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3화
363. 천만 배우 3
공학범 감독이 담배를 한 모금 더 태우고는 혼잣말을 던진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버릇이 없어. 감독이 오라는데 늦다니. 예전엔 상상도 못 하던 일인데.”
하도 가소로운 말이라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태풍이만큼 착하고 예의 바른 배우가 또 어디 있다고!’
동시에 기억 저편에 남아 있었던 약간의 존경심마저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제 존경할 만한 영화계의 선배가 아니라 나이 든 꼰대일 뿐이었다.
그리고 범죄자이기도 하고.
“제가 당장 끌고 오겠습니다 감독님!”
최진성 제작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공학범 감독이 손을 젓는다.
“됐어. 여기 매니저가 와 있으니까 이 친구와 이야기하자고.”
“캬! 역시 우리 감독님이십니다. 아랫사람이 무례를 저질러도 이렇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니······.”
“허허. 금칠은 그만하고 본론이나 이야기하세.”
북치고 장구치고.
지음지기가 따로 없다.
신종기 대표는 애써 화를 억누른 채 한번 무너졌던 배우인 이태풍을 부활시킨 매니저라며 날 소개했다.
그러나 공학범 감독은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정 팀장. 태풍이를 내가 좀 썼으면 하는데 괜찮지?”
대답을 바라는 것보다는 확인을 바라는 말투다.
그러자 최진성 제작실장이 바람을 잡았다.
“어허! 정 팀장 이 친구 눈치가 왜 이리 없어? 어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지! 우리 공 감독님 작품에 출연만 하면 바로 칸 가는 거 몰라?”
두 사람이 수십 년간 해 오는 광대놀음은 이쯤 보면 충분한 것 같다.
난 자세를 바로 하고 공학범 감독의 제의를 거절했다.
돌려 말한다고 알아들을 이가 아니니까.
“태풍이를 선택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차기작이 잡혀 있어서 감독님과 함께 일하는 건 힘듭니다.”
공학범 감독의 인상이 팍 일그러지더니 팔짱을 꼰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썹이 올라가는 게 화가 났다는 특유의 표정을 드러낸다.
그러자 최진성 제작실장이 날 닦달하기 시작했다.
“정 팀장! 지금 제정신이야? 우리 공 감독님 작품은 올 연말까지 찍고 바로 칸 경쟁 부분에 나갈 작품이야. 그런 작품의 주연이 될 기회가 또 올 줄 아나?”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이후 10년째 써먹는 레퍼토리가 변치도 않고 줄줄 흘러나온다.
“죄송합니다. 그런 좋은 제안은 태풍이보다 더 실력 있는 배우에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령 에이스 엔터의 박찬유 씨나 TK 엔터의 이수종 씨라던지요.”
에이스 엔터와 TK 엔터로 폭탄 돌리기를 시도했다.
공학범 감독이 내키지 않는지 담배를 뻐끔거린다.
그러자 최진성 실장은 이번엔 태도를 180도로 바꿔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이번 심사위원 중에 아시아인인 장면 감독이 끼어 있어. 그동안 홀대받았던 한국 영화가 제 평가를 받을 기회라고. 공 감독님의 시나리오와 연출 장면 감독님의 지원 거기에다 태풍이 연기력이면 황금종려상은 무조건 우리 거야!”
실제로도 대만의 장면 감독이 공학범 감독의 <일기일희>를 경쟁 부분에 초청하는 데 큰 힘을 실어줬었다.
하지만 이후 영화를 본 장면 감독은 그 누구보다 심한 악평을 퍼부었다.
믿었던 공학범 감독에게 배신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며 말이다.
“공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당연히 초청받으시겠죠. 저도 욕심이 나지만 계약서에 찍은 인주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파기할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거듭되는 회유에도 내가 낚이지 않자 공학범 감독이 피우던 담배마저 내려놓고 날 노려본다.
“태풍이의 차기작이 뭐라고 했지?”
“박선재 감독의 ‘지리산’입니다.”
“어디서 제작해?”
“LT 엔터에서 직접 제작 및 배급합니다.”
공학범 감독이 잘 되었다는 표정으로 신종기 대표를 쳐다본다.
“이봐. 신 대표. 제작을 좀 뒤로 미룰 수 있지? 난 12월에 들어가서 한 달만 찍으면 끝이야. 칸 출품일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하거든.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영화는 그 이후에 들어가도 되잖아?”
신종기 대표가 껄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왜? 직접 하기 불편하면 박선재 감독 전화번호나 줘.”
