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6화
386.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1
어젯밤.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체리블라썸이 병실을 떠났다.
내일 부산에서 행사가 잡혀 있었기에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하나와 유진이 그리고 미소는 병실을 나서지 않았다.
세 사람은 특실에 딸린 방에서 자고서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겠다며 말이다.
그런데 아침 일찍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려고 한 순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끄으응······ 뭐야?”
고개를 돌려본 순간.
침대 양쪽으로 보조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이불 위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양쪽에서 이불을 꼭 껴안고 자다 보니 팽팽해진 이불이 내 몸을 누르고 있었다.
‘어쩐지 답답하더라니.’
다른 사람이 본다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사람을 간호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그저 새벽녘에 지리산을 오른 다음 언론 대응을 하고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늦게 자서 푹 잔 것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모르겠네.’
마치 구속복을 입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 나머지 상체라도 빼내려고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였다.
내가 움직이는 걸 느꼈는지 유진이가 눈을 끔뻑거리며 일어난다.
“어. 오빠. 일어났어요?”
아침이라 유진이의 목소리가 가득 잠겨 있다.
“어. 지금 막.”
이어서 강하나도 눈을 뜬다.
“어 어. 오빠. 일어났어······요?”
“그래. 이렇게 간호해 줘서 고마워. 하나야.”
“아 아니에요.”
강하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린 뒤 눈을 비빈다.
혹시 자기 눈에 눈곱이라도 꼈을까 봐서.
반면 유진이는 날 먼저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유진이는 내가 괜찮은 걸 확인하고서야 이불에서 몸을 일으킨다.
팽팽한 이불이 늘어져 그제야 이불에서 몸을 빼낼 수가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앉은 난 유진이를 향해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녜요. 태풍 오빠랑 재수 오빠 구한다고 그랬다면서요?”
유진이는 내게는 참 많은 일이 생긴다며 투덜거린다.
당장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그런데 그때였다.
말이 씨가 된 듯 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유진아. 잠깐만?”
유진이와 대화를 멈춘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폰을 확인했다.
[알림 : 2020년 10월 26일 ‘김세리’에게 새로운 일정이 발생하였습니다.]
10월 26일은 오늘.
급히 오늘 자 일정을 확인했더니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6일]
-PM 08:00 [NEW. 김세리]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무대 출연 순서 변경.
‘이게 무슨 말이야?’
오늘 체리블라썸이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행사는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Busan World Pop Festival).
부산시에서 주최하는 K-POP 콘서트로 콘서트와 팬 미팅이 이틀간 이어진다.
관객들이 2만 명이나 결집하는 초대형 행사인데 그 행사의 개막식 엔딩을 체리블라썸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난 곡 으로 9주 연속 1위를 한 데다 컴백과 동시에 로 1위를 차지한 현재 한국에서 가장 핫한 아이돌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엔딩 무대 때는 앵콜 요청도 받기 때문에 총 세 곡 정도는 부를 생각을 하고 이 행사를 잡았다.
연말 합동 콘서트를 기획 중이기에 수만 명 앞에서 노래하는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엔딩 무대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왜?’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지만 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팀장님!”
체리블라썸의 부산 행사 때문에 지금쯤 출발해야 하는 도란희가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행사 운영팀장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엔딩 무대에 걸프렌즈7이 선대요! 우리는 그 앞 순서로 밀렸고요!”
다이어리에서 알려준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2곡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마저 줄어 한 곡이 되었다고 한다.
대신 그 자리를 음방 순위 3위이자 음원 순위 2위인 걸프렌즈7이 2곡을 하게 되었고.
“이유는 안 말해줘?”
“예. 월드 팝 페스티벌 위원회 운영팀장이랑 통화해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알았어.”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미소 챙겨서 하나랑 서울로 먼저 올라가.”
“오빠는요?”
“아무래도 부산 쪽으로 가봐야 할 거 같아.”
체리블라썸의 문제가 심상치가 않다.
이 정도 초대형 행사에서 인기 걸그룹의 출연 순서가 바뀐다는 건 강한 외압이 내려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진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대신 미소한테 인사는 하고 가세요. 미소도 걱정 엄청 했어요.”
“알았어.”
난 도란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특실에 딸린 보호자 방으로 향했다.
미소는 이불을 걷어찬 뒤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자고 있다.
작은 입술이 오물대는 모습은 마치 꿈에서 뭔가를 먹는 듯한 모습이다.
“미소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미소가 꿈틀거린다.
“으으······ 음······.”
“삼촌. 일 나가야 해. 미안한데 엄마랑 둘이서 서울 가야겠어.”
그 순간 미소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내 팔을 붙잡는다.
