 캐릭터다.
박진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쉬운 대로 기회를 잡았으니까.
“네. 괜찮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진희의 연거푸 이어진 인사에 정삼룡 CP가 손사래를 쳤다.
“어허! 일단 오디션에 합격해야 한다니까.”
정삼룡 CP의 말에 박진희가 눈물을 닦았다.
“통과할 자신 있어요.”
“그래 나도 우리 진희 씨 실력은 알지. 암.”
차수연 실장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이스 엔터에게 받은 지원금을 뱉어내지 않아도 될 분위기니 저쪽도 죽다 살아난 심정일 거다.
박진희가 탈락하지 않고 남은 게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박은빈처럼 발암 연기는 아니다.
더군다나 어차피 이놈이고 저놈이고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이 판에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상대가 차라리 낫다 싶었다.
‘그래. 뭐 박진희 정도면······. 참아 줄만 하지.’
어차피 모든 배역을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택할 순 없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뭐 가을이 오디션에서 원래 배역을 맡았던 최은우에게 질 수도 있고.
상황이 정리되자 차수연 제작 실장이 첫 번째 대본 리딩 일정을 알렸다.
“정유진 씨 매니저님. 문자로도 통보해드리겠지만 첫 대본 리딩은 다음 주 15일 오후 3시입니다. 잊지 마세요.”
“네. 실장님!”
유진이의 첫 오디션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노을이 역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는 쾌거를 이룩하면서!
* * *
같은 시간.
굴렁쇠 엔터 본부장실에서는 실장급 회의가 살벌하게 격화되고 있었다.
“김 실장님! 지금 장난하시는 건가요?”
“장난이라뇨? 영인이가 김솔잎 작가 대본을 보고 직접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 전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배우가 고집을 부리는데 저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강지영 본부장의 호통에도 김동수 실장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 주영인 씨가 출연하기로 했던 <바람 구름 달>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쪽은 벌써 처리했습니다. 최솔아 작가님이랑 박준기 PD님한테 사과도 드리고 선물도 보냈습니다. 뭐 최 작가는 우리 영인이가 탐탁하지 않았다면서 대놓고 잘됐다고 하시더라고요.”
김동수 실장의 말이 끝나자 구성철 실장이 불같이 화를 내었다.
“김 실장 지금 장난해? 뒷말이 안 나오다니? 작가야 그렇다 치더라도 SBC 방송국은 어쩌려고? 배역 확정까지 나고 기자들도 전부 아는 사실인데! 거기다 하필이면 같은 방송국이냐? 어?”
배우 1실의 박상영 실장도 구성철 실장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시했다.
편성 받은 드라마를 여주인공이 엎어버린 일이 쉽게 정리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잠깐. 이럴 게 아니지. 영인이는 어디 있냐? 걔한테 직접 들어봐야겠다.”
“벌써 오디션 현장에 갔습니다.”
“오늘······? 유진이도 거긴데. 잠깐. 너 설마 일부러 이런 거야?”
구성철 실장이 화를 내자 김동수 실장이 시치미를 뗀다.
“거. 구 실장님. 또 말씀 섭하게 하신다. 전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요?”
“그래도 인마! 같은 드라마에 들어가면 미리 말은 해야지! 제작사에서 우릴 뭐로 보겠냐?”
“본부장님이 각 부실별로 운영하라고 한 거 기억 안 나세요? 대표님 특별 지시라고 하셨지 아마?”
강지영 본부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 두통을 달랬다.
지금으로서는 김동수 실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억지로라도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 * *
오디션에 합격해 방방 뛰는 유진이를 진정시키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예. 팀장님. 오디션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별일 없었고?
별일은 많았는데 결과가 좋았으니 아무 일도 없었다 답했다.
그런데 구성철 실장의 목소리가 어둡다.
-윤호야.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다.
전화기 너머에서 구성철 실장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문제요?”
