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3화
383. 지리산 1
다시 한번 다이어리의 일정을 확인하며 이태풍의 부상에 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5일]
-PM 12:50 [NEW. 이태풍] 부상으로 인한 일정 긴급 연기. (보고 사항 : 119 헬기 이륙 시각 12시 45분. 진주 경상병원으로 긴급 이송.)
119 헬기를 요청해야 할 정도라면 크게 다친다는 뜻이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15분.
지금부터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지만 헬기에 타는 시각만은 분명했다.
12시 45분.
갈림길 전에 본 헬리콥터 착륙장과의 거리와 산 아래에 연락해서 헬기가 날아오는 시간을 계산하면 지금부터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하여간 현재로서 가장 확률이 높은 건 하산하다가 부상 당하는 경우였다.
산행 경험이 부족한 초심자들이 하산 때 다리에 힘이 빠져 다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난 결정을 내렸다.
‘일단 12시 50분은 넘어서 하산하자.’
일정이 사라지는 것만 보고 내려간다면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였다.
폰을 들고 왔다 갔다 하던 이대호가 내게로 다가왔다.
“팀장님도 안테나가 안 잡히세요?”
“예? 아······.”
다이어리에 집중했더니 폰의 안테나 신호가 안 잡히고 있다는 걸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일정 업데이트는 되는구나.’
“그러게요. 저도 안 잡히네요.”
그 순간 앞서 있던 고재수가 답한다.
“여긴 가끔 이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있다가 또 잡힐 거예요.”
어제는 산장 주인 오태완과 고재수의 아버지 고창한이 통화를 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종종 전파가 닿지 않아 연락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난 이대호에게 이태풍을 각별히 신경 쓰라 일렀다.
“태풍이가 산행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옆에 꼭 붙어서 절대 안 다치게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이대호 역시 지쳐 보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재수는 전혀 지치지 않고 쌩쌩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어릴 때부터 지리산을 타고 놀았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리산에 오자 서울에서 보았던 자신감 없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 왔습니다. 빨리 가시죠.”
우린 고재수를 따라 다시금 산장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천왕 산장]
천왕 산장의 현 소유주인 오태완의 할아버지가 70여 년 전에 개인 재산으로 지었다는 2층짜리 산장은 내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산장 한쪽 벽의 길이만도 30m가 넘는 대형 산장에 심지어 별관 건물마저 딸려 있었다.
다만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는지 산장 앞 넓은 평지에는 자갈 사이로 풀들이 무릎까지 솟아 있었다.
나무로 지은 산장의 외관은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드러내듯 나무들의 색이 바래 회갈색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산장 부지 주위로는 20m가 넘는 고목들이 빽빽하게 솟아나 있었다.
거기다 천왕 산장의 지붕마저 등나무 줄기로 덮여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찾기 힘들어 보였다.
우릴 앞서던 고재수가 뒤를 돌아본다.
“저기······ 태완 아재가 무뚝뚝한 편에다 낯을 가리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오태완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사업체가 부도난 뒤 이혼하고서 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집은 대대로 재산이 많았기에 부족함은 없었으나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세상과 단절을 하고 사는 산 사나이가 되었다고.
그나마 연락하는 게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내왔던 고재수의 가족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컹컹.
“아 득구가 짖네요.”
“득구요?”
그때 풀 사이로 새하얀 개의 머리통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눈앞에서 풀이 갈라지며 새하얀 발바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털이 레게머리처럼 꼬여 눈을 덮은 발바리는 우릴 보자 경계심이 가득한 소리로 으르렁댄다.
크르르르.
고재수가 당황해 손을 내민다.
“득구야. 나야 나. 기억 안 나?”
크르르.
“득구야. 나라니까?”
순간 득구가 고개를 갸웃한다.
컹?
“그래. 나! 재수 형.”
컹컹. 왈왈.
득구란 이름의 발바리가 고재수를 알아보고 꼬리를 신나게 흔들기 시작한다.
“태완 아재는?”
컹!
발바리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지 고개를 돌린다.
그때 저 멀리 산장의 별관에서 발바리처럼 머리를 잔뜩 늘어뜨린 남자가 나온다.
키는 대략 180cm 정도 되어 보이는데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채였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 같은 외모로 소름이 오싹 끼친다.
하지만 고재수는 그런 오태완을 향해 너무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댄다.
“태완 아재!”
