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8화
368. 조민성 2
배우 1실의 회의실.
유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민성 배우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방상영 이사 그리고 왼쪽은 배우 1실장이 된 최은석 실장이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굳은 표정의 조민성이 먼저 말을 꺼낸다.
“시간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광고비를 더 받게 해준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난 숨도 돌리지 못하고 대답했다.
“박 이사님이 광고비를 깎으려고 조 배우님이랑 우리 태풍이를 일부러 경쟁시킨 겁니다. 이대로 가시면 상대방한테 놀아나는 겁니다.”
어처구니없었는지 조민성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 순간 방상영 이사가 날 몰아세웠다.
“정 팀장! 이야기 다 끝났는데 왜 이리 질척거려? 어제까지만 해도 HY 광고는 양보 못 하겠다고 거부했다며?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이야?”
난 방상영 이사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거절 한 번 했다고 수작질이라뇨!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한번 튕기지도 않고 냉큼 받아들였다면 태풍이 체면이 뭐가 됩니까?”
이태풍도 이제 ‘천만 배우’이자 S급 주연 배우였다.
내 배우 체면을 지키려 했다는 말에 그제야 조민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가 가긴 하네요. 하지만 그거야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저를 돕겠다고 나선 이유가 뭡니까? 난 그쪽 배우도 아닌데?”
“말씀드렸잖습니까? 한번 튕겨볼 생각이었지 조민성 배우님한테 피해를 줄 생각은 없었다고요.”
조민성이 의심의 눈초리로 날 이리저리 쳐다본다.
난 재차 조민성을 설득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생각하는 놈이라면 화란전의 배역들을 다른 실에 나눠줬겠습니까?”
그동안 평판 관리에 애쓴 공이 있는지 조민성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알겠습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핵심을 말해보시죠. 대체 어떻게 내 광고비를 더 받게 해준다는 겁니까?”
“제가 알고 있기로는 HY 오너 그룹의 장남 이태준 부회장님이 조민성 배우님의 열렬한 팬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민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5년 전. 그분이 절 직접 HY 자동차 그룹의 모델로 삼으셨으니까요.”
“그럼 설명이 쉽겠네요. 이번 광고 협상 건은 이태준 부회장님은 모르는 일입니다.”
이태준 부회장과 조민성 배우의 인연은 8년 전 이태준 부회장이 처음으로 자동차 그룹의 이사로 부임한 이후 중형차 SANTA 시리즈가 큰 실패를 본 데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하버드 MBA 과정을 거친 이태준의 실패에 재계 안팎에서 낙하산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다 5년 전.
절치부심한 이태준은 부회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4도어 스포츠 세단 GX-7을 출시했다.
그와 함께 광고 모델로 당시 가장 핫한 배우인 조민성을 잡았다.
조민성의 인기에 힘입어 GX-7은 역대급 성공을 이뤘고 그 이후로 SUV 형인 GX-8 최고급 세단 GX-9까지 연이은 큰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이태준 부회장은 자기 성공의 절반은 조민성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반면 최근 승진한 대형 광고 기획사의 마케터 출신인 박상종 홍보이사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광고 전문가로 배우들의 광고비를 후려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박상종 홍보이사가 자신의 실적을 위해 단독으로 진행한 거고.
난 그 사실을 모조리 조민성 배우에게 털어놓았다.
“이태준 부회장님이······ 이번 광고 협상 건을 모른다고요?”
“전혀요. 동유럽에 공장을 설립하는 문제로 2개월째 체코 체류 중이십니다. 모르셨습니까?”
조민성이 방상영 이사를 휙 하고 쳐다본다.
방상영 이사가 아차 하고 얼굴을 붉힌다.
“아니 난 그런 소식을 못 들었는데. 그룹 비서실에 연락하니 바쁘다고만 하시고······.”
“부회장님 폰 번호 모르십니까?”
“알긴 알지. 하지만 이런 일로 일일이 연락드리기엔 공사다망하신 분이 아닌가?”
난 즉시 체코 총리와 업무 협약식을 하는 사진을 찾아 두 사람에게 보였다.
그것도 어제 올라온 싱싱한 기사로 말이다.
기사를 꼼꼼히 살피던 조민성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조민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완전히 절 가지고 노셨네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미안하긴 했지만 비굴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급이 되는 상대와만 일하는 조민성에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절대로 해서 안 되는 일이니까
“제가 왜 그 광고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지 아십니까?”
“압니다. 여기서 말씀드릴까요?”
조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곧장 튜닝된 스포츠카를 매년 받는다는 비밀 유지 조항이 걸려 있는 계약 조건도 언급했다.
