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1화
381. 집으로 돌아가는 길 1
최만식 대표가 우리 사주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려는 건 결코 직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직원들에게는 싼값에 주식을 나눠주며 충성을 요구하고 상장 후에는 주식을 회수해 굴렁쇠 엔터를 자기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겐 그 계획을 역으로 이용할 방법이 있었다.
“대표님. 저희도 맞불을 놓죠.”
우리도 최만식 대표에게 맞서 매니저들을 들이자고 말했다.
“서예종을 쥐고 있는 최 대표랑 달리 우리는 어떤 놈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사람을 늘려? 함부로 들이면 최만식이 다 거둬갈 텐데.”
강감찬 대표는 입맛이 쓴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매니저들 목록이라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잠시만요.”
난 곧장 내 기억 속에 있는 매니저들 명단을 추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업계에서 쓸 만하고 절대 배신하지 않을 매니저 이름 30개를 추려 강감찬 대표에게 까톡으로 보냈다.
“이 친구들을 영입하라는 거냐?”
“예 그동안 현장을 돌며 확인한 뚝심 있고 일 잘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배신 안 할 의리 있는 성격이다 싶으면 유심히 봐 뒀습니다.”
특히나 서예종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강감찬 대표의 관심을 끈다.
난 이어서 강감찬 대표에게 한 제안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 사주 매입 권한은 반드시 전 직원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만 손 써 주십시오.”
명단을 보던 강감찬 대표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진다.
“나도 이름을 들어본 이들이 몇몇 있구나. 그래. 이 친구들을 영입하면 된다는 거지?”
“예.”
우리 사주를 살 수 있는 권리를 최만식 대표가 아니라 모두에게 나눠준다면 게임의 룰은 간단해진다.
누가 더 많은 매니저를 영입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가로.
난 우선 믿을 수 있는 매니저들을 최대한 끌어들인 뒤 최만식 대표가 데려온 사람들까지 내 편으로 섭외할 생각이다.
내게는 최만식이 가지지 못한 무기가 있었으니까.
바로 ‘어떤 작품이 성공하는가?’에 관한 정보.
그 정보를 흘린다면 배우나 매니저들은 결국엔 내 손을 잡게 될 게 확실했다.
자신만만한 내 표정을 지켜보던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겠다. 이 명단에 오른 이들에게 우선 접근해 보마.”
강감찬 대표는 가능한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데려오겠노라 답했다.
그때 강지영 본부장이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매니저들을 데려오려면 그 이상으로 배우가 필요한데······ 영입할 배우 명단은 없나요?”
“자금만 허용한다면 있습니다.”
“올해 매출이 워낙 좋아서 자금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순간 난 미리미리 추려두었던 배우 30명의 이름을 건넸다.
A급은 3명이고 나머지도 급은 떨어지지만 쏠쏠하게 벌어다 줄 만한 알짜배기 배우들의 명단이었다.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네요. 이건 저랑 구 실장님이 검토해 본 후 처리하죠.”
“그리고 명단에 없는 배우들도 몇 명 있는데 그 친구들은 제가 직접 데려오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강감찬 대표가 우릴 쳐다보며 굳은 결심을 한 듯 말한다.
“그래. 이번 기회에······ 굴렁쇠 엔터를 업계 1위로 만들어 보자꾸나.”
강감찬 대표는 원래 보수적으로 사업체를 운영했다.
회사가 흑자를 내고 안정적인 경영을 해야 소속 연예인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강감찬 대표는 자신의 경영 방침을 바꾸고 있었다.
업계 1위를 노리기 위해 확장 정책을 시도하는 순간 당분간 적자 운영도 각오한단 소리니까.
그러나 난 그 와중에도 회사가 흑자를 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적자가 났다는 것만으로 강감찬 대표의 경영 능력을 의심받게 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각오를 다진 강감찬 대표가 날 쳐다본다.
“믿는다 윤호야.”
강감찬 대표의 신뢰 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예! 대표님!”
* * *
회의를 끝낸 직후.
강지영 본부장과 정수혁 이사는 할 일이 있어 먼저 대표이사실을 떠났다.
단둘만 있는 자리.
강감찬 대표는 최은태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대표. 나도 이미 돌아가는 사정을 들었네. 지금이라도 내가 주주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내는 건 어떻겠나?
