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2화
362. 천만 배우 2
공학범 감독은 서예종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선배 1위로 손꼽히는 원로 감독이다.
서예종 출신이 절반 이상인 굴렁쇠 내부에서 그의 비리를 언급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이 회의실에 있는 누군가가 공학범 감독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대신 이 일에 관해 전권을 받는 대신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자 방상영 이사가 재차 묻는다.
“한 가지만 묻자.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아냐?”
“압니다. 그러니까 어떤 징계든 달게 받겠다는 거죠.”
만약 내가 실패하면 굴렁쇠 엔터 전체가 영화계의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태풍이 천만 배우가 되더니 배가 불렀다고.
그만큼 현재 공학범 감독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상영 이사가 회의실에 모인 팀장들과 실장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반은 서예종 출신인 사람들에게 말이다.
“팀장님들 그리고 각 부서 실장님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다들 눈치를 보며 한 마디씩 꺼낸다.
“실패하면 X 될 텐데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지?”
“올해 정 팀장 실적을 보면 이번에도 한 번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일개 팀장이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닌데!”
“그러니까 전권을 달라 허락을 구하는 거 아냐!”
“한국 최고의 원로 감독님의 자존심을 좀 세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반대입니다. 이번에는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태풍이 보고 한 몇 달만 고생하라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에이스 엔터의 양민혁 그 친구가 공 감독님 제안을 깠다가 사실상 영화계에서 퇴출당하고 연극판으로 간 거 다들 알잖습니까?”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나왔지만 전체적으로는 방상영 이사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컸다.
구성철 실장이나 박인기 팀장은 내 편을 들어주려 했지만 논리가 마땅치 않아 발을 동동 굴린다.
팀장들의 지지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방상영 이사는 기세등등해졌다.
“대표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내가 정 팀장을 믿는 게 어제오늘 일인가?”
강감찬 대표가 노골적으로 날 밀어준다.
워낙 급박하게 일어난 일이라 사정을 설명해 드리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언제나 내 뜻을 지지해 주시는 강감찬 대표의 신뢰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대표님 뜻이 그러시면 저도 정 팀장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려는지 묻지 않고 이번 건에 대해서는 정 팀장에게 전권을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상대가 미끼를 목구멍까지 삼켰다.
그렇다면 이젠 물 밖으로 건져 올릴 때가 되었다.
“대신에 공 감독님의 부당한 요구를 막아내면 보상으로 받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만?”
“응? 뭐라고?”
“제가 실패하면 굴렁쇠가 다 같이 피해를 본다고 하셨잖습니까? 반면에 성공하면 다 같이 이득을 볼 테니 상도 하나 주셔야죠.”
방상영 이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본다.
“뭐 이런······.”
강감찬 대표가 웃으며 내 편을 들어 준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그래 정 팀장은 뭐가 필요해?”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정 팀은 이제 막 실로 승격을 앞두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배우와 매니저를 영입한다지만 아직은 회사 내의 직원들이 더 친숙합니다.”
“뜸 들이지 말고 본론만.”
“쉽게 말해 다른 실에서 어떤 배우 어떤 매니저를 데리고 온다고 해도 본인들이 원한다면 막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정 팀에 오고 싶어하는 배우와 매니저들은 넘쳐난다.
내 뜻을 알아차린 방상영 이사가 아차 하고 내 입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의 승낙이 더 빨랐다.
“대신 실패하면 방 이사의 질책이 커질 수 있을 텐데 괜찮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니까요.”
강감찬 대표가 방상영 이사를 본다.
“방 이사는 어때. 조건 받아들일 건가?”
방상영 이사가 당했다는 듯 이를 빠드득 간다.
“대신······ 이번 일은 주주님들께도 보고드리겠습니다. 실패 시 굴렁쇠가 받을 피해가 너무 큽니다. 아직 검찰 조사와 뇌물 사건에서 벗어난 여파가 남아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래.
일러바치고 싶으면 일러바쳐라.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정 팀장에게 전권을 주도록 하지.”
강감찬 대표만 빼고 모두가 불안해하는 눈빛이었지만 난 두렵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보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 * *
회의를 끝내고 나온 뒤.
즉각 서재일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콕 짚어서 공학범 감독의 비리에 얽힌 사람들의 명단과 죄명을 제보하자 서재일 검사가 깜짝 놀라 답한다.
