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화
37. 기회가 위기다
똑똑.
“대표님. 윤홉니다.”
“어. 들어와.”
대표이사실로 들어가자 강감찬 대표의 칭찬이 이어졌다.
“수고했다. 네 덕에 큰 사고를 막았다.”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강감찬 대표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피해자가 될 뻔했던 신인 여배우는 사진을 내더라도 모자이크를 확실히 하기로 협상도 마쳤다고 한다.
물론 최준우는 최고 형량을 받을 거라는 확답도 들었고.
더군다나 경찰과 검찰 쪽에서는 내 신분을 묻지 않을 거라며 재차 약속을 해줬다고 한다.
“아 그리고 이거부터 줘야지.”
“예?”
강감찬 대표는 새하얀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봉투를 받고 어리둥절해 있으니 강감찬 대표가 말했다.
“뭐 해? 확인 안 하고. 확인해야 나도 생색을 내지.”
강감찬 대표가 대표이사실에서 내게 건넨 건 100만 원짜리 수표였다.
그것도 무려 하나 둘 셋.
3백만 원?
“이게 뭡니까?”
“연말 보너스. 최준우 건 때문에 회사에도 큰 도움이 됐다. 네 승진 발령에 구시렁거리던 놈들도 입이 쏙 들어갔고.”
최준우로 인해 작품이 망할 뻔한 걸 막아준 덕에 이지연 작가에게 차기작에 두 명을 꽂아 넣어준다는 확답을 받았단다.
그러니 계산은 확실히 하자고 한다.
‘이런 스타일 너무 좋잖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봉투를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강감찬 대표가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늘 하는 이야긴데······.”
하지만 난 이다음 나와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설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그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빠른 내 대답에 강감찬 대표가 히죽 웃었다.
“아니 무대에 서도 막이 내릴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무대에 설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건 강감찬 대표의 말버릇이다.
거기에 감화를 받은 내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처음.
그다음 단계의 이야기를 들었다.
막이 내릴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죽어라 일만 하라는 말씀이시네요.”
강감찬 대표가 씩하고 웃는다.
“하하. 해석은 각자의 몫이지.”
그런데 그 순간 강감찬 대표가 입고 있는 옷이 이틀 전과 같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셔츠의 칼라와 손목에 떼가 꼬질꼬질하게 낀 걸 보니 아예 집에 안 들어간 것 같다.
이렇게 무리해서 일하니 뇌졸중이란 병을 앓은 걸 거고.
잠깐 고민하던 난 강감찬 대표의 건강 문제를 꺼내 들었다.
“대표님. 혹시 건강검진은 언제 받아 보셨습니까?”
“건강검진? 왜? 내가 기운이 없어 보이냐?”
강감찬 대표가 셔츠를 걷어 알통을 내보이며 육체미를 자랑했다.
나이가 60인데도 나보다 더 근육이 선명히 돋보인다.
얼굴만 아니면 UFC 현역 선수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난 우려를 담아 말했다.
“검진은 꼭 정기적으로 받아 보셔야 합니다. 루이스의 김 사장님과 디딤돌의 대표님도 건강 악화로 경영에 신경을 못 쓰고 그러는 동안 회사가 엉망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간곡한 내 어투에 강감찬 대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회귀 전엔 난 상사를 불편하게 하거나 대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김동수의 뒤처리를 하는 동안에도 투덜거리기만 했지 어떤 싫은 일도 견뎌냈으니까.
하지만 죽었다 새 삶을 얻었는데 죽기 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었다.
잔소리를 듣더라도.
욕을 듣더라도.
옳은 길로 가야지.
강감찬 대표에게서 쏟아질 호통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는 날 혼내지 않았다.
“······거참. 내가 늙긴 늙었나 보네. 고작 하룻밤 샜는데 어린놈에게 이런 걱정이나 듣고.”
눈을 뜨자 강감찬 대표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린 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허리를 꾸벅 숙이자 강감찬 대표가 곁으로 다가와 날 일으켰다.
“널 나무라는 게 아니니 함부로 허리 숙이지 마라. 자꾸 숙이다 보면 그것도 습관 되더라.”
“매니저 허리는 부드러울수록 좋다고 하시더니······.”
따뜻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강감찬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니가 볼 때 내가 많이 힘들어 보이냐?”
“예······.”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잔뜩 껴서 꼭 판다 같다.
