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4화
364. 천만 배우 4
굴렁쇠 엔터의 6층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감찬 대표와 강지영 본부장 그리고 방상영 이사는 문 쪽 가까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나온 강상수 본부장과 구정문 팀장이 앉아 있었다.
“이 친굽니까?”
강상수 본부장의 질문에 강감찬 대표가 날 소개한다.
“정 팀장. 인사드려. 이쪽이 영진위 강상수 본부장님. 그리고 이쪽은 구정문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정윤호라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날 닦달하기 시작했다.
“길게 말할 거 없고 당장 공 감독님 찾아뵙고 사과부터 드리세요. 이태풍 씨 설득하는 건 알아서들 하시고.”
이태풍을 출연시키라는 지시에 강감찬 대표가 대신 답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강상수 본부장이 코웃음을 친다.
“대표님. 우리 위원장님께서 이번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간곡히 부탁한다고?
웃기고 있네.
영진위의 위세를 빌어 협박을 협의라는 말로 포장하는 범죄자들 주제에.
강감찬 대표가 재차 반박하려 하는 순간 내가 먼저 나섰다.
“태풍이 차기작은 이미 정해진 상태입니다. 지리산이라고······.”
구정문 팀장이 코웃음치며 내 말을 끊었다.
“지리산 쪽도 아직 대본 밖에 안 나왔잖습니까? 그 작품은 잠시 미루고 공 감독님 것부터 찍으면 되겠네요.”
강상수 본부장도 한마디를 더했다.
“웬만하면 협조하시죠? 나 오늘 피곤하니까 좀 쉽게 쉽게 갑시다. 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나온 이들이 이렇게 갑질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영화 제작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은 제작 초기에 정부 자금의 도움을 받는다.
정부의 지원 자금들이 모여 만들어진 모태 펀드에 속한 ‘영화계정 자펀드’나 ‘문화계정 제작 초기 펀드’ 등을 통해 말이다.
그리고 그 초기 투자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는 조직이 바로 영진위다.
당연히 <지리산> 역시도 정부 초기 자금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리산>의 투자를 철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압박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공학범 감독의 비리에 얽혀 다 날아갈 사람들이니까.
다만 방상영 이사가 동석한 자리이니만큼 거절의 이유를 분명히 설명해야 했다.
“죄송한데······ 두 분은 공 감독님 비리 사건이 기사로 뜬 걸 못 보셨습니까?”
두 사람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허! 그 그건 공학범 감독님을 시기 질투하는 놈들이 악의적으로 퍼트린 헛소문이야! 기자 놈들이 생각 없이 받아 쓴 것뿐이고!”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래요? 그러면 이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 곧장 LT 엔터에서 녹음한 음성 파일을 틀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태풍이고 뭐고 확 묻어버리는 수가 있어! 우리 공 감독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이나 알아?
최진성 제작실장이 내뱉은 폭언이 흘러나오자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한다.
“차 실장님이 말씀한 발 벗고 나설 분들이라는 게 강상수 본부장님이랑 구정문 팀장이시군요. 맞습니까?”
순간 두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두 사람은 제 발 저린 듯 큰소리로 외친다.
“이런 무례한 사람이 있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이야?”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그와 동시에 강상수 본부장이 구정문 팀장을 향해 외친다.
“구 팀장! 더 이야기해봤자 소용없겠네. 가지! 위원장님께 상세하게 보고해야겠어.”
“예! 본부장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놀란 방상영 이사는 자신이 달래볼 테니 다시 이야기해보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나섰다.
“본부장님! 팀장님!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달랜다고?
웃기고 있네.
서예종끼리 대책을 의논할 생각이겠지.
세 사람이 사라지자 강감찬 대표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윤호야. 영진위가 나섰는데 감당할 수 있겠냐?”
“이미 기자들과 검사 쪽 라인에 제가 아는 걸 전부 제보했습니다. 김흥복 위원장까지 얽혀 있는 일인지 몰랐지만요.”
강감찬 대표도 기가 막힌 듯 혀를 내둘렀다.
나는 잡혀간 최소혜 기자도 빼내고 추가 제보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일을 마무리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수고해라. 변동 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예. 대표님.”
지체했다간 김흥복 위원장과 서예종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
지금은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움직일 때다.
* * *
서울 종로경찰서 주차장.
서재일 검사에게 추가 제보를 한 뒤 현 상황을 재차 알렸다.