-주영인이 주연으로 낙점받은 작품을 팽개치고 거기로 갔다더라.
“여기로요?”
-그래. 주연 오디션 다시 보겠다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기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여주인공으로 낙점받은 드라마에서 제멋대로 하차하겠다는 건 그 드라마의 제작진과는 두 번 다시 안 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사고를 치면서까지 우리 드라마를 택했다고? 왜?’
그 순간 지하주차장으로 주영인의 벤츠 스프린터 차량이 들어왔다.
“지금······ 주차장으로 들어오네요.”
-괜히 싸우지 말고 그냥 다른 회사 배우라고 생각해. 유진이한테는 말 잘하고.
“예. 실장님.”
벤츠 스프린터 차량이 주차하고 주영인이 차에서 내렸다.
주연 오디션을 위해 맞춤 교복을 입은 모양이다.
교복 핏이 아주 예술이다.
뒤따라서 내린 강명길 팀장은 오디션 상황을 물어왔다.
“너흰 벌써 끝났냐?”
“예. 팀장님.”
“결과는?”
“붙었습니다.”
“하긴 작가 추천은 무시험 전형이지.”
아니 같은 회사 배우가 오디션에 붙었는데 축하는 못 해 줄망정 삐딱하게 말을 하다니.
여간 정이 안 가는 게 아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에이스 엔터의 박진희와 경쟁을 하라고 시키더라고요. 다행히 오디션으로 제치고 당당히 자리 따냈습니다.”
“그 그러냐?”
강명길 팀장이 살짝 당황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영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해왔다.
“또 보네요. 정 매니저님.”
왜 아는 척을 하지?
거기다 예전과는 달리 눈까지 맞추고 말한다.
급이 안 되면 철저히 무시하는 주영인인데?
“아. 예. 이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인사를 받아주자 살짝 미소까지 짓는다.
얘가 무섭게 왜 이래?
팀장급 이하는 말도 못 붙이게 해야 정상인데.
“안녕하세요. 선배님.”
눈치를 보던 유진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합격 축하해. 나도 오늘 오디션이야. 아 난 주연. 같이 드라마 하면 좋겠네?”
주영인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가자. 영인아. 오디션 시간 다 됐다.”
“그럼 저희 가볼게요.”
두 사람이 사라진 직후 난 다이어리를 펼쳤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3월 2일]
-PM 7:50 SBC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바람 구름 달> 모니터링. 시청률 6.5%. 주영인 주연.)
역시나 주영인의 원래 일정이 삭제되어 있었다.
<바람 구름 달>은 퓨전 사극으로 주가를 올리는 중인 최솔아 작가와 박준기 PD의 작품이다.
하지만 역사 고증 문제와 부실한 제작비로 인해 최종 시청률 13%의 부진한 성적으로 끝난다.
그 탓에 흥행작만을 골라 출세 가도를 달리던 주영인이 잠깐 주춤거리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 미래가 변했다.
주영인이 제멋대로긴 하지만 일에 관해서 이런 무리수를 둔 적은 거의 없었는데······.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 의문보다 유진이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주영인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진이가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으니까.
“후아.”
“왜?”
“저 선배 보면 힘들어서요.”
“주영인이 왜?”
유진이가 주춤거렸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도 되는 눈치였다.
“고자질하라는 게 아니라 상황 파악이나 좀 하자는 거니까 편하게 말해 봐.”
유진이가 혀를 빼꼼히 내밀었다.
“고자질하라는 거 맞네. 뭐.”
“흠. 어쨌건 말해 봐. 쟤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아무튼 미래가 바뀌고 있으니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하긴······ 오빠한테 말 안 하면 누구한테 하겠어요.”
결국 계속되는 내 독촉을 못 이긴 유진이가 입을 열었다.
“영인 선배. 저만 보면 회사에서 나가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며 윽박질렀거든요.”
“자세히 좀 말해 봐.”
유진이가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