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9화
359. 선물 1
중국에서의 이튿날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오니 주영인과 안영희 실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주영인 : 오빠. 한국에 돌아가면 선물 드릴게요.]
[안영희 실장 : 방금 영인이 일정 시작했어요. 한국에서 임 대표님이 보낸 사람들도 도착했고요. 그리고 어제는 고마웠어요 정 팀장님 아니었으면 영인이가 큰 곤란을 겪을 뻔했어요.]
어지간한 연예인이라면 스케줄을 펑크 내고도 남았을 텐데 주영인은 탑스타답게 스케줄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답변을 준 뒤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곧 왕룽의 아버지와 링링의 양친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왕룽의 아버지는 선전시의 부서기로 지금도 대단한 권력자지만 앞으로는 중국 전체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거물로 성장하는 분이다.
반면에 링링의 부모에 관해서는 큰 사업을 한다는 것 말고 아직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떤 복장을 하고 가는 게 좋겠나 고민하던 난 늘 입던 정장을 골라 입었다.
아침 8시.
왕룽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어 왔다.
-일어났어?
“어. 지금 막.”
-그러면 호텔 로비로 나오면 돼.
“오케이. 바로 내려갈게.”
난 서연우에게 링링의 트레이닝 일정이 담긴 서류를 챙기라고 한 뒤 로비로 향했다.
로비로 내려가자 왕룽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함께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잠은 잘 잤고?”
“덕분에.”
“구 기자는 아침에 공항에 보냈어.”
“어디 부러진 데는······ 없지?”
왕룽이 씨익 웃는다.
“그냥 밤새도록 무릎만 좀 꿇려뒀어.”
“밤새도록?”
“어. 그래서 갈 때는 휠체어로 실어다 줬어. 아참 화장실도 못 가게 했더니 조금 지린 거 같더라.”
왕룽은 철저히 중국식(?)으로 대하려다 많이 봐준 거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왕룽이 중국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게 조금 실감이 났다.
호텔 로비를 통과해 입구로 나가자 롤스로이스 리무진과 벤츠 스프린터와 함께 앞뒤로 경호 차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경호 차량. 롤스로이스는 링링네 아빠가 보내준 거고 벤츠 스프린터는 우리 아버지가 보내준 거고.”
거대한 차량 2대와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니 더욱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 권력자를 만나러 간다는 게 말이다.
* * *
상하이 외곽으로 약 15분 거리에 성과도 같은 거대한 저택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가자 베르사유 궁전같이 아름답고 넓은 정원이 있었다.
‘엄청나네······’
대략 가로세로 각각 300m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의 정원에는 5m 정도의 커다란 12지신상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에는 넓은 인공 호수가 있어 팔뚝만 한 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웅장한 규모의 집은 처음이다 보니 동행한 서연우는 반쯤 영혼이 나간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우린 기다리고 있던 집사의 안내를 받고 집으로 들어갔다.
청나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도자기들이 아크릴 케이스에 담겨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청난 부를 가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들이 곳곳에 잔뜩이었다.
“다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넓은 응접실의 한가운데 왕룽의 아버지 왕민 부서기가 앉아 있었다.
선전의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왕민 부서기는 남자다운 얼굴에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왼쪽에는 왕룽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중국에서 유명했던 연예인이라고 하더니 여전히 그 미모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왕룽의 어머니 곁으로는 링링과 릴리 그리고 링링의 두 분 부모님도 함께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손님맞이를 위해 제대로 된 양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들이다.
정장을 입고 오길 잘했다.
“저희 왔어요. 아버지.”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왕룽과 함께 인사를 하자 왕민 부서기는 내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았다.
“이렇게 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왕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오래간만에 아들 친구가 왔기에 반갑게 맞이하는 건데 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말 한마디도 안 하시고 인상만 쓰시더니······.”
“그놈들은 친구가 아니라 우리 집안 도움이나 받을까 해서 줄 선 놈들이니까 그랬었지.”
그 순간 왕룽의 어머니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왕룽. 네 아버지가 어색해서 저러시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 그리고 윤호 군. 어서 와요.”
