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5화
375. 균열
7층 회의실.
테이블 한쪽에는 조민성 배우가 환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방상영 이사가 죽상을 하고 앉아 있다.
맞은편에는 강감찬 대표와 강지영 본부장이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은 내가 회귀한 이후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 팀장. 어서 와서 앉아요.”
조민성 배우가 날 보며 손을 흔들었다.
“계약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하.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보네요.”
덕담을 주고받고 자리에 앉았다.
강감찬 대표가 흐뭇하게 웃으며 날 쳐다본다.
“정 팀장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우리 조민성 배우가 정 팀장과 함께 일해보고 싶어 한다는데. 어때? 할 수 있겠나?”
예상했던 대로 정 팀으로 관리 부서를 옮기는 게 이 자리의 주제였다.
“저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조민성 배우님을 돕는 일이 곧 굴렁쇠 엔터를 더 키우는 일 아니겠습니까?”
조민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저도 정 팀 소속으로 케어를 받았으면 합니다.”
조민성이 올리는 매출은 혼자서 연간 200억 정도.
그가 정 팀으로 오게 되는 순간 정 팀이 회사의 모든 부서 중에서 최고의 매출을 달성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방상영 이사의 폰이 울렸다.
“전화는 진동으로 해놓지 않고. 사람하고는.”
강감찬 대표의 질책에 방상영 이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전화를 받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방상영 이사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진다.
“예. 최 대표님. 7층입니다!”
최 대표라면 설마?
전화를 끊은 방상영 이사가 힘찬 목소리로 답한다.
“대표님. 지금 최만식 대표가 주주님들 의견을 모아 왔다고 합니다.”
어쩐지 쉽게 간다고 했다.
조민성이 굴렁쇠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주는 배우가 아니다.
굴렁쇠 엔터의 간판 배우.
그가 가는 곳이 곧 굴렁쇠를 대표하는 곳으로 거듭난다.
그걸 막기 위해 최만식 대표가 나타났다.
잠시 후.
회의실에 도착한 최만식 대표는 곧바로 딴지를 건다.
“죄송하지만 조민성 배우의 관리 부서 변경은 유예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최은태 대주주님 또한 동의하신 일입니다.”
최만식 대표는 현재 최은태 회장과 강감찬 대표와 내가 한 편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당당히 최은태 회장의 이름을 팔고 있다.
강감찬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최 대표. 갑작스레 나타나서 이러는 건 경우가 아니지. 그리고 회사의 대표는 나야. 인사권은 나한테 있으니까 잔말 말아!”
“대표님의 인사권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딱 3개월! 3개월만 소속 변경을 미뤄주셨으면 합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3개월?”
“예. 정 팀장이 실장을 달고 나서 관리팀을 바꿔야 방상영 이사도 최소한의 체면은 살지 않겠습니까? 남아 있는 배우 1실 직원들의 사기도 마찬가지고요.”
강요도 아닌 부탁이지만 거절하기에는 어려웠다.
3년도 아니라 고작 3개월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최만식 대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짧지만 시간을 벌고 그사이에 어떻게든 조민성을 붙잡으려는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만식 대표는 조민성을 달래기 시작했다.
“민성 씨.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3개월 정도만 기다려 달라는 겁니다. 어차피 내년 초까지도 스케줄 다 잡혀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정 팀장의 도움을 받아요. 대신 관리팀 변경은 3개월 정도 뒤에 합시다. 배우 1실에 최 실장이 자리 잡기도 전에 이렇게 가버리면 최 실장이 어떻게 부서 관리를 하겠어요?”
이제 막 1실장이 된 최은석 실장은 오랫동안 조민성의 뒤를 봐왔었다.
그 인연을 언급하며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제법 머리 썼는데 최만식 대표.’
이렇게 되면 조민성으로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조민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3개월입니다. 그때 가서 두말하지 마세요.”
“당연하죠!”
최만식 대표는 이번엔 날 쳐다본다.
“정 팀장도 문제없지?”
“그렇게 하시죠.”
강감찬 대표가 왜 싸우지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하지만 지금은 조민성의 의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탑스타란 천하에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
혹여 내가 여기서 그의 뜻을 막았다간 오히려 역풍이 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냥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생각대로는 안 될 겁니다. 최만식 대표.’
조민성이 허락하자 최만식 대표는 박수를 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대표님. 대충 결정이 난 것 같은데 여기 정 팀장 좀 잠깐 빌려도 되겠습니까?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
허락이 떨어지자 최만식 대표는 방상영 이사의 방으로 가자고 한다.