그와 동시에 남자가 도끼를 들지 않은 반대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왜 이렇게 늦었냐?”
“혼자 오는 게 아니라서요.”
두 사람이 친하게 인사하는 걸 본 순간 긴장이 살짝 풀린다.
순간 오태완이 날 힐끗 쳐다본다.
난 일행들을 대표해 인사를 건넸다.
“정윤호라고 합니다. 이번에 고재수 씨와 함께 일하게 된 매니접니다.”
“형님에게 들었소.”
이태풍과 이대호도 인사를 했지만 무표정하게 대할 뿐이었다.
세상과 거의 단절된 삶을 산다더니 이태풍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인사를 마친 오태완이 손짓을 해 고재수를 불렀다.
“점심은 라면 어떠냐?”
“출출한데 잘됐네요. 산에서는 역시 라면만 한 게 없죠.”
“들어와라.”
오태완이 산장을 향해 걸어가자 득구가 사람 무릎까지 오는 풀숲을 헤치며 오태완을 향해 달려갔다.
득구가 문 앞에 멈춰 꼬리를 흔든다.
오태완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득구에게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왕!
득구에게 간식을 준 오태완은 말없이 나무로 된 산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재수는 그런 오태완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태완 아재가 저래 보여도 마음이 여리신 분이에요.”
그때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던 이태풍이 돌아왔다.
“윤호 형. 여기서 연습만 하는 건 너무 아까운 것 같은데요?”
“뭐가?”
“아니 로케 장소로 딱 인데 감독님을 모셔와서 한번 보여드리면 어때요?”
<지리산>의 배경은 눈이 쏟아져 고립된 지리산 대피소였다.
그런데 천왕 산장의 크기와 위치를 보니 조금만 손 보면 촬영에 최적합지일 것 같았다.
“우선 며칠간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먼저 받아보고.”
“제가 허락을 받아볼까요? 저 그래도 요즘 제법 유명해졌잖아요.”
“아니. 딱 봐도 너 몰라보는 눈치던데?”
고재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산장에는 TV가 없어요. 그리고 태완 아재가 산 안 내려가신 것도 1년은 넘으셨을 텐데······.”
이태풍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현재 이 천왕 산장에서 이태풍은 그저 잘생긴 총각 1일뿐이었다.
* * *
천왕 산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이 우릴 반겼다.
그리고 거실의 중앙에는 주전자나 냄비를 올릴 수 있는 평평한 철제 화목 난로가 놓여 있다.
거기에는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듯한 연통이 연결되어 있는데 방마다 이렇게 화목 난로들이 있다고 한다.
오태완이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땔감으로 사용하는 목재를 넣는다.
“라면은 있는데 밥은 식은 밥 밖에 없다.”
고재수가 날 쳐다본다.
괜찮다고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애당초 원한 건 천왕 산장에서 며칠 머무를 수 있는지만 알면 되니까.
“라면엔 찬밥이죠. 그거면 됩니다.”
“예 팀장님.”
고재수가 괜찮다고 하자 오태완이 부엌처럼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10명은 족히 먹을 커다란 양은 냄비를 들고 왔다.
이어서 한 말짜리 통에 든 물을 콸콸 들이붓더니 난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이터로 마른 나뭇잎에 불을 붙이더니 땔감 목재에 불이 옮겨붙을 때까지 바람을 후후 분다.
몇 분 뒤.
마른 땔감에 불이 붙고 나자 그제야 오태완이 날 보며 묻는다.
“창한 형님이 여기에서 재수랑 저기 허연 친구랑 며칠 머물면 안 되냐고 하던데 맞소?”
“예.”
“창한 형님 부탁이니까 거절할 수도 없고······.”
잠깐 인상을 찌푸리던 오태완이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재수랑 이 친구. 딱 둘만 허락하겠소. 대신 먹을 건 알아서 해 드시오.”
이태풍이 신이 나 주먹을 불끈 쥔다.
하지만 배우들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할 테니 저랑 여기 이대호 매니저도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태완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딱 둘만. 난 사람 많은 건 질색이라서.”
오태완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이태풍 자신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재수 역시도 자신이 나 대신 이태풍의 뒷바라지를 한다고 했지만 허락할 수는 없었다.
대신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이태풍이 다치는 일정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최소한 그 일정은 사라지고 난 뒤 내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해 보고 다시 대답 드리겠습니다.”
오태완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시구려.”
재깍재깍.