“뭘 어쩌시려고요?”
“태풍이 먼저 좀 쓸 테니 양해를 구하려고. 박선재 감독이 OK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 안 그래?”
일말의 미안함도 보이지 않는 태도다.
신종기 대표가 전화번호를 건네주자 공학범 감독이 박선재 감독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뚜~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이럴 줄 알고 <지리산>의 박선재 감독에게는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었다.
공학범 감독이 하는 X소리 때문에 박선재 감독이 흔들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선재 감독이 전화를 받지 않자 공학범 감독의 화가 치솟기 시작한다.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공학범 감독이 씩씩거리며 이번에는 이태풍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이태풍 역시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이······것들이······.”
두 사람 모두에게 전화가 닿지 않자 공학범 감독의 얼굴이 초고추장처럼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순간 최진성 제작실장은 의도적으로 전화를 피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외친다.
“야. 정 팀장! 진짜 이렇게 재미없게 나올 거야? 대한민국 영화가 한 단계 격을 올릴 절호의 기회를 자네 때문에 놓칠 수도 있어!”
대한민국 영화의 격?
그건 이미 이태풍이 <경계 너머로> 천만을 찍으면서 올리고 있는데요?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는 이미 대만 홍콩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판권 수출을 완료 지은 상태.
역대급 계약금을 받고 영화를 수출하는 게 대한민국의 격을 올리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난 말도 안 되는 두 사람의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분통이 터진 최진성 제작실장이 날 보며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 팀장 인마! 니가 아직 젊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이태풍이고 뭐고 확 묻어버리는 수가 있어! 우리 공 감독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이나 알아?”
드디어 시작이군.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딴 협박을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녹음도 되고 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영화계 원로로서 대접도 했고 모든 대화를 녹음도 했다.
갑질을 당할 만큼 당했으니 이제는 그가 당할 차례였다.
‘턴 오버입니다 공 감독님. 최 실장님.’
난 표정을 굳힌 채 두 사람을 향해 직언을 퍼부었다.
“이미 계약을 끝낸 배우를 빼가려는 것도 황당한데 이런 식으로 협박까지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공학범 감독과 최진성 제작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최 실장아. 내가 요즘 나이가 들어서 헛 게 들리나 보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냐?”
“아 아닙니다. 감독님! 감독님이 나이가 드시다뇨. 아주 쨍쨍한 현역이십니다.”
이 와중에도 아부한 최진성 제작실장은 날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 대하듯 외친다.
“이 이 새X가 진짜 미쳤나? 야! 어따 대고 그딴 개소리야? 당장 감독님한테 사과 안 해?”
“못 합니다. 그리고 제가 미친 게 아니라 두 분이 비정상이십니다. 시나리오도 안 본 작품에 무작정 출연하라는 게 정상입니까?”
“허! 이 새X가······.”
“그리고 나 당신 새끼 아니니까 말씀 좀 가려 하세요. 예?”
공학범 감독이 테이블을 쾅 하고 친다.
“새파란 말단 매니저 놈이 어디서 감히······.”
공학범 감독은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날 노려보며 몸을 부르르 떤다.
상황이 격해지자 신종기 대표가 나섰다.
“그만!”
그와 동시에 보다 못한 신종기 대표가 편을 정했다.
혹시나 공 감독의 편을 들까 걱정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 편을 들었다.
“공 감독님. 제가 공 감독님 체면을 여러 번 고려한 거 아시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공 감독님이 좀 양보해주십시오. 막말로 배우가 이태풍 하나뿐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상대가 엔터 회사의 대표이자 재벌가의 방계다 보니 안하무인이던 공학범 감독도 신종기 대표를 완전히 무시하진 못했다.
전면전을 벌인다면 공학범 감독의 피해도 만만치 않으니까.
“신 대표는 여기 정 팀장이랑 입장이 같다 이거지?”
신종기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CK 엔터의 손형태 대표를 언급해서 긁어둔 게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나도 몰랐다.
감정이 격해진 공학범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 뜻은 잘 알았어.”
담배 파이프를 꽉 깨문 공학범 감독은 잠시 우릴 노려보다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최진성 제작실장이 그 뒤를 따르며 내게 손가락질을 했다.
“너 어디 두고 보자.”
최진성 제작실장은 신종기 대표 역시도 한번 쏘아본 뒤 나서버렸다.
콰앙!
회의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 순간 신종기 대표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얼굴이 탈색된 채로.
“망했다······.”
