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화
38. 오디션을 보다
“유진아. 내가 보이는 대로 믿지 말라고 한 말 기억나?”
유진이가 흠칫한다.
“설마 저 선배도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쟨 특히 믿으면 안 돼. 이 판에서 박진희한테 이 갈고 있는 사람들을 뽑으면 한 트럭은 나올걸? 저 깜찍한 외모로 사람 뒤통수를 얼마나 잘 치는데.”
배역 뺏기는 기본이고 경쟁자를 흔들기 위해 남자도 뺏는 게 저 박진희니까.
“그리고 박진희에게 남자친구를 뺏긴 사람들이 대충 잡아도 20명은 넘을 거다.”
유진이는 박진희가 나간 문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렇게 안 보이는데······.”
“실화임. 하여간 조심 또 조심하라고.”
“진짜 연예계에는 믿을 놈 하나 없네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여기 전쟁터라고. 자. 우리도 나가자.”
그런데 유진이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곤 날 힐끗 쳐다본다.
“잠깐. 그러면 오빠도 믿지 마요?”
“난 제외. 나 빼고 다 믿지 마.”
“어디서 많이 들은 대사 같긴 한데······ 일단 넘어가 드릴게요.”
유진이의 눈빛에 왠지 뜨끔했지만 난 안색 하나 안 바꾸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우가 매니저를 안 믿으면 누굴 믿냐? 그치?”
“네네.”
“어? 안 믿네?”
“믿는다니까요?”
“또 건성으로 대답하는 듯?”
“소녀 매니저 오라버니를 진심으로 믿사옵니다! 소녀의 진심을 믿어 주시옵소서!”
유진이가 두 손을 이마에 대고 큰절하듯 살짝 허리를 굽힌다.
마치 사극에서나 본 듯한 행동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열연한 정성을 봐서 넘어가 준다 내가.
* * *
오디션장으로 나가니 가로세로 30m의 오디션 무대의 한편엔 촬영용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었다.
그 곁으론 스태프들이 자리해 현장을 이끌고 있었고.
“박진희 씨? 정유진 씨?”
앉아서 대기하던 박진희와 유진이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블루드래곤의 대표 조응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지껄였다.
“실물이 낫네요. 둘 다.”
조응구의 양옆으로는 제작실장인 차수연과 강수훈 PD 김솔잎 작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심사석에 앉은 마지막 한 명이 너무 거물이다.
SBC 방송국의 정삼룡 CP.
저 정도 직급의 사람이 이 현장엔 왜 온 거지?
정삼룡 CP는 지난 5년간 20%를 넘는 드라마 3편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종편 스카우터들이 군침을 흘리는 1순위 제작자다.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 CP랄까.
그런데 거액의 스카웃 제의를 마다하고 공중파에 남은 이유도 차기 SBC 드라마국 국장 자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삼룡 CP가 외주 제작 드라마의 조연 오디션에 온 것은 초등학교 입학식에 교육감이 직접 온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드라마 편성이 갑작스레 잡혀 오디션을 준비할 기간이 빡빡했네요. 박진희 씨 정유진 씨 두 분 모두 양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차수연 제작 실장의 설명에 박진희가 생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차수연 실장과 박진희가 눈빛을 교환하는 게 심상치 않다.
귓속말을 주고받는 차수연 실장과 조응구 대표를 보니 두 사람이 박진희를 밀고 있는 눈치다.
김솔잎 작가는 그 틈에 날 보며 ‘나도 몰랐어요’라고 입을 뻐끔대고 있었다.
하긴 알았으면 미리 연락을 줬겠지.
나 역시 그녈 보며 ‘괜찮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제작사가 말을 번복한 건 김솔잎 작가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작가가 이지연 정도의 거물이었다면 작가가 추천한 자리에 다른 배우를 꽂을 생각도 못 했을 거다.
하지만 신인 작가에게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허무하게 밀릴 마음은 없었다.
“자 김노을 역은 김솔잎 작가님이 꽤 공들인 캐릭터예요. 두 분 대본은 숙지하셨죠?”
차수연 제작 실장의 이어진 말에 박진희가 낭랑하게 답했다.
“네. 실장님!”
“진희 씨는 에너지가 넘쳐서 보기 참 좋아요.”
“감사합니다.”
박진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사석에 폴더 인사를 했다.
웃어야 할 타이밍 인사할 타이밍도 보통이 아니다.
과연 아역으로 데뷔해 이 업계에 17년을 을 버틴 베테랑다웠다.
