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7화
387.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2
차도희의 엄마 유혜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물었다.
“애들 무대 출연 순서를 바꾼 게 그쪽입니까?”
-어머?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혹시나 녹음이라도 할까 싶은지 즉답을 피한다.
하지만 태연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가 이 일을 저질렀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말장난하지 마시고 당장 애들 출연 순서부터 바로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오종미 운영팀장님께 정 팀장님이 곤란을 좀 겪고 계신다고 들어서 도울 일은 없을까 해서 연락드린 거니까.
자신이 손을 쓴 주제에 도움이라니.
참 뻔뻔하기도 하다.
“도움 좋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도와주실 생각이신지?”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혜주의 웃음이 짙어진다.
-호호호. 전화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직접 만나서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제안할 것도 있고요.
JH 미디어는 기업들의 구린 문제를 덮어주는 일 말고도 다양한 일들을 한다.
그중 핵심은 기업 오너나 그 자제들이 여는 시크릿 파티를 주최하고 연예인들을 공급해 주는 일이다.
그리고 유혜주의 제안은 아마 시크릿 파티에 내 연예인들을 보내 달라는 것일 거다.
일반적인 행사비의 5배에서 10배를 주지만 그 시크릿 파티에서는 종종 스폰 제의가 이뤄진다.
당장이라도 거절하는 게 맞지만 이 기회에 그녀를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회귀 전 JH 미디어 같은 인간들은 김동수가 직접 관리했기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어차피 싸울 상대라면 정보는 많을수록 좋지.
“제가 그리로 가죠.”
-그러면 부산 해운대 K 호텔 펜트하우스로 오세요. 로비에다 미리 전해둘 테니 유 이사를 만나러 왔다고 하세요.
다행히 체리블라썸이 묵는 호텔도 해운대 K 호텔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달칵.
전화를 끊자마자 도란희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JH 미디어는 언론사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펼쳐 찌라시를 만들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진 곳이라고.
“헐~ 대박. 진짜로 그런 회사가 있어요?”
“그래. 거물들과 어울리는 연예인들이 기사조차 안 뜨는 건 이런 회사가 뒤처리를 단단히 해줘서야.”
올해 2년 차인 도란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여간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시크릿 파티는 절대 응하지 마. 애들 인생 꼬여.”
도란희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애들한테는 뭐라고 해요? 출연 순서 바뀌었다고 말해줄까요?”
“아니 최종 확정되기 전까지는 말하지 마. 그나저나 늦겠다. 빨리 가자.”
도란희가 알겠다며 엔진 시동을 걸었다.
체리블라썸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하는 도중 오종미 운영팀장에게 다시 전화를 받았다.
-부 운영위원장님께 연락받으셨죠?
JH 미디어가 협찬사이긴 해도 유혜주는 운영위원 명단 어디에도 이름이 없다.
그런데 부위원장이라고?
오종미 운영팀장은 팜플렛과 홈페이지에 업데이트가 안 되었다며 말을 돌린다.
JH 미디어가 얼마큼 힘이 있는 곳인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일단 유혜주를 만나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뒤 전화를 끊고 부산으로 향했다.
* * *
부산 해운대 K 호텔.
체리블라썸을 12층 숙소로 보낸 뒤 로비로 내려가 유혜주를 보러 왔다고 말했다.
데스크에 있는 김 부장의 안내로 그와 함께 15층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난 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6일]
-PM 08:00 [NEW. 김세리]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무대 출연 순서 변경.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리허설은 오후 3시.
아직까지 2시간의 여유는 있었다.
띠잉.
15층에 엘리베이터가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15층 펜트하우스 입구에는 건장한 경호원 두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간단한 신원 확인 후 경호원 두 사람이 앞장서 펜트하우스의 붉은색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해운대 K 호텔 펜트하우스의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에는 2층 높이의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는데 그 창으로 해운대 바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유리창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소파에 유혜주가 앉아 있었다.
JH 미디어의 외동딸.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부잣집 사모님 같지만 그녀의 실체는 연예인과 기자 대기업을 연결시키는 검은 손이었다.
“빨리 오셨네요?”
연분홍 투피스 드레스를 입은 유혜주가 날 반긴다.
연갈색으로 염색한 그녀는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묶은 채였다.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으로 가자 유혜주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민다.