“이쪽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박상곤 의원을 실각시키는 것만 집중해달라는 요청이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만식이 그놈은 아예 군소 엔터 회사를 인수해서 덩치를 키우고 자기 편을 늘리려던 모양이던데?
“그렇다면 오히려 잘됐습니다. 이 놀이판이 끝나면 굴렁쇠 엔터는 업계 1위로 올라갈 테니 말입니다.”
순간 최은태 회장이 큰 웃음을 터트린다.
-모험해 볼 생각인가 보군. 자신은 있나?
“저 강감찬입니다.”
-하긴 자네 역량은 내 잘 알지.
이어 최은태 회장이 내게 묻는다.
-정 팀장 생각은 어떤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만식 대표의 수작에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은태 회장이 기껍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믿음직하군. 허허허.
최은태 회장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린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어 강감찬 대표와 후속 대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최만식 대표가 아닌 김동수였다.
‘절대 그냥은 안 있을 인간인데······.’
* * *
서울 구치소 면회접견실.
초췌한 몰골의 김동수는 접견실에서 이기철 이사를 기다리는 중이다.
“빌어먹을······ 장웨이. 이제 와서 돈이 늦어진다고?”
어젯밤.
장웨이 회장의 오른팔인 류신이 전화해서 당분간은 자금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 내 장웨이 회장에게 자금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거야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백 대령이었다.
장웨이 회장의 돈줄이 일시적으로 막힌 걸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왔다.
-돈이 없으면 정보도 없다. 알지?
김동수는 곧 자금 사정이 풀릴 거라며 선금 분에 해당하는 S급 연예인 두 명의 X-FILE을 달라고 외쳤다.
백 대령은 알겠다고 했지만 정보를 줄 때 2차 선금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협박했다.
2차 선금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다시는 자신과 연락하지 못할 줄 알라면서 말이다.
불안해진 김동수는 돈줄을 따로 찾기 위해 고심하다 결국 이기철 이사를 찾아왔다.
이기철 이사는 연예인들을 관리하는 능력은 무능했지만 오랫동안 쌓아온 인맥이 빵빵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덜컹.
철문이 열리더니 아크릴판 너머로 초췌한 모습을 한 미결수가 나타났다.
한때 굴렁쇠 엔터의 이사였던 이기철은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되어 있었다.
“1123번. 10분간 면회.”
이기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아크릴판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김동수는 속내를 감춘 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이기철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사는 무슨······ 이제 회사에서도 잘렸는데.”
“한 번 이사님은 저에게는 영원한 이사님이십니다.”
김동수는 한때 이기철을 쓰고 버리려고 했었으나 지금은 생각을 바꿔 먹었다.
자기도 최만식에게 버림을 당할지 모르는 탓이다.
그러니 무능해도 강명길이나 이기철처럼 의리를 지킨 인간들이 필요했다.
“객쩍은 소리 말고. 왜 찾아왔어? 본론만 말해.”
“실은······ 최만식 대표가 주주들이 가진 지분을 쪼개 직원들에게 나눠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감옥에 들어온 이기철에게 변호사를 빼고 면회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변호사들도 회사 소식은 말해 주지 않았기에 김동수에게서 듣는 정보가 구치소에 온 이후 첫 번째 회사 소식이었다.
순간 김동수는 자신이 정직되고 난 이후 정윤호가 회사를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며 답했다.
“최 대표가 정윤호를 막기 위해서 주주분이 가진 지분 삼 분의 일을 각출해 소속 매니저들에게 우리 사주로 나눠줄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이기철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기철이 소유한 굴렁쇠 엔터의 지분은 7%.
상장 후 지분 1%의 가치가 10억이라고만 쳐도 7%면 70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그런데 그중 삼 분의 일을 내놓아야 한다면 21억이라는 돈이 증발하게 되는 셈이다.
이기철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돈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누구 마음대로 주식을 나눠 줘?”
“최 대표가 지분으로 매니저들의 충성을 사고 나중에 뒷돈을 주고 사들여 단번에 회사를 손에 쥘 계획인 것 같습니다.”
이기철이 씩씩거린다.
“최만식 그 미친 새X. 정윤호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벌레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 사업하는 사람이 냉정을 지켜야지!”
이기철의 말에 김동수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기철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정윤호가 일으킨 파장이다.
하지만 이 머저리 같은 인간은 아직도 정윤호의 위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오늘 온 건 이기철의 도움이 필요해서였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희도 다른 줄을 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만식만 믿고 있다가 팽 당할 수도 있고요.”
