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7화
367. 조민성 1
프라이드가 강한 조민성은 그동안 일개 팀장인 나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린 나와 상호 존칭을 허락하는 것만 봐도 서로를 대등한 상대로 인식한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이런 자존심 강한 배우를 정 팀에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절대 호락호락 나가서는 안 된다.
난 대형 광고를 쥐락펴락할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조민성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조민성은 나와 일하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조민성은 늘 자신과 급이 맞는 매니저와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난 HY 자동차 그룹 광고를 받아들일 거냐는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HY 자동차 그룹에서 태풍이한테 제법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군요.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 중입니다.”
그 순간.
굴렁쇠의 간판스타 조민성이 고심에 빠졌다.
설마 자신이 직접 왔는데도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조민성이 천천히 입을 연다.
“이건 어떻습니까? 이번 광고 제안을 사양해주시면 제 차기작으로 내정된 ‘첫사랑 로맨스’의 주연을 태풍이한테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조민성의 작품 선구안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대략 80% 정도.
이 업계에서는 승률 50%만 되어도 대박인데 80%라는 건 반쯤 과장하면 거의 신내림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 조민성은 자신이 차기작으로 선택한 작품을 넘기겠다고 말한다.
“육 감독이 저랑 태풍이를 놓고 끝까지 저울질하다가 절 골랐습니다. 제가 포기하면 곧바로 태풍이에게 제의할 겁니다.”
조민성은 로맨틱 코미디의 대세 육현문 감독의 작품 주연이라면 7억짜리 값어치는 할 거란 말을 덧붙였다.
다만.
미래를 아는 내게는 전혀 영양가 없는 제안이다.
“죄송합니다만 수지가 안 맞는데요.”
“수지가 안 맞다뇨? 아직 대본을 못 보셨으면······.”
“아뇨. 봤습니다. 대본은 잘 나왔더군요.”
대본이 잘 나오면 뭐해.
그 영화는 제작도 못 해보고 망하는데.
<첫사랑 로맨스>는 로맨스 코미디물로 500만 명의 관객은 기본으로 찍는 육현문 감독의 차기작이다.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투자사가 망하면서 개봉도 전에 엎어져 버린다.
조민성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왜 마다하는 겁니까?”
“제 별명 모르십니까? 박수무당 정 스타? 태풍이 차기작 정도는 제가 알아서 고를 수 있습니다.”
거래가 통하지 않자 조민성이 딱 까놓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요구는 없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난 그 광고 못 넘깁니다.”
조민성이 HY 자동차 그룹의 광고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광고의 부속 비밀 계약으로 조민성은 매년 HY 자동차 그룹에서 전용 튜닝 차량을 지원받는다.
그리고 그 차량으로 용인에서 레이싱을 즐기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그래서 이 광고를 유지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난 애가 닳기 시작한 조민성에게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방법이 하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뭡니까 그게?”
“전 같은 팀 배우들끼리는 광고나 작품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그 순간 조민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내 팀으로 오라는 걸 돌려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글쎄 지금으로서는 HY 그룹 광고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요.”
조민성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인상을 조금 더 남겨 볼까?’
난 내친김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 한 자락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 말씀하신 ‘첫사랑 로맨스’ 말입니다만.”
“왜요? 줘도 안 하실 거라면서요?”
“맞습니다. 하지만 조민성 배우님도 그 영화의 주연은 맡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민성의 눈가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슨······.”
“투자사인 태성의 재정 상태부터 확인해 보시죠. 거기 앞으로 한 달도 못 갑니다.”
조민성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는다.
“천하의 태성이 망한다고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제 말이 틀리면 조건 없이 광고를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첫사랑 로맨스>에 투자하는 태성 인베스트먼트는 업계 3위의 투자 회사다.
그곳이 망한다는 이야기는 조민성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컥!
문이 거칠게 열리고 땀범벅이 된 방상영 이사가 뛰어 들어왔다.
“민성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쉽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확실히 작업할 수도 있었는데.
순간 조민성이 시치미를 떼며 태연히 연기를 시작했다.
“태풍이랑 같이 예능 출연이나 할까 해서 정 팀장과 상의 좀 하려고 왔죠. 근데 이사님은 어쩐 일이세요?”
나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알려주기 싫다는 걸 보니 정 팀으로 오라는 내 제안에 관심이 동한 게 확실했다.
조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날 쳐다본다.
“태풍이한테 ‘런닝쇼!’에 함께 출연할 마음이 있는지 한번 물어봐 주세요. 함께 나가면 반응이 좀 있을 것 같아서요. 저도 요즘 핫한 후배 덕 좀 봅시다.”