“사설 튜닝 업체에 의뢰한다고 해도 HY 자동차 그룹에서 섬세하게 조정해주는 튜닝은 솔직히 못 따라오죠. 그래서 그 광고가 필요하신 거 아닙니까?”
조민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내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군요. 하하하.”
조민성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방상영 이사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웃음을 그친 조민성이 묻는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받을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곧바로 이태준 부회장님에게 전화 걸어서 식사 자리를 붙잡아 보십시오.”
“식사요?”
“예. 며칠 안에 한국으로 돌아오실 테니 식사라도 하시면서 재계약 의사를 말씀해 보시죠. 금액은 부회장님께 전액 일임하겠다고 하시면 될 겁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태준 부회장은 반드시 금액을 더 올려줄 게 확실했다.
여전히 내 다이어리의 일정도 그대로였으니까.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7일]
-PM 07:00 삼부자 갈비에서 회식. (배우 1실 조민성 HY 그룹 자동차 CF. 연간 15억 5년 연장 기념 회식)
잠시 고민하던 조민성이 방상영 이사에게 말한다.
“이사님. 바로 이 부회장님에게 전화 넣어 주세요.”
방상영 이사가 당황한 어투로 답했다.
“민성아. 일에는 체계라는 게 있어. 박 이사를 건너뛰고 이 부회장님께 바로 전화를 하면······.”
“배우 몸값을 깎은 순간 싸움은 그쪽에서 먼저 건 겁니다. 솔직히 기분이 더러워도 이 부회장님 체면 때문에 참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참을 필요가 없죠. 아닙니까?”
“그 그건······.”
“당장 전화 넣으세요. 아니면 제가 직접 전화할까요?”
방상영 이사가 한발 물러섰다.
“아니다. 내가 할게.”
방상영 이사가 전화를 잡고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미소 오디션이 있는 날이거든요.”
조민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한테 제가 응원한다고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순간 조민성이 한마디를 더한다.
“그리고 이번 계약이 잘 끝나고 나면 저랑 따로 한번 보시죠.”
조민성이 팀을 옮기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드러낸다.
“예.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매년 수억 원이나 깎일 뻔한 광고비를 지켜줬을뿐더러 대형 계약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능력도 보여줬으니 결과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미 민성아······.”
방상영 이사가 애절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조민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방상영 이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보며 회의실을 떠났다.
* * *
MBS 방송국으로 가는 동안 조민성에게 까톡을 받았다.
[조민성 : 정 팀장이 말한 대로 부회장님께 전화를 드리니 먼저 재계약하자고 말씀해 주시더군요. 다음 주에 부회장님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뵙기로 했습니다. 그 뒤에 우리도 자리를 갖도록 하죠.]
이태준 부회장은 박상종 홍보이사가 저지른 짓은 알지 못한 채 미안하다며 과거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제안해 왔단다.
조민성에게 이번에 발매하는 VIP용 최고급 세단 CX-10 모델이 되어달라면서 말이다.
방상영 이사의 표정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제야 난 마음을 놓고 MBS의 방송국으로 향할 수가 있었다.
* * *
MBS 방송국.
<화란전>의 아역 오디션은 1차 서류 면접 예선을 통과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2차 영상 녹화본 면접을 치른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 각각 30명씩 나눠 여자 아역 현장 오디션과 남자 아역 현장 오디션을 하게 된다.
미소는 1차와 2차를 가뿐히 통과한 뒤 3차 현장 오디션을 위해 정상봉과 유진이와 함께 MBS 7층 오디션장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운전을 하던 도란희가 묻는다.
“팀장님. 그런데 저는 왜 따라가요?”
“쓸 만한 아역들이 있나 보고 괜찮으면 영입하려고. 틈틈이 너도 나 하는 거 보고 배우라고.”
아역 오디션에 통과한 배우들은 소속사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종종 매니저들은 오디션장에 기웃거리기도 한다.
괜찮은 재능이 있으면 영입하기 위해서.
하지만 도란희가 이해가 안 된다며 묻는다.
“그런데 팀장님. 다 좋은데 전 가수 담당이잖아요.”
“가수 담당이라고 평생 가수만 관리할래? 다양하게 기회를 쌓아야지 더 높이 올라가지.”
매니저로서 가수나 배우 쪽을 골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두 영역을 다 할 수 있다면 그건 매니저로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실장 이상으로 올라가게 된다면 그 경험은 더 큰 도움이 될 거고.
내 뜻을 알아차렸는지 도란희가 조심스레 묻는다.
“팀장님. 저 어디까지 키워주실 생각이세요?”
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앞만 잘 보고 운전하면 네가 목표한 게 어디든 올려줄게. 제발 살려만 줘.”