연일 이어지는 술 접대에 잠은 사우나에서 대충 때우는 습관 때문이겠지.
한참을 뭔가 생각하던 강감찬 대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강지영 본부장도 검진받으러 가자며 연일 성화다.”
“그러시면······.”
“오냐. 새해 전 사원 검진 땐 나도 가서 받으마. 됐냐?”
나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하직원의 충정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충정은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이쯤 하자. 그리고 요즘 너 보면 나 젊었을 때 생각 많이 나서 보기 좋더라. 힘도 나고.”
“아닙니다. 대표님이나 실장님들이 제게 기회를 많이 주셔서 가능했습니다.”
공을 주변 사람에게 돌렸다.
그러자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기회를 준다고 다 성공한다더냐? 이번 유진이 광고 건은 솔직히 나라도 그 정도는 못 했을 거다. 정말 잘했다.”
강감찬 대표의 칭찬에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회귀 전 난 그에게 이런 칭찬 한 번 받아 본 적 없었다.
오로지 ‘열심히 한다’는 말밖에는.
그 이후로도 강감찬 대표는 내가 한 일을 하나씩 칭찬해댔다.
그런 그의 눈에는 애틋한 정이 묻어 나왔다.
“하여간 지금처럼만 해라.”
“예! 앞으로도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열심히만 해. 죽을힘까지 다할 필요는 없고.”
하긴 죽을힘을 다해 살다가 진짜 죽었지.
이번 생은 죽지 않을 만큼만 해야겠다.
“그보다 내가 유진이와 통화를 했는데······”
날 보는 강감찬 대표의 표정이 잠깐 이상해지더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예?”
“알았다며? 미소가 유진이 딸이라는 거.”
어차피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를 직접 거론해 주다니 차라리 잘된 일.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가스 누출사고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미소의 가족 관계를 물어보길래 그걸 처리하다 알게 되었습니다.”
일문일답.
강감찬 대표의 질문을 차근차근 대답하다 보니 강감찬 대표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너 그때도 사고 현장에 있었구나. 도대체 사고만 몇 번이냐? 올해 액땜을 제대로 하려나 보다.”
이렇게 강감찬 대표와 나 유진이 세 사람은 하나의 비밀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됐다.
“잘 지켜줘라. 아픔이 많은 아이다.”
“예.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미소가 유진이의 딸이라는 건 홍보팀을 통해서 제대로 알릴 테니 너무 걱정도 말고.”
유진이가 인기를 얻으면 터져 나 올 쓰레기 기사를 걱정하는 내 심정을 안 눈치다.
“예. 대표님.”
고개를 숙였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기레기를 상대하는 것만큼은 강감찬 대표보다 내가 훨씬 더 나으니까.
* * *
김동수 실장의 방.
소파에 앉은 주영인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우리 실장님 새로운 배우들 영입하느라 난 관심도 없나 봐요?”
주영인의 가시 돋친 말투에 김동수가 대경실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왜? 강 팀장이 섭섭하게 대하기라도 해? 신작 드라마 주연도 확정됐다면서?”
최근 주영인은 SBC의 신작 드라마 <바람 구름 달>의 여주인공으로 최종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괜히 강 팀장 타령은······”
주연을 낙점받은 배우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시큰둥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되묻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들려왔다.
“나. 그 드라마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작품이 끌리는데 어떻게 하죠?”
김동수가 당황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야! 힘들게 오디션까지 봐서 주연을 딴지 얼마나 됐다고!”
순간 주영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김동수는 아차 싶었다.
주영인은 한번 삐지면 몇 날 며칠이고 말을 안 해버리니까.
“미 미안. 그러면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나 들어보고 결정하자.”
잠시 망설이던 주영인이 입을 열었다.
“파란 하늘.”
김동수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몰라 재차 물었다.
“뭐라고?”
“파란 하늘요. 이번에 정유진 걔가 들어간다는 작품 몰라요?”
“그건 안 돼!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이잖아!”
김동수는 당혹감을 감추고 주영인을 설득했다.
이미 주연을 낙점받은 <바람 구름 달>을 버리고 일개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니.
“영인아. 너 한동안 안 그러다가 왜 또 이러니. 차라리 다른 유명작가 작품으로 골라 봐. 니가 원하는 대로 꽂아 줄 테니까.”
주영인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시나리오 좀 보라니까.”