“처음 뵙죠? 저 도희 엄마예요.”
날 반기고는 있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기 왔으니 출연 순번을 바로 잡아주실 겁니까?”
“그 전에 폰이랑 스마트워치부터 끄시죠.”
난 유혜주가 보는 앞에서 폰과 스마트워치의 전원을 내렸다.
유혜주가 날 따라온 경호원을 향해 슬쩍 눈짓을 보낸다.
경호원 두 사람이 내 몸을 뒤져 전자기기가 있는지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렇게 깐깐한 검문을 끝내자 유혜주의 표정이 풀렸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출연 순서를 원래대로 돌려 드릴게요.”
체리블라썸의 출연 순서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지만 우선 유혜주의 기부터 꺾어야 할 것 같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 협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어머. 그래요? 이걸 어쩌지? 난 일방적으로 내어 주는 건 죽도록 싫어하는데요?”
“그러면 각자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할까요?”
출연 순서 말고는 관심이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소파 뒤에 있던 두 명의 경호원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건방진 새X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다리가 부러져서 기어나가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앉아 있어!”
난 움직임을 멈춘 채 나지막이 말했다.
“셋 셀 때까지 이 손 안 치우면 내일부터 차가운 죽만 먹게 해준다. 하나.”
“미친놈.”
“이 새X가 간이 배 밖에 나왔나?”
경호원들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코웃음을 친다.
“둘.”
맞은편에 앉은 유혜주는 내가 어떻게 할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다.
그녀 역시도 나와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한바탕 어울려줘야지.
“셋.”
경고를 끝낸 순간 어깨를 가볍게 비틀었다.
내 어깨를 짓누르던 팔이 허공에 뜨자 두 사람의 몸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살짝 기우뚱한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의 팔을 아래로 쑤욱 하고 잡아당겼다.
순간 덩치 큰 경호원들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경호원들의 몸이 소파의 등받이에 배가 걸리자 자연스레 두 덩치가 앞구르기를 하듯 소파를 타고 넘어온다.
와당탕!
앞으로 한 바퀴를 구른 경호원의 등이 유혜주와 나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크으윽······.”
난 테이블 위에 누운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주먹을 날렸다.
툭. 툭.
붕대를 싼 오른 주먹으로 두 사람의 턱에 닿을 듯 말 듯 주먹을 뻗었다가 회수했다.
“더 할래? 다시 하면 그땐 진짜로 죽만 먹을 각오하고.”
경호원들도 내가 사정을 봐준 걸 아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유혜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믿었던 두 사람이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 경호 팀장 들어오라고 하고 두 사람은 나가 있어!”
얼굴이 붉어진 경호원들이 고통을 참고 일어나 황급히 물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사모님.”
덜컥.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유혜주가 심호흡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할 마음이 된 모양이다.
“좋아요. 출연 순서는 다시 원래대로 돌려 드릴 테니까 일단 제안이나 들어나 봐요.”
난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주가 다리를 꼬며 말한다.
“제가 신세를 진 명문가의 자제가 5년 만에 귀국했거든요? 그래서 모레 청담동에서 프라이빗 파티를 열 계획이에요. 거기에 체리블라썸 멤버 전원이랑 이태풍 씨 그리고 정유진 씨를 모시고 와 주세요. 다른 회사에서도 여러 배우들이랑 가수들을 보내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명문가의 자제가 누굽니까?”
“그런 건 보안 사항인 거 아시잖아요.”
그 순간 난 기억을 더듬어 유혜주가 말한 사람이 누군지를 떠올렸다.
현재 시크릿 파티를 열 만한 사람 중에 이맘때 귀국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재계 55위 반도체 전문 기업 KQ1 그룹의 둘째 강혁준.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한 강혁준은 아버지의 돈으로 시크릿 파티를 열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티가 열리는 곳이 청담동이라면 아마도 씨크릿 클럽 ‘써드’를 이야기하는 곳일 거다.
회귀 전 김동수의 지시로 가본 적도 있었기에 그 씨크릿 클럽의 위치도 알고 있었고.
자신과의 대화로 정보를 캐내는 것도 모른 채 유혜주는 이번엔 조건을 늘어놓는다.