눈은 반쯤 잠긴 채로 가지 말라는 듯.
내가 다쳤다는 게 많이도 놀라게 한 모양이다.
“우리 미소 걱정시켜서 미안. 근데 세리 언니 쪽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거 같아. 끝내고 금방 올라갈게.”
미소가 눈을 비비며 섭섭해하는 목소리로 답한다.
“알았어요······.”
난 시무룩해진 미소를 품에 꼭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그 순간 미소가 작은 팔로 날 꼭 껴안아 준다.
“이제 다치지 않기. 약속.”
가슴이 뭉클해진 난 웃으며 미소에게 답했다.
“약속.”
미소를 꼭 안아준 난 그제야 병실을 나섰다.
병실 밖에서 기다리던 정상봉에게 세 사람을 맡긴 뒤 퇴원 절차를 빠르게 밟았다.
약 처방을 받고 병원 로비를 나서며 도란희에게 물었다.
“들어올 때 기자들 몇 명 있던?”
“기자요? 한 다섯 명 정도 있던데요? 근데 그건 왜요?”
“체리블라썸 문제 이전에 지리산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
현재 시각 아침 8시.
이 시간 정도면 서울에서 출발한 기자들이 도착하고 있을 시간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
“어제 기자들이랑 인터뷰 한 걸로 끝난 거 아니었어요?”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1층 주차장에 차를 대 놓은 터라 로비를 통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대로.
주차장에 연결된 유리문 앞에는 기자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병원 안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다.
“잠깐만요! 얼굴만 보고 올게요. 예?”
“안 됩니다. 환자 보호자 말고는 못 들어갑니다.”
병원 경비들은 자동문을 수동으로 바꾸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자들을 막고 있었다.
놀란 도란희에게 침착하라고 일렀다.
“지방 쪽에서 일 터졌을 땐 당일보다 그다음 날을 더 신경 써. 서울에서 기자들이 내려오는 시간이 있으니까.”
도란희가 감탄 어린 눈길로 쳐다본다.
“팀장님은 지방 행사도 잘 안 다니면서 이런 일은 어떻게 그리 잘 아세요?”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답했다.
“그런 건 1년 차 로드 때 다 뗐지.”
“전 로드 땐 하도 정신이 없어서 다른 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던데······.”
도란희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미안해 란희야. 실은 나도 회귀 전에 몇 년 굴러먹고서야 알게 된 거야.’
그때였다.
“저기! 정 팀장이다!”
기자 한 명이 유리문 너머의 날 발견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경비들이 다칠 수도 있었기에 난 도란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안면 있는 기자들이라 말을 걸어온다.
“이태풍 씨랑 고재수 씨는? 다친 데는 없고? 병원에 입원했다며?”
“정 팀장 진짜 이럴래? 나 섭섭해!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 나한테는 전화 한 통 줄 수 있잖아!”
“살인자를 잡는 걸 직접 봤다며?”
난 승냥이처럼 덤벼드는 기자들에게 어젯밤 부산 지역 기자들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며 산장에서의 상황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살인자 역할은 도란희가 맡았다.
“팀장님. 이렇게요?”
도란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들어 올린다.
“오케이. 거기서 허리는 조금 비틀어. 조금 더 꺾어. 인상을 조금 더 쓰고. 오케이~ 됐어.”
난 도란희를 세워둔 채 고재수로 빙의해 기자들 앞에서 재현을 시작했다.
“살인자가 고재수 씨와 딱 마주쳤는데 고재수 씨 포스에 살인자가 벌벌 떨면서······.”
난 철저히 고재수가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중간중간 <지리산>을 홍보하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도란희가 고생을 해야만 했다.
“란희야. 그게 아니지! 거기서 털썩하고 쓰러져!”
“끄오오옥!”
도란희가 괴상한 소리를 내려 쓰러진다.
주차장 위로 털썩 쓰러진 그녀의 눈에서는 점점 존경의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한우를 사 먹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쨌건 이걸로 오늘 타이틀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살인마를 지리게 한 고재수의 포스 정도로.
* * *
병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
인터뷰를 마친 우린 식은땀을 흘리며 잠깐 숨을 돌렸다.
여전히 내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기에 운전대는 도란희에게 넘겼다.
“고생했어 란희야.”
살인자 역할을 맡았던 도란희가 날 쏘아본다.
난 불평이 나오기 전 입막음을 시도했다.
“명가 한우!”
회사 앞에 있는 1인분에 5만5천 원짜리 한우 가게를 언급하자 도란희가 움찔한다.
하지만 조금 전 바닥을 구른 게 창피하고 힘들었는지 쉽게 넘어 오지 않았다.