부장 검사와의 면담이 있었기에 뒤늦게 소식을 받았다며 서재일 검사가 즉시 손을 썼다.
그때였다.
종로경찰서의 유리문이 열린다.
강인한 기자와 최소혜 기자가 초췌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곁에는 중간 일보에서 나온 변호사도 함께였다.
강인한 기자와 최소혜 기자는 나오자마자 경찰서를 향해 주먹 감자를 날렸다.
“명색이 민중의 지팡이라는 놈들이 기자를 가둬? 어디 두고 봐! 내가 이것들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아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혹 또다시 감금될까 걱정되어 급히 경적을 울렸다.
빠앙!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 정 팀장!”
두 사람이 중간 일보 변호사와 인사를 나눈 뒤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온다.
최소혜 기자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으며 묻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이태윤 기자에게 들었습니다. 취재를 나갔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고요. 그래서 서 검사님을 통해 손 좀 썼습니다.”
“우리 정 팀장. 수완이 아주 제법인데?”
그때 뒷좌석에 탄 강인한 기자가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치장까지 들어가서 국밥도 한 그릇 못 먹었네. 우리 일단 국밥이나 한 그릇 맙시다. 여기서 코너만 돌면 조선 주모 국밥이라고 끝내주는 맛집이 있는데······.”
둘 다 배가 고픈 듯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밥 먹을 시간이 없다.
“밥은 나중에 드시죠. 이번 비리의 진짜 주범을 알아 왔습니다.”
주범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기자의 본능이 깨어났는지 두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누군데?”
“누굽니까?”
두 사람의 질문에 콕 짚어 말했다.
“김흥복 위원장 아시죠?”
김흥복 위원장은 무려 15년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던 서예종 출신의 영화계 우두머리였다.
순간 강인한 기자가 이를 빠드득 간다.
“당연히 알지! 거기다 최 기자랑 나랑 영진위에 취재 갔다가 그놈이 신고해서 유치장에 끌려간 거잖아!”
“바로 그 김흥복 위원장이 이 사태의 주범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본다.
“선배. 그러고 보니 김흥복 위원장. 공 감독 영화라면 무조건 지원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딱 답 나왔네. 바로 가자 최 기자. 그 인간을 잡아넣어야 밥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갈 거 같다.”
“알았어요 선배.”
두 사람은 회사까지만 차를 태워 달라고 말한다.
기자들끼리 연락을 돌려서 영진위를 제대로 털어버리겠다고 말이다.
두 사람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걱정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럼 가실까요?”
차에 시동을 건 순간.
그제야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30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NEW. 이태풍] <지리산> 제작 일정 연기 발표.)
* * *
하루 뒤 LT 엔터테인먼트 삼성동 극장.
<경계 너머로>의 천만 관객 달성 축하 이벤트가 벌어지는 중이다.
이태풍은 팬들과의 이벤트 중간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지금 막 공학범 감독과 최진성 제작실장이 체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폰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고.
-공 감독님! 영화 제작비를 유흥에 쓰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아드님이 사용한 거액의 유학 경비가 정부 지원금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한 말씀만 해주시죠!
-공학범 감독님! 영진위 위원장님과 각별한 사이라던데 유착 관계를 인정하십니까?
기자들이 날카로운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하지만 공학범 감독과 최진성 실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호송차에 타고 있었다.
언제나 카메라 앞에서 위풍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거장 공학범 감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공학범 감독은 이제 범죄자로서 자신을 평생 환하게 비추던 카메라 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달칵.
호송차의 문이 닫혔다.
리포터가 마이크를 잡고 이번 일에 얽힌 사정을 낱낱이 밝히기 시작한다.
-국민의 염원이 담긴 세금을 사적으로 탕진한 공학범 감독은 영진위원장과 서예종 출신의 고위 인사들과 결탁해 유흥과 부동산을 구매하는 데 세금을 사용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리포터는 김흥복 영진위원장을 비롯한 공범의 이름을 하나도 남김없이 거론하기 시작했다.
‘끝났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서예종 라인들이 갈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경계 너머로>의 최성문 감독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번 일. 정 팀장이 제보한 거야?”
폰에서 시선을 떼고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감독님.”
공학범 감독의 압박에서 버텼을 뿐 그의 비리가 기사로 뜬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라 대답했다.
굳이 내가 했다고 소문낼 생각은 없었지만 최성문 감독은 다 안다는 듯 씨익하고 웃음을 짓는다.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판 황제를 상대로 버티느라 수고했어. 정 팀장이 잘 막아준 덕에 태풍이나 박 감독 모두 고마워하고 있더라고. 물론 나도 그렇고.”