“아 아닙니다. 어머님.”
“호호. 어머니라니. 그 소리 듣기 좋은데요?”
왕민 부서기가 헛기침을 하며 링링의 부모를 가리켰다.
“여기 우리 사돈과도 인사들 하지. 사돈 내외께서도 윤호 군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링링의 부모가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딸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나도 서연우를 두 부부에게 소개했고 링링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째 딸의 선생이 되어줄 서연우를 극진히 맞이했다.
긴 인사가 끝나자 왕민 부서기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아. 예.”
“전화로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는 날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대해줬으면 좋겠구나. 언제든 힘든 일이 있으면 연락하고.”
왕민 부서기의 말이 길어지자 왕룽이 툴툴거린다.
“아버지.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그래. 일단 식사부터 하지. 아침이니까 간단하게 내어 오게.”
“예.”
왕민 부서기가 손짓을 하자 집사가 전화를 건다.
“지금 바로 가져오도록!”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3분도 되지 않아 카트에 음식이 실려 나오기 시작했다.
식전 요리로는 실처럼 가늘게 썬 중국식 냉채와 맑은 국물의 제비 둥지 요리인 청탕연와(清汤燕窝)가 나왔다.
그때부터 은대구구이 베이징덕 각종 버섯으로 만든 요리부터 불도장(佛跳墻)까지.
각각의 화려한 요리들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그릇에 담겨 하나둘 나오고 있었다.
마치 국빈 만찬에서나 볼 법한 요리의 가짓수는 무려 30개 이상.
‘아침이니까 간단하게 먹자고 해놓고서는······.’
중국인 특유의 허세가 묻어나왔지만 아들을 구한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확실히 와닿았다.
그래서 난 감사한 마음으로 중국식 예절에 맞춰 식사를 들었다.
“역시 문화계에서 일해서 그런지 테이블 매너가 익숙하군.”
“과찬이십니다.”
단지 회귀해서 아는 것뿐이지만 날 향한 왕민 부서기의 호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 * *
거창한 식사를 끝내고 차가 나왔다.
중국 특유의 뚜껑이 있는 도자기 찻잔을 열자 뜨거운 김이 올라온다.
색은 짙고 무향 무미에 가까운 보이차였는데 청나라 시절 황제가 즐겨 마시기로 유명한 차였다.
“보이차는 정말 오래간만에 마셔보네요. 방금 먹은 산해진미보다 이 한 잔이 훨씬 귀한 대접 같습니다.”
왕민 부서기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국에서도 보이차를 마시나?”
“보통 일반인들은 잘 마시지는 않습니다만 전 몇 번 마셔본 적이 있어서 조금 아는 척을 해 봤습니다.”
중국에서 보이차는 곧 돈이다.
오랜 시간 잘 보관한 보이차는 마시고자 함이 아니라 뇌물 용도와 투자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920년산 보이차는 한 덩이에 2억이 넘어가기도 한다.
지금 마시는 건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차를 구하기 위해 왕민 부서기는 엄청난 돈을 들였음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민 부서기가 자랑을 하듯 말한다.
“지금 나온 차는 1950년에 수확한 인급(印級) 보이차일세. 한 덩이에 한국 돈으로 1억 정도지만 50년을 묵히면 3배는 너끈히 뛰지. 마음에 들면 귀국할 때 몇 덩이 챙겨가게.”
하마터면 마시던 보이차를 내뱉을 뻔했다.
‘수억이 넘어가는 오래된 차를 들고 가서 어쩌라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왕룽의 어머니가 남편을 타박했다.
“그런 것 말고 도움이 되는 선물을 해야죠.”
“크흠. 차도 주고 딴 것도 주면 되지 않을까?”
“여보!”
“알았네. 알았어.”
왕민 부서기가 헛기침을 하며 날 쳐다본다.
“그래. 내가 말한 대로 부탁할 걸 생각해봤나?”
왕민 부서기에게 할 부탁을 말해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된다.
‘장웨이 회장을 막아달라는 것’이 쉬운 부탁은 아니었으니까.
고민이 길어지자 왕민 부서기가 먼저 말을 꺼낸다.