신종기 대표는 이제 영화계 전체가 들불처럼 들고 일어날 거라며 상심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공학범 감독이 버티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범죄자가 된 공학범 감독을 옹호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
그때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최소혜 기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팀장. 강인한 선배가 한 건 건졌어. 지금 속보로 띄우니까 기사 확인해봐.
“대표님. 잠시만요.”
“응? 뭔데?”
난 신종기 대표를 내버려 둔 채 곧장 중간일보 인터넷판 기사를 확인했다.
[(속보) 공학범 감독. “다년간 제작비 횡령 의혹?”]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매년 지원된 금액을 다수 횡령한 의혹 발견!
-그간 칸 영화제를 노린 공학범 감독의 영화 퀄리티가 떨어진 건 오로지 제작비를 아꼈기 때문.
-제작 스태프들에게 열정페이를 강요한 영화 원로의 민낯!
-주연 배우들에게는 노 개런티 요구!
정확한 제보를 했더니 고작 몇 시간 만에 속보를 띄운다.
대한민국 언론 안 죽었네.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중간일보의 기사를 가리켰다.
“이것 좀 보시죠.”
“이거······ 설마 자네가 한 짓인가?”
“아뇨. 중간일보 최소혜 기자와 친해서 여기 오기 전에 언질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사람에게 강경하게 나선 거고요.”
순서를 바꿔 말하자 신종기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거~ 사람하고는! 이런 정보가 있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확실하지 않아서 말씀을 못 드린 겁니다. 만약의 경우에는 저 혼자 책임지려고요.”
신종기 대표를 지키려고 했다는 말에 신종기 대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날 칭찬한다.
“허허. 그렇게까지는 배려 안 해줘도 되는데······ 아무튼 다행이네.”
신종기 대표가 전화를 돌리는 사이 나는 슬쩍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30일]
-PM 10:00 [NEW. 이태풍] <지리산> 제작 일정 연기 발표.
‘이게 왜 안 지워지지?’
비리 기사가 터졌는데도 일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 *
LT 엔터테인먼트 신 대표와 대응책을 이야기한 뒤 굴렁쇠 엔터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 최소혜 기자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녀에게서 까톡이 도착한다.
[최소혜 기자 : 나 잠까ㄴ 연락 아ㄴ될ㄱ ㅓ야. ㅊ ㅔ포]
“나 잠깐 연락 안 될 거야? 체포?”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최소혜 기자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어서 강인한 기자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설마 강 기자님도 체포된 거야?”
심지어 중간일보 사회면에 있던 기사도 내려갔다.
“대한민국에서 기자를 체포한다고? 누가?”
찌라시 신문사의 기자면 또 모를까 일간지인 중간일보의 힘은 막강한 편이다.
그런데 기자가 체포되었단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물론 어느 정도 압박은 들어올 줄 알았고 두 사람에게 경고도 해뒀다.
“설마 더 윗선이 개입된 건가?”
순간 회귀 전 내가 알고 있던 일이 빙산의 일각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난 서재일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바쁜 일이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우선은 급한 대로 현재 상황을 까톡으로 남겼다.
그때였다.
“팀장님! 큰일 났어요!”
도란희가 머리에 꽃 하나 달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내 앞으로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인데?”
숨을 헐떡인 도란희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한다.
“헉헉······ 영진위에서 강상수 본부장님이랑 구정문 팀장님이 찾아오셔서 정 팀장님을 찾아요!”
영화계에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는 영진위 본부장이 직접 찾아왔단다.
공학범 감독의 영화에 이태풍을 주연으로 출연하라는 압박을 넣기 위해서.
강상수 본부장은 공학범 횡령 사태의 주범.
그런데 함께 온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구정문 팀장이라고? 진짜야?”
“예. 그런데 왜 그러세요?”
구정문 팀장은 무려 15년이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김흥복의 오른팔.
그렇다면 이 일엔 서예종 영화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김흥복 위원장이 끼어 있다는 소리다.
빙산의 끝자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김흥복 위원장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어!’
이제야 이해가 된다.
횡령의 그 끝에는 김흥복 위원장이 있었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탈이 없었던 거다.
생각을 마친 난 도란희에게 물었다.
“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6층 회의실에 와 있어요. 방 이사님이랑 강 본부장님이 먼저 맞이하러 가셨고요 대표님도 들어가시는 거 같았어요.”
난 흥분한 도란희를 도닥였다.
“걱정하지 마. 란희야.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서예종 라인 전체가 덤빈대도 물러설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영화계에 뿌리내린 암 덩이를 싹 다 걷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6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