천하의 최성문 감독에게 칭찬을 듣다니.
살짝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그때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리산>을 연출하게 될 박선재 감독과 그의 여자친구 안유주가 손을 맞잡고 내 앞에 서 있다.
“정 팀장님. 감사합니다.”
“아 박 감독님. 안 실장님.”
그 순간 박선재 감독이 리본 장식이 된 흰색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청첩장입니다. 팀장님 덕분에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첩장을 펼쳐보자 10월 29일로 잡힌 결혼식 날짜와 함께 안유주가 직접 그린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
“드디어 결혼하시는군요.”
사실 지난 며칠간 박선재 감독은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천재 조재경 감독과의 충돌이 끝나고 간신히 한숨 돌리나 했더니 이번에는 거물 공학범 감독이 <지리산>의 개봉을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학범 감독이 구속되자 결혼을 연기하지 않고 확정을 지을 수가 있게 되었다.
박선재 감독의 평생 제작실장이 된 안유주도 환한 미소로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정 팀장님 덕분에 우리 오빠가 정말 힘든 고비를 넘겼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손을 꼭 맞잡고 고개를 숙이는 한 쌍의 커플을 보자 며칠간의 고생이 씻은 듯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지켜낸 건.
단지 이태풍의 커리어뿐 아니라 이 두 사람의 삶이기도 했으니까.
* * *
[<경계 너머로> 천만 관객 달성!]
[<경계 너머로> 흥행 돌풍! 적수가 없다.]
[‘천만 배우’ 이태풍이 선택한 차기작. 신인 감독 박선재의 <지리산>]
천만 관객 달성 이벤트가 벌어진 현장에서 이태풍은 차기작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직접 만천하에 공개했다.
덕분에 기사에는 <경계 너머로>와 함께 연관 검색어로 <지리산>이 나오고 있었다.
“오빠는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지금 이곳은 경기도 광주에서 천호동 집으로 가는 벤츠 스프린터 안.
내일 강은기의 재판이 열리기 때문에 임신 20주인 이연실과 엄마인 미카엘라 수녀님을 태워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다.
“태풍이 기사랑 이것저것.”
“그래? 이번에 오빠 집에 가면 태풍 오빠도 볼 수 있어?”
“태풍 오빠라니? 네가 나이 더 많잖아.”
“에이~ 이태풍 정도면 무조건 오빠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은 무조건 오빠라며 하루도 오빠라고 부를 기세였다.
팬심은 무서운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그때 엄마가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우리 아들. 많이 늠름해진 거 같네? 직장에서도 인정받아서 그런가?”
엄마의 눈에 난 언제나 착하고 늠름한 아들이다.
“요즘 좀 잘 먹어서 그렇겠죠. 그나저나 엄마 얼굴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픈 위를 치료해서인지 엄마는 예전보다 얼굴이 보기 좋아져 있다.
“말도 마. 연실이 얘가 얼마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챙기는지. 아주 귀찮아 죽겠어.”
이연실이 투덜댄다.
“하도 엄마가 안 먹으니까 그렇지!”
두 사람이 친 모녀처럼 투덜대는 모습을 보자 흐뭇하게 웃음이 나온다.
회귀 전에는 허망하게 잃어버린 두 사람이 내 눈앞에서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엄마. 연실아. 은기······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은 들었지?”
엄마가 이연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연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이 최은태 회장을 만나봐 줬으면 어떨까 하는데. 은기 그 자식.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으면서도 쌓인 감정이 많아서 그런지 섣불리 허락을 안 해.”
강은기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은연중에 종종 보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결국 만나지 않겠다는 답을 해왔다.
이연실이 재판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최은태 회장 같은 사채꾼을 내 아이의 할아버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윤호야.
순간 난 내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가 알던 강은기는 회귀 전에만 존재하던 인물이라는 것을.
그래서 난 엄마와 이연실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최은태 회장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가슴을 삭히는 형제를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그러면 엄마가 먼저 한 번 보고 나서 결정해도 될까?”
강은기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으면 하는 내 뜻을 엄마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면 자리는 언제 잡을까요?”
“지금 당장!”
성직자답지 않게 화끈한 우리 엄마는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한다.
최은태 회장이 강은기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다.
난 즉시 차를 돌려 명동 최은태 회장의 고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