“최만식을 버리자고?”
“어차피 이사님이나 저는 이용만 당하다 소각당할 신세 아닙니까? 솔직히 이사님 이렇게 들어오고 나서 최만식 그 인간이 면회 한 번 온 적 있습니까?”
“······.”
“알아보니 아직도 배우 3실의 절반은 저와 이사님이 돌아오길 바라고 있더라고요. 강 대표 라인만 솎아내면 굴렁쇠는 저희 겁니다!”
“그건 그렇지. 내가 굴렁쇠에 공을 들인 세월이 얼만데. 솔직히 굴렁쇠는 강감찬 그 인간보다 내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김동수가 연신 아부를 떤다.
“그러니까요. 물주 하나만 잘 물면 굴렁쇠를 저희가 먹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기철이 생각에 잠긴다.
“생각······ 생각할 시간을 줘.”
“오래는 못 드립니다. 상황 돌아가는 게 급합니다.”
“그 그러면 내일 다시 와. 그때까지는 결론을 내지.”
김동수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하루 동안 생각한다지만 이미 이기철은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
김동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꾹 참으며 반드시 이 수모를 돌려주겠노라 생각했다.
* * *
대학로 고시원.
고재수는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일 설악산의 암자로 가서 이태풍과 연기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참 오래 살았는데······.”
군대를 제대한 뒤.
26살에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가서 구경한 연극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하지만 연극에 빠지다 보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고재수는 28살에 공부를 포기하고 연기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길로 대학로 극단에 들어간 고재수는 곧장 재능을 드러내며 2년 만에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TK 엔터 매니저에게 눈에 띄어 스카우트 되었었다.
하지만 TK로 간 이후 단역을 전전하며 제대로 된 배역 하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음 주에 감독과 투자사 대표 앞에서 최종 컨펌만 받을 수 있다면 <지리산>의 주요 배역 ‘오명진’이 될 수 있었다.
설악산에서의 일주일.
목숨을 걸고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 이후 이 지긋지긋한 고시원에서도 탈출할 생각이었고.
그런데 그때였다.
[발신자 : 둘째 이모]
“또 이모 전화네.”
부모님 바로 옆집에 사는 둘째 이모는 늘 전화를 해서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었다.
5년 전 자신과 동갑인 첫째 아들이 칠성 전자에 합격하자 어디든 취업하라고 닦달했었다.
그리고 올해 자기 둘째 아들이 7급 공무원이 되자 이번엔 헛된 꿈을 접고 9급 공무원이라도 다시 도전하라는 잔소리를 해댔다.
계약금을 5천만 원이나 받고 이적을 했지만 아직 배역이 정해지진 않은 상태.
이모의 전화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혹여 부모님께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이 된 나머지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여보세요?”
-재수야.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이요?”
-너희 아빠. 배추밭에서 넘어져서 골반에 금이 간 것 같대.
“예?”
재수가 없다는 게 이런 말일까.
당장 내일 아침에 설악산으로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다쳤다고 한다.
‘어떻게 하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친척들의 잔소리에도 자신을 묵묵히 지원하던 아버지였으니까.
이모가 혀를 쯧쯧 차며 한 소리 더한다.
-니가 연기한다고 헛꿈이나 꾸고 있으니까 너희 아버지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저러시는 거 아니니? 그러니깐 이제 너도 다시 공무원 시험 준비나······.
“이모. 지금 아버지가 다쳤는데 그런 말을 할 때예요?”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걱정되어서 그러지. 걱정되어서!
“끊을게요!”
고재수는 급히 전화를 끊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부모님 모두 정신이 없는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내일 일정이 떠올랐다.
“아······ 미치겠네.”
TK 엔터 시절.
매니저들은 개인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굴렁쇠 엔터는 어떨지 몰랐지만 이직하자마자 설악산에 간다는 일정을 미룬다는 것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정윤호 팀장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크게 다쳤을까 걱정이 된 나머지 결국 정윤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실은 저기······ 내일 오전이 아니라 저녁때쯤 출발하면 안 될까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실은 아버지가······.”
고재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윤호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지금 아버님이 다치셨는데 일이 문젭니까? 당장 옷 차려입고 준비하고 계세요. 아버님 계신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그 순간 고재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 이적한 굴렁쇠 엔터는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