현재 시각은 11시 20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 * *
11시 35분.
화목 난로에 올린 냄비의 물이 이제야 끓으며 양은 냄비의 뚜껑이 달그락거린다.
오태완이 냄비 뚜껑을 젖히고 라면 여섯 봉을 넣고 휘휘 젓기 시작했다.
꼬들꼬들해 보이는 면발을 본 순간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11시 40분.
오태완이 나무 그릇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직접 깎은 건지 표면이 투박했다.
“먹읍시다.”
그의 허락에 다들 냄비에 달라붙어 라면을 덜었다.
후루룩!
라면을 한 젓가락 빨아들이자 쫀득쫀득하고 꼬들꼬들한 면발에 눈이 돌아갈 정도다.
‘왜 이렇게 맛있어?’
불편했던 기분도 따뜻한 국물과 면발을 먹자 한결 편해졌다.
김치도 없었지만 면과 국물 찬밥만으로 꿀맛이었다.
11시 50분.
눈 깜짝할 사이에 식사를 마쳤다.
사고가 생겨 헬기를 탄다고 예고된 시간은 12시 45분.
여기서 나가는 시각까지 생각하면 이제부터는 언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범위 안에 들어왔다.
확실하게 일정을 지우려면 12시 50분은 지나서 산장을 나갈 필요가 있었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되겠군.’
그때 오태완이 묻는다.
“어떻게 할 겁니까?”
“죄송합니다. 태풍이랑 재수 씨만 여기 놓아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내려가겠습니다.”
이태풍이 실망한 표정을 짓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만 한 시간 정도 더 있다가 내려가도 되냐 물었다.
“올라오느라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한 시간만 쉬었다가 내려가도 괜찮을까요?”
오태완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렇게 하시던지. 대신 너무 늦으면 곤란하오. 해가 떨어지는데 내려가다 사고가 날 수 있거든.”
오태완은 그 나름대로 고창한의 추천으로 온 우리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었다.
다행히 근처에 있는 법계사까지는 셔틀버스가 온다.
그러니 내려갈 때는 법계사 루트로 내려간 다음 버스를 타고 하산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컹컹컹컹!
갑자기 산장 밖에서 득구가 요란스레 짖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오태완이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누가 또 올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제 일행들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오태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소.”
고재수가 따라 일어나려 한다.
“아재. 저도 따라갈게요.”
“넌 여기 있어.”
“멧돼지라도 나온 거면 어떻게 하려고요?”
오태완이 도끼를 꽉 쥔다.
“멧돼지 정도야. 그리고 저번에는 곰도 나왔었는데 나 혼자 잘만 쫓아냈다.”
“그건 더 문제잖아요!”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설마 곰인가? 에이······ 설마.’
최근 지리산 반달곰이 사람을 해칠 뻔했다는 기사가 떠올라 경계심이 한층 올라간다.
오태완은 우리보고 가만히 있으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옆에 기대놓았던 도끼를 들었다.
끼이익.
오태완이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쿠웅.
문이 닫힌 순간 난 일행들에게 조심하라 일렀다.
다이어리의 경고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긴장해.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무기가 될 만한 건 뭐든 들어.”
“왜요?”
“곰이라도 들어오면 싸워야지.”
고재수와 이태풍 이대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난 산장 한구석에 쌓아둔 땔감 목재를 손에 쥐었다.
야구 배트 굵기의 각목은 한 손에 딱 잡힐 정도였다.
길이는 대략 60cm 정도.
결국 나머지 세 사람도 날 따라 손에 각목을 쥐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르르- 컹컹컹!
밖에 있는 득구가 짖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뭘 보고 짓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뭔가 문제가 생긴 건 분명했다.
난 급히 이대호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일단 제가 나가볼 테니까 대호 씨는 두 사람 지키고 계세요.”
“같이 갈까요?”
“아뇨. 저 혼자 나가보겠습니다.”
그 순간 고재수는 날 따라나서겠다고 말한다.
“곰이든 멧돼지든 사람이 많아야 겁을 먹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제가 더 잘 알고요.”
어릴 적부터 지리산을 타며 이곳에서 놀았다는 고재수의 조언을 무시할 순 없었다.
“좋습니다. 대신 내가 앞장설 테니까 재수 씨는 뒤에서 따라오세요.”
“예.”
난 조심스레 문을 5cm 정도만 열고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크르르- 왈왈왈!
득구가 짓는 소리가 산장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