“흐음. 고민이 되는가 보군. 그러면 이렇게 하지. 여기 리 사장과 내가 각각 선물을 먼저 말해줄 테니 생각한 거랑 비교해보고 편히 말해주게.”
그와 동시에 왕민 부서기와 리커준 사장이 웃으며 각자 선물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말한 선물들은 내가 상상한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모였다.
* * *
먼저 왕민 부서기가 웃으며 자신의 선물을 꺼냈다.
“자네가 선택한 드라마나 영화는 내년부터 1년에 1개씩은 걸어주지.”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 수출국은 막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을 노린다.
하지만 당의 검열을 받는 중국 시장 진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많은 검열에 재검열.
거기다 뇌물에 꽌시(關係)를 총동원한 후에야 중국에 콘텐츠를 수출할 수 있다.
그런데 왕민 부서기는 아무런 제약도 없이 내가 직접 드라마를 수출할 수 있는 판로를 뚫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한한령이 있는데도 말이다.
그에 질세라 곁에 있던 리커준 사장이 말한다.
“사돈어른의 선물보다는 초라하지만 난 기획사를 설립할 자금 지원을 해주지. 한국에 설립한다면 자본금 30억 정도. 중국에 설립한다면 5천만 위안 정도까지는 지원해 주겠네.”
리커준 사장이 자본금은 그냥 주는 돈이라며 이후 투자액은 자본금의 10배로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배타적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중국인이지만 가족이라 생각하니 무조건 퍼주려 하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
솔직히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제안은 받을 수가 없었다.
김동수와 그의 정보팀인 백 대령의 존재 그리고 최만식 대표가 있는 한 우선순위는 분명했으니까.
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관대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왕민 부서기가 재미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가? 그러면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딴에는 여기 리커준 사장이랑 머리를 맞대 마련한 선물이었네만······ 대체 어떤 부탁이길래 우리 선물을 거절하는지 궁금하기까지 하군.”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저야말로 들어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애당초 왕룽과 릴리를 구한 것도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운이었습니다.”
“운이라······.”
혼잣말하던 왕민 부서기가 리커준 사장을 쳐다본다.
“용장은 지장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은 덕장을 이기지 못하고 덕장은 복장을 이기지 못한다지요.”
리커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복장을 만났나 봅니다.”
두 사람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대화를 끝낸 왕민 부서기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고 있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병법 아닙니까?”
“우리 중국인은 능력 있는 자보다 운이 따르는 자를 선호한다네. 자네가 꿈을 꿨든 점을 쳤든 간에 내 아들과 며느리를 구한 건 사실이지. 그게 운이라면 어떤가? 결과가 중요한 것을.”
“뭐든 기탄없이 말해 보게. 대체 우리에게 뭘 바라는가?”
두 사람의 재촉에 결국 나는 바라는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장웨이 회장을 견제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현재 내 적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인물이 바로 장웨이 회장이다.
장웨이 회장과 그의 뒤를 지키는 당 고위직의 힘은 그야말로 황제도 부럽지 않은 수준.
김동수의 정보팀인 백 대령도 신경이 쓰였지만 그쪽은 최은태 회장이 맡기로 했다.
그러니 만약 장웨이 회장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
난 장웨이 회장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김동수는 백 대령의 비싼 몸값을 감당하지 못해 정보를 구하는 게 힘들어지게 되고.
하지만 내 부탁을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 *
잠시 아무 말 없는 적막이 흘렀다.
그러기를 대략 3분.
리커준 사장이 왕민 부서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서기님. 우리 은인이 생각보다 상당한 거물인가 봅니다.”
“그러게요. 천하의 장웨이 회장을 견제해 달라니. 대단한 배포 아닙니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으려니 왕민 부서기가 날 쳐다본다.
“솔직히 말하지. 장웨이 회장은 나로서도 힘든 상대일세.”
공산당 최고 간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장웨이 회장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물러나는 수밖에.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장웨이 회장을 막는 건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자네 내 말을 오해했나 보군. 힘들다고 했지 못 한다고 하진 않았는데?”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한 줄기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