“예. 태풍이한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센스 있게 조민성의 연기에 맞장구를 쳐줬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든 건지 조민성은 싱긋 웃으며 문밖으로 나선다.
회귀하고서 안 건데 난 제법 연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조민성은 방 밖에서 기다리던 배우 1실장 최은석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방상영 이사는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정 팀장. 너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방상영 이사가 날 향해 손가락질한다.
“수작이라뇨? 방금 들으셨지 않습니까? 예능 출연 이야기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
“이사님. 안 믿으면 또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뭐?”
난 방상영 이사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지금 혹여나 조민성이 정 팀으로 옮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시죠?”
방상영 이사가 침을 꼴딱 삼켰다.
“배우나 매니저가 원한다면 안 막겠다고 말씀하신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설마 그거. 배우 1실은 적용 안 되는 겁니까?”
방상영 이사는 자기가 힘들게 키워낸 배우 1실 소속의 배우 그것도 조민성이 날 만나러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은 입조심을 해야 한다.
말 한마디에 쫄딱 망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차피 공학범 감독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으면 내가 당했을 거고.
하지만 반대로 그 사건이 해결된 이상 이제는 방상영 이사가 털릴 차례였다.
“뭐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시죠. 전 MBS에 가봐야겠습니다. 화란전의 배역 문제로 오 PD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난 무섭게 노려보는 방상영 이사를 무시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MBS에서 <화란전>의 제작발표회와 홍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미리 약속한 대로 굴렁쇠 엔터의 배우 여섯을 추천했다.
MBS에서 세 시간 정도 회의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 있었다.
-조민성 배우가 정 팀장을 만났다는데?
-그럼 조민성이 정 팀으로 가는 건가?
-방 이사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는 거 보니까 진짜 그러는 거 아냐?
-미친······ 조민성 혼자 벌어들이는 매출이 얼만데. 이러다 1실까지 흔들리는 거 아냐?
-매니저도 영입한다던데 나도 우리 애들 데리고 정 팀으로 갈까?
조민성은 단지 자동차 광고를 뺏기지 않기 위해 날 찾아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1실을 견인하는 스타가 먼저 날 찾아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간청했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내가 바랐던 대로 말이다.
사무실 내 자리에 앉자 이영진이 진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효과가 좋은데요?”
난 MBS로 가기 전 이영진을 따로 불러 조민성이 우리 팀으로 온다는 소문을 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수고했어.”
“이런다고 조민성 배우가 흔들릴까요?”
“그쪽은 안 흔들리겠지. 하지만 배우 1실은 흔들리고도 남을걸?”
1실의 매니저들이 조민성을 의심하게 되면 조민성은 오히려 1실의 매니저들에게 실망하게 될 거다.
“하긴 1실이 제일 흔들리긴 하더라고요.”
“하여간 HY에서 조민성과 컨택하면 애써 판을 짠 게 다 허사가 되니까 HY랑 내일 중으로 약속부터 잡아줘.”
“내일은 미소 오디션 날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전에 일찍 만나야지.”
HY 자동차 그룹은 조민성과 이태풍 사이에 경쟁을 붙여 광고비를 깎으려 들고 있다.
하지만 조민성을 움직이게 하려면 이 정도 액션은 취해줘야 했다.
“아 그리고 3실에 좀 갔다 올게.”
“또 뭘 하시려고요?”
“배우 3실 송지환 배우에게 영입 제안을 해보려고.”
이영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어와도 됩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허락이 떨어진 지금 덩치를 키우지 않으면 언제 키워?”
정 팀으로 오겠다는 배우들을 마구잡이로 영입하면 회사가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 당연히 윗선에서도 자제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거고.
난 그 전에 알짜배기들은 최대한 확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송지환 배우는 사극에서 왕 역할을 주로 맡으며 선 굵은 연기를 보인 연기파 배우다.
하지만 정통 사극이 사라지고 퓨전 사극이 주류를 이루면서 최근엔 그가 선호하는 역할 자체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덕에 스트레스가 심해 최근에는 위염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송지환이 선호하는 스타일의 배역을 가지고 온 순간 송지환은 대번에 반색하고 나섰다.
“화란전에 내 자리도 있어? 굴렁쇠에서 추천하려던 배역은 이미 다 찼다면서?”
“에이. 송지환 배우님이 그런 조연급 배우들이랑 어울릴 군번은 아니시죠.”
“그러면?”
“작가님이랑 PD님에게 따로 허락받아왔습니다.”
조금 전 MBS에 갔을 때.
오복희 PD와 한우주 작가에게 <화란전>의 주요 배역인 국왕 역할을 송지환에게 맡기자고 별도로 합의를 하고 찾아왔다.