도란희가 급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당연히 팀장인 내가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 건데?”
도란희에게 늘 과중한 업무 부담을 맡겨 미안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도란희에게 엄청난 보너스와 쾌속 승진을 안겨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 : 정유진]
“어. 유진아.”
-오빠. 저 PD님 방이에요. 이리로 오시면 돼요.
“거긴 왜?”
-변장 들켜서요.
유진이는 스태프들 따라서 도망 왔고 미소는 정상봉이 데리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변장을 시켰는데 숨기는 건 무리였나 보다.
“알았어. 란희랑 거기로 갈게.”
* * *
MBS 7층 PD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면의 대형 LCD에 아역들이 연기할 콘티가 띄워져 있었다.
<화란전>의 시대 배경이 되는 신라 시대 궁전을 배경으로 어린 공주 세 명이 서로를 향해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류한준 CP와 오복희 PD는 콘티를 스크롤 해가며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한우주 작가는 집필에 지쳤는지 소파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지난 일주일간 콘티 작업을 하느라 다들 인간의 몰골이 아니다.
“PD님. CP님. 저 왔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은 오복희 PD와 류한준 CP가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어. 왔어요? 정 팀장님?”
순간 한구석에서 콘티를 보고 있던 유진이도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꽁꽁 싸매고 가랬더니 어쩌다 들켰어?”
유진이가 혀를 살짝 내밀며 대답했다.
“미소가 손을 흔들길래 귀여워서 같이 손을 흔들다가 들켰어요.”
미소는 엄마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유진이는 그걸 보고 신이 나 힘차게 흔들었단다.
그러니 당연히 들킬 수밖에.
아무래도 앞으로 유진이를 데리고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유진이도 그걸 알고 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미소 오디션은 꼭 보고 싶었는데······.”
그때였다.
유진이에게 미소 오디션을 볼 수 있게 할 방법이 떠올랐다.
난 곧장 태블릿을 켜고 현장에 있는 정상봉에게 까톡 영상통화를 신청했다.
“오빠. 뭐 해요?”
“잠깐만.”
잠시 후 정상봉이 까톡으로 전화를 받는다.
동시에 화면에는 정상봉과 미소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다!
엄마가 없어 불퉁하게 있던 미소가 환하게 웃으며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댄다.
“어? 미소다!”
유진이는 태블릿을 펼치고 자리에 앉아 미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엄마 지금 어디 있어?
“PD님 방. 엄마가 이걸로 계속 보고 있을 거니까 미소 힘내.”
미소는 오늘 마지막 순번인 30번의 번호표를 가슴팍에 붙이고 있다.
그리고 곁에는 유치원 동무 진공주도 함께였는데 진공주는 25번의 순번이다.
경력이 있을수록 다른 아역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뒷번호로 선정한 오복희 PD의 섬세한 배치였다.
“정 팀장님도 오셨으니 우리도 오디션장으로 가죠.”
오복희 PD는 오디션장에 가자며 소파에 누워있는 한우주 작가의 어깨를 흔들었다.
“한 작가. 눈 좀 떠. 시간 다 됐어.”
한우주 작가가 눈을 번쩍 뜬다.
“어? 정 팀장님 오셨네요······.”
“한 작가님. 오디션 끝나면 집에 들어가서 좀 쉬세요. 여기 란희가 데려다줄 겁니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한우주 작가를 부축했다.
그리고 유진이를 향해 말했다.
“유진아. 넌 오디션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겠다.”
“알았어요.”
순간 도란희가 먼저 나서 유진이와 함께 있겠다고 한다.
“팀장님. 아역 오디션은 유진이랑 같이 여기서 볼게요.”
“그럴래?”
도란희에게 현장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진이 앞에 놓인 태블릿 액정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 쟤는?’
<화란전>의 아역 오디션장에 미래의 스타 한 명이 와 있다.
올해 10살의 아역 강시아.
회귀 전에는 10대 중반을 넘어서자마자 이름을 알리던 스타였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ES 연기 학원에 오랫동안 착취를 당했던 비운의 스타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그 여자도 있겠군.’
난 급히 영상통화 중인 정상봉에게 외쳤다.
“상봉아. 오른쪽으로 조금만 화면을 옮겨볼래?”
-아. 예.
정상봉이 폰을 옆으로 돌린다.
역시나 강시아의 곁에는 샤넬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성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강시아가 다니는 ES 연기 학원의 최이선 원장.
그녀는 앞으로 무려 6년간이나 강시아가 벌어들이는 수익 전액을 갈취하게 되는 사기꾼이다.
순간 내가 할 일이 정해졌다.
미소의 오디션이 끝나면.
최이선 원장을 박살 내고 강시아를 구해내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