“그러면 오디션은······ 일단 진희 씨부터 볼까요?”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먼저 하세요. 선배님.”
박진희는 사양하지 않겠다며 오디션 무대로 올랐다.
“자. 그럼 씬 12부터 볼까요?”
강수훈 PD의 싸인과 함께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 * *
<파란 하늘>의 씬 12.
학교에 다녀온 김노을이 집으로 오자마자 교복을 벗어 던지고 ‘하늘 돼지갈비’ 집의 알바생으로 변신한다.
김노을이라는 캐릭터를 시청자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장면이기에 생기발랄한 여고생의 느낌을 내는 게 관건이다.
『다녀왔습니다~아!』
큰 목소리로 연기를 시작한 박진희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가게 문을 여는 듯 팔을 저었다.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행동에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역부터 다져온 연기력이 있다 보니 표정이 나쁘지 않다.
발성도 좋은 편이고.
문을 열고 들어온 박진희의 다음 연기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제법 맛깔나는 연기가 이어졌다.
박진희는 대부분의 아역이 그렇듯 성인이 된 후 긴 슬럼프를 겪었었다.
하지만 지금 팔을 걷어붙이고 식사를 마친 손님상을 힘차게 정리하는 연기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역으로 바쁘게 살아온 터라 알바 한 번 안 해 봤을 텐데?
의아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옮기자 심사위원석에서는 제작실장인 차수연이 정삼룡 CP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박진희의 연기가 훌륭하지 않냐며 바람을 넣고 있었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디션 볼 씬이······ 샜구나.’
그것 말고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박진희의 연기가 이어질수록 심사석의 반응이 뜨거워졌다.
“괜찮은 것 같지?”
“네. 역시 아역부터 다져온 연기력은 어디 안 가네요.”
“근데 알바라도 따로 했나? 연기가 어색하지 않은데?”
“쟤 금수저 아니었어?”
심사위원석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데도 들을 수가 있었다.
씬 12가 끝날 무렵 연출자인 강수훈 PD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중단시켰다.
“수고했습니다. 잠깐 쉬었다 가시죠.”
꽤 인상적인 연기를 마무리 지은 박진희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엔 우리 차례다.
화장실을 다녀온 심사위원들이 다시 착석했다.
“그럼 이번엔 정유진 씨 연기를 한번 볼까요.”
차수연 제작 실장의 지시에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위원들을 향해 폴더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정유진입니다.”
마치 아이돌처럼 90도로 팍팍 숙인 허리를 보고 블루드래곤의 대표가 웃음을 터트렸다.
곁에 있던 정삼룡 CP도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진 씨. 지금 출연 중인 드라마는 잘 보고 있어요. 그런데 종영이 언제였지?”
“14일입니다. CP님.”
“MBS는 땡잡았네. 2화나 연장받고. 이지연 작가가 어쩐 일로 그렇게 선심을 쓰셨을까?”
정삼룡 CP는 곁에 있는 김솔잎 작가를 보며 물었다.
“김 작가. ‘아침이 간다’ 23화 시청률은 몇 %였지?”
“23.8%예요.”
정삼룡 CP가 감탄한다.
“하여간 이지연 작가는 재주도 좋아. 근데 우리 김 작가도 그 정도는 칠 수 있잖아. 안 그래?”
은근슬쩍 칭찬을 빙자한 압박에도 김솔잎 작가는 웃음으로 대꾸했다.
“CP님이 제대로 푸쉬만 해 주시면 못 할 것도 없죠.”
“푸하하. 광고 빵빵하게 넣어달라 이거지?”
정삼룡 CP는 못 이기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긴 이지연 작가를 따라 방송국에 드나든 지 5년.
작가로서는 입봉이라지만 방송국 사정을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다.
“그래 그럼. 우리도 역대급 시청률 한번 뽑아보자고.”
심사석에 있는 가장 높은 사람은 조응구 블루드래곤 대표도 아니고 저 CP다.
편성권을 가지고 있는 방송국 인물이 갑 중 갑이니까.
유진이가 연기할 장면은 씬 13.
정삼룡 CP의 고 사인에 강수훈 PD가 오디션 시작을 알렸다.
방금까지 박진희가 선보였던 씬 12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카메라의 붉은 REC 불이 들어오자 유진이가 대사는 읊지 않고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아! 역시 고기님! 향기마저 은혜로우시다니까?』
유진이는 두 손을 한데 모으고 몽롱한 표정으로 대사를 읊었다.