단둘이만 말이다.
* * *
주인 없는 방상영 이사의 방.
최만식 대표는 상석에 앉아 테이블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참 바쁘게 사는군?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자네 이름부터 튀어나오더라고?”
“열심히 살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열심이라······ 두 번 열심히 하다가는 회사 다 잡아먹겠군.”
말에 뼈가 있다.
그러나 꼭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로 조민성을 흔들고 배우 3실의 A급 이상 배우들을 끌어들이는 중이니까.
“그보다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최만식 대표가 날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자넨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날뛰어? 혹시 강은기 쪽 식구들이 자네 뒤를 봐주기라도 하나? 둘이 친구라며?”
강은기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낼 뻔했다.
강은기를 죽이려 해놓고 내 앞에서 감히 그 이름을 거론하다니.
하지만 난 감정을 애써 눌렀다.
“리버스 엔터에서 절 돕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어차피 어릴 적 동생들인데요.”
강은기가 내 뒷배라는 걸 확신했는지 최만식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 그놈들 믿고 설치는 건 좀 자제하는 게 좋을 거야. 강은기 그 친구 병원에서 습격당해서 한번 죽을 뻔했다던데. 그런 일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안 그래?”
강은기를 해치우고 나면 내가 기댈 곳이 없을 거라는 뜻.
어차피 날 겁박하려고 부른 걸 알고 있었기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해 봐. 사람이 오래 가려면 신중해야지.”
하지만 나 역시 순순히 따라온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김동수 실장 근황은 아십니까?”
최만식이 고개를 갸웃한다.
“정직된 김 실장 이야기는 왜 꺼내?”
진짜 모르는군.
그렇다면 의심의 씨앗 하나를 심어줘야겠다.
“김 실장님이 최 대표님이 아닌 다른 줄을 탔다는 소문이 돌던데 못 들으셨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직접 사람들을 움직여 조사해 본 결과.
최만식 대표는 김동수를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즉 김동수가 장웨이 회장과 손잡고 백 대령을 만난 것 자체가 독단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지 최만식 대표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한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수작이라니요?”
“내가 그런 모함을 믿을 것 같아?”
“어차피 확인해 보시면 알 일인데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최만식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의심의 씨앗을 심어 놓는 데 성공했다.
이이제이(以夷伐夷).
이제부터는 김동수가 변명을 늘어놓아도 의심 많은 최만식의 성격에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다.
난 서로가 박 터지게 싸우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말씀 없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문을 나서려는 순간 최만식 대표가 날 노려본다.
“정 팀장. 한 가지만 경고하지.”
“말씀하십시오.”
“봐주는 것도 한계라는 게 있어. 몸 사려.”
김동수도 그렇지만 최만식 대표와도 함께 갈 수는 없다.
내가 그리는 세상에는 그 두 사람만큼은 끼어들 틈이 없었으니까.
“깊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답변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온 뒤 곧바로 이영진을 시켜 굴렁쇠 엔터 전체에 소문을 퍼트렸다.
조민성이 내년 정 팀으로 오는 게 확정되었다고.
사람들은 흔히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난 조민성이 3개월 뒤에 정 팀으로 온다는 말 대신 다른 말로 굴렁쇠 엔터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굴렁쇠 엔터의 배우들과 매니저들의 팀 변경 문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3개월 후라는 단서가 있긴 했지만 조민성이 온다는 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굴렁쇠 엔터의 실세라는 걸 사내의 모두에게 인식시킨 순간이었다.
* * *
배우 3실.
간판스타 조민성이 곧 정 팀으로 옮긴다는 소문이 돌자 매니저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야. 이러다가 전부 정 팀이 다 먹는 거 아냐?”
“방 이사님은 대체 뭐 하신대? 계속 구경만 하실 셈인가?”
“하여간 지금 1실 걱정할 때가 아냐. 우리 3실 배우들도 정 팀으로 넘어갈까 고민하는 눈치더라고.”
“안 그래도 성한영 배우가 정 팀으로 넘어가려고 간 본다는 소문이 돌던데?”
“야! 한영이 형이랑 나랑 4년을 같이 했는데 나도 모르는 걸 니가 어떻게 알아?”
그때 최만식이 나타났다.
“등신 같은 새X들. 정 팀장 한 명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최만식의 질책에 모두가 다급히 입을 닫아 버렸다.