송지환이 잠깐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배역. 꼭 자네 팀으로 옮겨야만 받을 수 있나?”
회사 내 도는 소문을 들었는지 대뜸 그 질문부터 먼저 한다.
“아뇨. 신라 국왕 역을 가장 잘 살릴 배우는 송지환 배우님뿐이라 생각했기에 제의를 드린 겁니다.”
송지환 배우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
직접적인 조건을 걸었다간 오히려 안 하겠다고 하고도 남을 양반이니까.
“그보다 PD님과 통화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락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송지환 배우가 알겠다며 PD와 통화를 나눈다.
“아 예. 예. 그러면 내일······ MBS에 들르겠습니다. 예. PD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끝낸 송지환이 기쁜 표정으로 가만히 날 쳐다본다.
“정 팀장 오늘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식사나 할까?”
순간 배우 3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송지환은 팔불출로 유명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아내에게 요리를 부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 3실에서도 김동수 실장 말고는 아무도 송지환의 집밥을 먹어본 이가 없었다.
배우 3실 매니저들이 날 노려보며 연신 눈총을 준다.
거절하라고.
하지만 난 그 시선들을 깔끔히 무시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극에선 S급 대접을 받는 배우를 영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그리고 그날 밤.
난 알싸하게 취한 송지환 배우로부터 정 팀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기어이 받아내고야 말았다.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그의 아내를 위한 맞춤 선물을 준비한 덕분이었다.
* * *
다음 날.
미소의 오디션 당일이자 이태풍의 HY 자동차 그룹 광고 미팅이 있는 날이다.
미소는 한복을 입고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서.
“삼촌. 나 이뻐요?”
“당연하지.”
“힛~”
“그러면 삼촌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갈 테니까 미소는 있다가 태권 선생님이랑 함께 방송국에 가면 돼. 알겠지?”
“네~!”
난 이어서 유진이를 향해 말했다.
“유진아. 난 오전 스케줄 끝나는 대로 바로 MBS로 갈게.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까 모자 쓰고 변장 확실히 해!”
“걱정 붙들어 매세요.”
유진이는 오늘 미소의 보호자로서 함께 방송국으로 갈 예정이었기에 단단히 변장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소의 짐을 챙기던 유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오빠. 근데 우리 정 팀으로 조민성 선배님이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아직 정해진 건 아냐.”
내가 자신을 관리하는 시간이 또 줄어들까 유진이가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다.
“만약 조민성 선배님이 우리 팀으로 오면 누가 맡아요?”
“있어. 관리 잘하는 사람.”
조민성은 개인 매니저가 있었기에 손이 많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만약 조민성이 팀을 옮긴다면 이영진에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난 작품 선정만 도와주고.
“그리고······ 나한테는 네가 있는데 어떻게 조민성을 관리해?”
유진이의 얼굴이 빨개진다.
“오빠도 참······.”
유진이가 감격하는 모습을 본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소도 있고 하루도 있고 태풍이도 있고······”
순간 유진이가 입을 부풀리며 장난스레 내 팔뚝을 꼬집었다.
“아야!”
“칫! 그러다 정 팀 사람들 다 말하려고요?”
“들켰네?”
유진이가 피식하며 웃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조민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예. 배우님.”
전화기 너머로 조금은 기운이 빠진 조민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방상영 이사님께서 HY 측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태풍이에게 미안하지만 HY는 저와 재계약을 맺기로 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데 사정을 들어보니.
회귀 전처럼 연간 15억으로 5년 재계약이 아니라 현재 12억보다 2억이나 줄어든 연간 10억으로 3년짜리 재계약을 한단다.
몸값을 떨궈가며 계약을 진행하는 건 배우의 인기가 떨어졌을 때나 일어나는 일.
방상영 이사가 직접 나섰는데 이런 나쁜 조건으로 계약을 맺다니.
어이가 없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자기 배우의 몸값을 깎아?’
하지만 경쟁자가 실수할 때야말로 내가 가장 돋보이는 법.
바로 지금이야말로.
내 유능함을 좀 더 어필하고 조민성에게도 실질적인 이득이 되는 제안을 할 때다.
더불어 방상영 이사의 무능함도 드러낼 수 있고.
“조민성 배우님! 제가 광고비 5억은 더 받게 해드릴 테니까 지금 당장 저부터 보시죠.”
-광고를 뺏는 게 아니라 광고비를 더 받게 해준다고요?
“예!”
잠시 망설이던 조민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한 시간 후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전에 회사로 오세요.
통화를 끝낸 순간 느낌이 왔다.
‘이거 잘하면 진짜 배우 1실의 에이스를 데려올 수도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