-확실한 겁니까?
“예. 공 감독님의 오른팔인 최진성 실장의 자금 내역을 파보시면 금방 나올 겁니다. 그 사람이 공학범 감독의 돈을 관리합니다.”
서재일 검사가 잠시 대답을 멈추더니 알겠다며 대답한다.
-좋습니다. 이 사건 제가 접수했습니다. 일단 후배 검사들을 통해 상황을 알아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순간 난 곧장 다이어리를 펼쳐 일정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30일]
-PM 10:00 [NEW. 이태풍] <지리산> 제작 일정 연기 발표.
“아직은 안 사라지는군.”
서재일 검사에게 제보까지 했는데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소리.
아무래도 회귀 전 이 문제를 터트린 강인한 기자를 만나 봐야겠다.
검찰이 잘하는 것과 기자가 잘하는 건 따로 있으니까.
난 즉각 같은 중간일보의 기자인 최소혜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압구정 한식당 ‘꽃길’.
투명한 아크릴 바닥 밑으로 온갖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따라 예약한 7번 방으로 향했다.
최소혜 기자는 자신의 선배인 강인한 기자를 불러 함께 와 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운동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그는 다부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소혜 기자가 날 반기며 손을 든다.
“왔어?”
이번 사건은 사회부와 문화부가 공동으로 취재할 건이었기에 두 사람 모두 함께 있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강인한 기자가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쪽이 우리 최 기자가 반한 남자야?”
“선배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이만한 정보통이 없으니까 괜히 자극하지 마.”
최소혜 기자가 으르렁 대자 강인한 기자가 몸을 웅크린다.
“알았어. 알았다고. 누가 보면 지 남친인 줄 알겠네.”
“선배!”
최소혜 기자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강인한 기자가 몸을 웅크린다.
“쏘뤼~ 그럼 제보나 듣자.”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저 오늘 밥도 못 먹었습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아직 밥도 못 먹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난 밥부터 시켰다.
밥이 나오는 동안 강인한 기자가 내 호구 조사를 하려 했지만 되려 내게 공격을 당하고 깨갱거렸다.
“올해 나이 38살. 대천 대학교 사학 비리 취재 꿈길 미술관 비리 사건 취재 아 맞다. 그건 편집장님 선에서 커트 되셨죠?”
강인한 기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이 친구?”
“그만큼 제가 드리는 정보가 확실하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강인한 기자가 최소혜 기자를 쳐다본다.
최소혜 기자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저라면 의심할 시간에 제보를 파 보겠어요. 애초에 내가 보장한다고 했잖아요. 엉터리 정보를 물고 올 사람은 아니라고.”
“휴우.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강인한 기자가 그제야 의심을 버리고 내 제보에 귀를 기울였다.
공학범 감독 그리고 그의 오른팔인 최진성 제작실장 그리고 영진위의 실세 강상수 본부장이 얽혀 있는 횡령 건에 대해서.
“셋 다 서예종 출신으로 막역한 관계입니다.”
내가 세 사람이 주로 만난 장소 같이 진행한 사업에 대한 정보를 풀자 강인한 기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 팀장. 앞으로 나랑도 좀 친하게 지냅시다.”
순간 최소혜 기자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렸다.
“선배! 내 꿀단지 탐내지 말라니까?”
기껏 한식 코스 요리가 테이블에 펼쳐졌지만 두 사람은 음식이 아닌 날 보며 군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 * *
오후 6시 50분.
지방을 돌며 순회를 마친 이태풍이 서울에 도착했다.
난 곧장 이대호 매니저에게 시켜 이태풍을 칠성병원 VIP 병실로 입원시켰다.
지난 한 달간의 투어로 고생했으니 VIP 병실에서 링거나 맞으며 푹 쉬라고.
그런데 10분도 되지 않아 이대호 매니저가 까톡을 보내왔다.
VIP 병실에서 이태풍이 눈감고 링거를 맞는 사진 여섯 장을 포함해서 말이다.
“메이크업 끝내주네.”
사진 속 이태풍은 죽기 일보 직전의 병자처럼 보인다.
입술은 파리하고 이마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찌나 메이크업이 실감 나는지 문병이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대호 형님도 제법 매니저답게 일 처리를 하시네.”