“내가 그런 걸 왜 봐?”
“답답하긴! 시나리오가 좋단 말이에요!”
주영인의 짜증에도 김동수는 그저 두 눈만 꿈뻑일 뿐이었다.
김동수는 작품 고르는 선구안에는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승승장구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유명배우 유명감독 유명작가.
매니저는 그런 이들과의 인맥만 잘 유지해도 높은 타율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김동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주영인을 이리저리 살폈다.
드라마는 작가놀음이라지만 대본만 좋다고 함부로 따 놓은 주연 자리를 내팽개칠 주영인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다야?”
주영인이 코웃음을 친다.
“그것까진 알 것 없고. 그냥 이번에는 나 믿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주세요. 나 촉 좋은 거 알잖아요.”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숙인 건 김동수였다.
“알았다. 담당 PD한테는 잘 말해서 오디션 신청해 둘게. 큰소리를 쳤으니 꼭 주연 따내고.”
“나 누군지 몰라요?”
주영인이 오만한 표정을 본 김동수의 안색이 풀렸다.
“그래. 내 배우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암.”
하지만 주영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김동수 이 사람은 안 되겠어. 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해.’
그 순간 주영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정윤호. 그 사람은 김동수와는 달리 작품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던데······’
직급이 낮으면 어떤가.
어차피 매니저의 직급은 담당 스타의 인기에 비례한다.
‘능력만 좋으면 직급이 무슨 상관이람?’
주영인의 입가로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 * *
정신없이 바쁜 일주일이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디딤돌과 루이스 엔터의 부도 때문에 업계 전체에 여파가 휘몰아 닥쳤다.
두 회사의 매니저들과 배우들은 회사를 옮기는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현장에 지각하기가 일 수였다.
덕분에 PD들이 온갖 짜증을 부려댔다.
현장 업무를 보는 매니저들도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흘렸다.
난 그 여파에서는 잠깐 벗어나 있었지만 유진이의 오디션 준비 때문에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020년 1월 7일.
<파란 하늘>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
끼이익.
강북의 블루드래곤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제작 스튜디오를 가진 블루드래곤의 건물은 흡사 방송국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여기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유진이와 나는 주차장으로 마중 나온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오디션 대기실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 평소대로만 하면 무조건 붙을 테니까. 겁먹지 말고.”
“안 쫄아요. 우황청심환 먹고 왔거든요.”
“그래?”
우황의 약발이 돌아서 그런지 유진이의 표정은 마치 해탈하기 직전의 티베트 토끼 같다.
명경지수 무념무상 뭐 그런 거?
처음부터 작가 추천이라는 건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 탓에 유진이는 그냥 오디션을 보는 줄 아는 상태다.
[오디션 대기실]
스튜디오에 마련된 대기실에 들어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여배우 한 명이 미리 와 대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박진희.
회귀 전 원래 노을이 배역을 맡아 한 1년 반짝 전성기를 누린 아역 출신의 배우다.
‘쟤가 왜 여기에 있지?’
노을이 배역은 작가 추천으로 유진이로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들었었는데 얘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박진희라고 해요.”
유진이와 박진희의 눈이 마주치자 저쪽에서 먼저 웃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박진희는 계란형 얼굴에 커다란 눈 인형 같은 외모로 오랫동안 안방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아역 배우 출신이다.
하지만 귀요미 외모와 달리 그녀의 성격은 까칠하고 예민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 인사를 받았다.
“아! 먼저 인사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박진희 선배님. 정유진입니다.”
“아니에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나보다 언니잖아요.”
“까마득한 선배님이신데 제가 어떻게 감히······”
박진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뭐 편한 대로 하세요. 나도 편한 대로 할게요. 그런데 언니. 저도 드라마 봤어요. 연기 잘하시던데요?”
박진희가 유진이의 연기를 칭찬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친목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건 박진희가 유진이를 경계한다는 뜻이다.
“아 아녜요. 첫 작품이라 그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거예요.”
“에이. 너무 겸손하시다. 하여간 우리 오늘 잘 해봐요.”
“예. 선배님.”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박진희가 두 손으로 깜찍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곤 오디션장으로 먼저 이동했다.
박진희가 나가자 유진이가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연예계에 괜찮은 사람도 있네요. 제 또래들은 하나같이 까칠한 사람들만 봤는데. 저 선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어이가 없었다.
박진희가?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