“제 제가 한우면 다 되는 줄 아세요?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거든요!”
“하지만 백제갈비 눈꽃 한우라면 어떨까?”
1인분에 8만 원짜리 최고급 한우 가게를 언급한 순간.
도란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콜!”
한우 앞에 한없이 약한 여자.
그녀의 이름은 도란희였다.
“그나저나 팝 페스티벌 운영팀장 연락처 좀 줘봐.”
도란희가 입가의 침을 닦으며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운영팀장의 전화번호를 건네준다.
“오종미 팀장이네.”
“혹시 아세요? 되게 깐깐하던데요?”
“알지.”
오종미 운영팀장.
부산 관광공사에 일하는 경력 15년 차 직원으로 부산 쪽 행사 대부분은 모두 그녀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즉 그녀에게 밉보이면 앞으로 부산 쪽 행사는 받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출연 순서 변경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전화를 걸자 대번에 오종미 운영팀장이 받는다.
사정을 묻자 그녀는 똑같은 말만 반복한다.
-운영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니 따라주셨으면 해요.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최소한 이유라도 알려주시는 게 도의 아닙니까?”
오종미 운영팀장은 계속해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한다.
이런 초대형 행사에서는 연예인들이 을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후의 한 방은 있다.
인기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럼 오늘 행사 출연은 없던 걸로 하시죠.”
그 순간 오종미 운영팀장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이미 대대적으로 체리블라썸이 나오는 걸 광고해 팬들을 모은 행사였다.
그런데 체리블라썸이 나오지 않는다면 집단 항의로 이뤄질 게 뻔했다.
오종미 운영팀장은 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강압적으로 나선다.
-이렇게 나오면 내년 행사뿐 아니라 부산시에서 주관하는 다른 행사들에는 초청 못 받을 수도 있는 거 아시죠?
부산시와 관련된 행사만 해도 일 년에 수십 개는 된다.
그리고 그 행사들 대부분은 이 운영 위원회의 사람들이 옮겨가며 하고.
그러나 난 협박에 굴할 생각이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SNS에 체리블라썸은 행사 참여가 힘들게 되었다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윗분들에게는 그렇게 전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건 사태를 바로 잡는 일이지만 최악의 경우까지도 염두에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됐습니다. 전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습니다.”
-윗분들한테 보고는 드려야죠! 5분 안에 연락드릴 테니까 꼭 기다려요. 꼭!
달칵.
내가 행사를 포기할 각오까지 한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보다.
전화를 끊자 도란희가 묻는다.
“팀장님. 그런데 누가 압력을 넣었을까요?”
“이 정도 순서를 바꿀 정도면······ 적어도 부시장급 이상이지.”
현재 부산시장은 야당인 구양호 시장.
그리고 이번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 위원장은 양상춘 부시장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부시장 정도가 되면 이런 문화 행사는 실적을 쌓는 요식 행위일 뿐.
아이돌 순번 같은 데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정치인들에게 있어 연예인들은 ‘딴따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러니 이건 이 업계를 잘 아는 빠꼼이의 장난이다.
조금 전 오종미 운영팀장이 중간에 껴서 장난질했을 가능성도 있었고.
하지만 가장 강력한 후보는 따로 있다.
걸프렌즈7 차도희의 엄마 유혜주.
차상태 의원의 아내이자 JH 미디어 대표 유현필의 외동딸인 그녀가 유력한 후보다.
JH 미디어는 부산 쪽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 관련 사업체였지만 회귀한 나는 그 회사의 정체를 안다.
표면적으로는 기업들로부터 광고를 수주받아 언론사에 뿌려주는 광고대행사.
하지만 실제로는 대기업의 의뢰를 받고 불리한 기사를 내려주는 일을 대행해주는 곳이다.
총수의 비리 기업의 비리 재벌 3세의 비리 같은 일들이 세상에 소문이 나지 않게 말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건 JH 미디어가 은퇴한 방송 언론인들을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대형 법무 법인들이 부장 판사 지검장 등 고위 전관들을 영입하는 것처럼.
회귀 전 이런 자들은 김동수가 혼자서 만나곤 했지만 나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이 하는 일은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발신자 표시 제한]
보통은 상대를 모르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연예인들의 매니저에겐 온갖 제안이 걸려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전화를 건 사람이 체리블라썸의 출연 순서를 바꾼 당사자일 테니까.
“여보세요?”
-정 팀장님?
“누구십니까?”
-저 도희 엄마예요.
내 생각이 맞았다.
차도희의 엄마 유혜주.
그녀가 부산 월드 팝 페스티벌의 출연 순서를 바꾼 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