이 정도 사진이면 누구한테 보여도 의심은 못 할 터.
공학범 감독과 만나기로 한 건 오후 7시.
아직은 시간 여유가 있다.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실로 올라가며 이태풍에 관한 기사들을 검색했다.
[<경계 너머로> 10월 19일 관객 수 975만 명. 내일 천만 관객 확실!]
[인생은 한 방이다! 이태풍. 첫 주연으로 천만 배우 등극!]
[거장 공학범. 이태풍의 연기를 극찬. 꼭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혀.]
‘얼씨구?’
공학범 감독 벌써 태풍이의 인기에 숟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예술 영화에 관심이 없는 대중의 시선을 잡기 위해 이태풍의 이름을 이용하겠다는 속셈이다.
“하여튼 양심도 없는 인간.”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의실로 향했다.
* * *
먼저 와 있던 신종기 대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맞았다.
“정 팀장. 태풍이는 어쩌고 혼자 왔나? 공 감독님이 잔뜩 기대하고 계시다던데.”
“태풍이는 못 옵니다.”
신종기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아무리 공학범 감독의 작품이 꺼려진다 해도 얼굴도 보이지 않고 거절하는 건 무리수가 아니냐는 거다.
“정 팀장. 공 감독을 설득하려면 그래도 태풍이는 데려와야지.”
아무래도 공학범 감독을 꺾기 전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신종기 대표부터 꺾어야겠다.
순간 난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CK 엔터테인먼트 손형태 대표와 손을 잡은 게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된다.
“신 대표님. 내키지 않으시면 ‘지리산’ 제작은 다른 곳이랑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곳이라니? 설마? 손형태 그놈이랑?”
“예. 손형태 대표님께서는 어떤 압력도 다 막아주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손형태 대표와 라이벌 의식이 있는 신종기 대표가 대번에 발끈한다.
“답답한 소리! 그 말을 믿나? 손형태 그 인간 자기 일이 아니라고 뻥카 날리는 거잖아!”
사실 나 역시 그 말에 동감이다.
손형태 대표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편하게 대답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신종기 대표의 신경을 긁을 때다.
모르쇠로 귀를 막고 CK와 함께 일하겠다고 말하자 결국 신종기 대표가 한발 물러났다.
“아 알았어! 공 감독님 힘도 예전 같지는 않으니까 내 최대한 버텨 보지. 그러니까 CK에 간다는 소리나 하지 말게!”
신종기 대표가 꺾인 순간 난 능청맞게 웃음을 지었다.
“가긴 누가 갑니까? LT 엔터와 저희 굴렁쇠 사이의 의리가 있는데.”
“말이나 못 하면!”
그때였다.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문이 열린다.
“우리가 좀 늦었나?”
올해 70살인 거장 공학범 감독은 짙은 오크색 파이프를 물고 베이지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곁엔 감독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올해 57살의 최진성 제작실장이 함께였다.
순간 난 스마트워치의 녹음 앱을 작동시켰다.
입이 걸기로 유명한 두 사람은 말실수를 하고도 남을 테니 말이다.
* * *
LT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
자리에 앉은 공학범 감독은 대뜸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부터 묻는다.
“여기 담배는 못 피우나?”
이미 건물 내 금연이 된 지는 오래였지만 신종기 대표는 ‘옛날 사람’인 그를 위해 재떨이를 내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감독님!”
파이프 담배 속을 채운 공학범 감독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휴우~”
만족한 공학범 감독이 주변을 쳐다본다.
“태풍이는?”
신종기 대표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오디가 컨디션이 나빠져서 병원에 잠시······.”
순간 공학범 감독의 오른팔인 최진성 제작실장이 화를 내며 말을 끊는다.
“천하의 공학범 감독님이 오라고 했으면 기어서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종기 대표가 이를 꽉 깨문다.
공학범 감독의 위세를 빌린 제작실장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내킬 리가 없다.
신종기 대표는 한국 영화 배급사 2위이자 대기업 계열사 LT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였으니까.
다만 공학범 감독이 영화계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참고 있었다.
하지만 난 참을 생각 따위는 없다.
한때 대한민국을 호령했던 원로 영화감독과 그의 파트너라지만 지금은 범죄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난.
이태풍과 박선재 감독을 위해.
이 쓰레기들을 영원히 치워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