무슨 소고기교란 신흥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처럼 보였다.
유진이는 대사를 읊는 와중에도 연신 코를 벌름거렸다.
킁킁.
숯불에 달궈진 고기 냄새를 모두 빨아들일 기세다.
심지어 손부채까지 부쳐가며 고기 굽는 냄새를 흡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이라이트.
『켁켁켁! 엄마! 나 사이다! 사이다! 나 가스 마셨어!』
목을 부여잡고 혼비백산 뛰어다니던 유진이는 엄마에게 등짝을 맞는 장면까지 연기했다.
『엄마. 딸 숨넘어가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사이다 줘! 아야! 왜 때려!』
등짝을 만지는 유진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유진이는 그 눈물 한 방울로 순식간에 심사석의 높으신 분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오늘 저녁은 명륜 사또 갈비로 할까요?”
“그러게요. 유진 씨 연기를 보니까 저도 고기가 확 끌리네요.”
“근데 정유진 씨 연기가 저렇게 좋았나?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보일 연기가 아닌 것 같은데?”
“이제까지 보여준 연기가 운이 아니었네요.”
유진이의 연기는 박진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침을 하면 침이 튀고 연기도 없는데 눈은 충혈되어 눈물을 흘리고 군침을 삼키는 연기에서는 심사석의 사람들까지 시장하게 만들 정도다.
갓 데뷔한 유진이가 17년 경력의 박진희를 이렇게 발라 버리더니!
잘한다 정유진!
“커트! 수고했어요!”
강수훈 PD의 컷 사인에 심사석 모두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차수연 제작 실장의 표정이 제일 심상치 않다.
‘저 여자가 제일 많이 받아먹었나 보네.’
조응구 대표도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적당히 받아먹었고.
강수훈 PD는 안 먹은 것 같다.
하지만 로비도 적당해야 통하는 거지 이 정도 실력 차이라면 먹힐 거리가 없다.
겨우 정신줄을 챙긴 차수연 제작 실장이 오디션 속행을 지시했다.
“흠흠. 두 분 다 잘하시네요. 그러면 계속 이어서 씬 25와 35까지 볼까요?”
“그 그래. 한 씬만 보고 판단하기는 이르니 좀 더 보자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는 차수연 제작 실장의 제의에 조응구 대표가 급히 맞장구를 쳤다.
정삼룡 CP가 수상하게 보는 걸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한 모양이다.
그렇게 두 번씩의 오디션이 더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답이 나온 상황.
이미 반쯤 멘탈이 나간 박진희는 우황청심환 덕분인지 명경지수의 연기를 펼치는 유진이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 실패했다.
차수연 제작 실장과 조응구 대표는 갈수록 좌불안석이고.
그렇게 네 번째 씬 연기를 보려고 할 때였다.
“잠깐.”
정삼룡 CP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진희 씨 유진 씨. 두 사람은 잠깐 밖에서 대기해 줄래요? 매니저들이 데리고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요.”
“예. 정 CP님.”
나는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잔뜩 화가 난 정삼룡 CP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 * *
달칵.
매니저와 배우들이 나가고 정삼룡 CP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차 실장. 장난해?”
짜증 가득한 그 말 한마디에 스태프들이 얼어붙어 버렸다.
“조 대표. 나 병신으로 보는 거 맞지? 이거?”
“아 아닙니다. CP님. 그거 다 오해······”
“오해? 내가 당신들 장난치는 걸 모를까 봐?”
“그 그게······”
“이봐. 조 대표. 박진희 쟤 에이스에서 왔지?”
“예.”
“조 대표 차 실장 둘이서 에이스 돈 받아먹었을 거고.”
대놓고 정곡을 찌르자 두 사람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기획사 돈 받아먹고 제작사 살림에 보태는 거까지는 내가 뭐라 안 해. 근데 이거 뭐야? 돈 받았다고 무조건 쟤 붙이려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CP님.”
“그럼 뭐?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봐야 하는데? 여기 김 작가가 판 엎어야지 끝날 거야? 어? 기회 주는 것만으로 할 만큼은 한 거 아냐?”
“······그······ 그게 아니라.”
블루드래곤의 스태프들이 어쩔 줄 몰라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김 작가가 작가 추천한 역이라며! 장난하냐? 나랑? 내가 여기까지 왔으면 한두 번에서 끊어야 할 거 아냐!”
조응구 대표와 차수연 실장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삼룡 CP는 눈을 부라리며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