서예종 출신이 대다수인 배우 3실이다 보니 3실에서만은 최만식 대표가 강감찬 대표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정윤호 그놈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다들 하던 일이나 잘해! 엉뚱한 생각들 하지 말고!”
“예!”
최만식이 직접 나서서 서예종 주주들은 공개적으로 이 일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이미 정윤호가 던진 미끼를 문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최만식이 움직일 정도로 주주들이 다급하다는 건 정윤호의 힘이 그만큼 커졌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이다.
매니저들이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자 최만식은 주호성을 찾았다.
주호성이 냉큼 달려와 최만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따라 들어와.”
최만식은 김동수 실장의 방으로 향했다.
쿵.
문이 닫힌 뒤 최만식이 상석 소파에 앉았다.
“보고해!”
잠시 망설이던 주호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배우 3실의 배우와 매니저들 10% 정도가 이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군.”
“하지만 A급 이상 배우들을 기준으로 하면 30%가 이탈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 매니저들도 함께요.”
최만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너 대체 배우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동수가 없을 땐 너라도 제대로 해 줘야 할 거 아냐!”
“정 팀장이 너무 빠르게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나마 방 이사님이 빠르게 대응하셔서 이 정돕니다. 자칫했으면 절반 이상이 날아갔을 겁니다.”
예상외의 타격이다.
최만식이 지끈대는 머리를 붙들고 물었다.
“그러면 넌 배우 3실 어느 정도로 장악했어?”
주호성이 침을 꼴딱 삼킨다.
“3실 소속 배우들 절반 정도는 포섭했습니다만······ 나머지가 의외로 안 넘어옵니다. 김 실장이 따로 뭔가 손을 써둔 모양입니다.”
최만식은 늘 김동수가 부족하다 실망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김동수가 있었기에 정윤호가 미쳐 날뛰는 걸 이만큼이나 제어한 것이었다.
이대로 두면.
김동수가 돌아오기 전 굴렁쇠 엔터에 관한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결국 최만식은 과감한 수를 두기 시작했다.
“주 팀장. 조만간 제작비 100억짜리 영화 세 편이 미래 상상 저축은행 투자로 제작된다고 발표할 거야. A급 이상 배우들은 거기 주요 배역으로 넣어 준다고 하고 잡아봐.”
주호성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호전시키기에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주호성이 어려움을 토로하자 최만식이 답한다.
“알았어. 그러면 이참에 인수할 만한 회사를 좀 물색해 봐. 단 서예종이 출신이 많은 회사로.”
점점 커지는 정윤호를 누르기 위해서는 새롭게 판을 짜야겠다고 생각한 최만식이다.
회사 하나를 통으로 인수해 서예종 라인에 줄을 서게 만드는 방식으로.
정윤호가 가져간 추를 바로 잡으려면 이 정도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새롭게 들어온 인원들을 관리할 사람이 마땅치가 않았다.
‘결국 김동수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김동수가 없다면 엔터 쪽을 관리할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주호성의 경력은 여전히 부족하고 방상영 이사는 온전히 이쪽 사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정윤호가 심어 놓은 씨앗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최만식은 혹시나 하고 주호성에게 물었다.
“주 팀장. 김 실장이 다른 뒷배를 가졌다는 소문이 있는데 혹시 뭐 아는 거 없나?”
“예? 누가 그딴 말을······.”
“정 팀장이 그러더라고.”
주호성이 발끈한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안 믿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들은 게 있나 싶어서.”
“없습니다. 김 실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러겠습니까?”
‘미쳤을 수도 있지.’
최만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하여간 그래도 잘 감시해. 네 자리를 지키고 싶으면.”
“예. 물론입니다.”
지시를 내린 최만식은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내밀었다.
“오늘 애들 데리고 회식이나 좀 해. 이럴 때일수록 사람 관리를 확실히 해야지.”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
통 큰 최만식의 씀씀이에 주호성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최만식은 이만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주호성은 허리를 반으로 접은 뒤 문을 닫고 나섰다.
쿵.
문이 닫힌 순간 최만식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빌어······먹을······ 뭐가 이리 꼬여?”
최만식은 마치 늪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손을 댄 모든 사업 중.
이 엔터 사업만큼은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속내를 훤히 읽고 막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가진 사업체 중 가장 빠른 성장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거위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최만식은 한숨을 내쉰 뒤 김동수의 명패로 고개를 돌렸다.
“날 배신한 거라면 넌 죽는다. 김동수.”
정윤호가 심어 놓은 의심의 씨앗이 점점 더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