“출연료는 이번 부산 월드 페스티벌 행사비의 5배. 체리블라썸은 곡당 천만 원 받으니까 1곡에 5천만 원씩 드릴게요. 2곡만 불러도 1억이에요. 어때요? 아 그리고 배우들은 참석만 해주면 1억 드리고요.”
난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에이 정 팀장 앞으로 드릴 수고비도 들어봐야죠. 팀장님한테는 별도로 5천만 원의 수고비를 드릴게요.”
난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1억이 아니라 10억씩 준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전화해서 연예인들한테 직접 물어봐요.”
“괜한 수작 부리지 마시죠.”
매몰찬 거절에 유혜주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 참 팍팍하게 사시네. 자꾸 삐딱하게 굴면 큰코다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지난번 차도희가 벌였던 짓. 그대로 돌려 드릴까요?”
걸프렌즈7의 에이스 차도희가 주도한 왕따 사건.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런칭 초반이라 팬덤이 튼실하지 못한 걸프렌즈7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순간 유혜주가 날 쏘아본다.
“지금 저랑 싸우자는 거예요?”
“싸우자는 게 아니라 거래하자는 겁니다. 출연 순서만 원래대로 돌려주면 그 건은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무섭게 나를 쏘아보던 유혜주가 결국 한발 물러났다.
나야 내 소속 스타가 걸린 문제지만 그녀에게는 하나뿐인 자식이 걸린 문제니까.
“대신 절대 내 딸 이름은 거론하지 마요. 그땐 나도 물불 안 가리고 뒤엎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하죠. 그럼 애들 순서부터 돌려주십시오.”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요.”
유혜주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 출연 순서 원래대로 돌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결국 유혜주가 출연 순서를 원상 복귀시켰다.
대가로 차도희의 일을 묻어야 했지만 어차피 상관없어졌다.
강혁준의 프라이빗 파티라는 더 좋은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까.
‘약속한 대로 차도희는 건드리지 않을게. 하지만 당신이랑 JH 미디어는 그냥 안 놔둬.’
체리블라썸과 정 팀의 앞길을 막는 JH 미디어를 그대로 둘 생각 따윈 없었다.
* * *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의 엔딩 무대.
2만 명의 관객 앞의 무대 위에서 체리블라썸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관객들의 절반은 체리블라썸의 팬인지 응원봉을 들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포에버 리더 우연희!
-러블리 파워 양은비!
-프리티 엔젤 유은아!
-큐티 섹시 김세리!
조금은 부끄러운 구호들이었지만 수만 명이 일제히 내뱉는 응원 구호는 무대에 지친 가수에게는 비타민이 되어 주고 있었다.
노란색 바탕에 붉은색 체크 무늬가 새겨진 재킷에 새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검은색 플레어 치마.
마치 학창 시절의 교복을 연상하게 하는 무대 의상을 입은 체리블라썸 4인조가 환히 웃으며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신곡 의 후렴구를 부를 순간이 찾아왔다.
우연희와 세리 그리고 양은비와 은아가 쌍을 맞춰 한 손씩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하트를 만들었다.
하트를 만든 네 사람이 팬들을 향해 아름다운 하모니로 후렴구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My First Love Story~』
그 순간 팬클럽 벚꽃패밀리가 공연장이 떠나가라 외쳐대었다.
-L! O! V! E! 우리 사랑 영원히!
팬들의 열광이 이어질 때마다 이 무대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내 가슴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도 무대 위에 반짝이는 별이 된 그녀들을 보며 힘차게 외쳤다.
“L.O.V.E. 우리 사랑 영원히!”
힘차게 구호를 외치자 도란희와 이주영 대리 그리고 한명호 팀장까지도 응원봉을 흔들며 열렬히 응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번째 무대가 끝나고 두 번째 곡 의 차례가 되었다.
출연 순서 변경에 대한 항의로 우린 앵콜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신 내일 부산 팬 미팅 때 오늘 못한 것까지 미니 콘서트를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행사의 책임자인 오종미 팀장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정 팀장님······.”
내 눈치를 보던 그녀가 고개를 팍하고 숙인다.
“무슨 일이십니까?”
슬그머니 고개를 든 오종미 운영팀장이 말한다.
“저기······ 앵콜 2곡까지는 안 될까요? 부시장님이 가족들과 함께 오셨는데 그분 따님이 체리블라썸 팬이라고 하셔서······.”
운영위원장인 부시장의 딸이 팬이라고?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