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6화
356. 주영인 2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 본사로 향하던 차 안.
왕민 부서기에게 할 무거운 부탁을 왕룽에게 미리 털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왕룽이 고심에 빠졌다.
“장웨이 회장을 견제해 달라 부탁할 거라고?”
“어. 내 경쟁자인 김동수 실장이랑 장웨이 회장이 손을 잡았거든.”
장웨이 회장이 김동수의 뒷배가 된 이상 두 사람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엄청난 성과였다.
돈줄이 마른 김동수는 백 대령의 정보를 쉽게 얻지 못할 테니 말이다.
“쓰읍~ 그쪽은 베이징 파벌인데······.”
장웨이 회장은 베이징 파벌의 고위 당 간부가 뒷배라며 왕룽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왕룽의 아버지 왕민 부서기는 상하이 쪽 파벌이라 왕룽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좀 힘들까?”
왕룽이 고개를 젓는다.
“난 정치 쪽은 잘 모르니까 이건 아버지한테 직접 말씀드려봐야지 답을 알 것 같아. 어차피 네 부탁이 안 된다면 안 된다고 하시고 다른 걸 제시할 분이니까 부담 없이 말해봐.”
부담이 없을 수야 있나.
지금만 하더라도 선전시 부서기였지만 앞으로 7년 뒤에 중국 공산당 서열 9위로 올라가 주석 후보군에 들어가게 될 거물이 되는데.
가끔은 이렇게 미래를 안다는 것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 사정을 모르는 왕룽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다~ 알지? 꼭 말씀드려 봐.”
“알았어. 말씀드려 볼게.”
“오케이. 그러면 일단 저기~ 꼰대들이랑 일부터 처리할까?”
왕룽이 멀리 보이는 상하이 뉴미디어의 본사 건물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중국에 오기 전 들었던 부대표 일파와의 파벌 다툼에 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대표 그 인간이······.”
* * *
상하이 뉴미디어의 본사 건물.
굴렁쇠 엔터의 10배 면적에 50층짜리 건물 5개가 세워져 있다.
얼마나 큰지 한국 10대 재벌의 본사보다 더 큰 건물이다.
왕룽의 뒤를 따라 스카이라운지를 방불케 하는 50층 회의실로 들어가자 주영인과 안영희 실장을 비롯해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주호연 대표가 모여 있었다.
50대 중반의 주호연 대표는 후덕한 체형에 선한 인상이었다.
“먼 길 오셨습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저희 대표님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보낸 선물이 홍삼인 걸 확인하자 주호연 대표의 얼굴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회귀 전의 정보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을 미리 알고 준비했기 때문이다.
“명인이 직접 제조한 수제 홍삼입니다.”
“허! 이런 귀한 선물이라니. 꼭 감사하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이어 주영인도 내 조언대로 선물을 내밀었다.
“전 한국 전통주인 문배주를 가져왔습니다. 대표님이 독주를 즐기신다기에 가장 독한 걸로 준비했습니다.”
내가 통역을 해주자 주량을 과시하는 걸 즐기는 주호연 대표의 얼굴이 다시 한번 밝아졌다.
“아주 내 마음에 쏙 드는 선물입니다!”
주영인과 내가 건넨 선물에 만족한 주호연 대표가 오늘 미팅은 잘 될 거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했다.
그리고 우린 주영인이 출연하게 될 <전장의 늑대> 감독 장태윤이 오기를 기다리며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통역하기 10분 정도.
비서가 들어와 장태윤 감독과 덩차오 부대표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들어오시라고 전하게.”
“예. 대표님.”
비서가 나간 후 1분도 되지 않아 덩차오 부대표가 장태윤 감독과 함께 나타났다.
덩차오 부대표는 최고급 양복을 빼입고 있는데 몸 관리에 신경을 쓰는지 날렵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장태윤 감독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중국에서 오래 자란 장태윤 감독은 아버지가 한국인이지만 어머니가 화교 출신으로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께 사용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자 즉각 계약서가 펼쳐진다.
이미 모든 업무 협의는 끝내놓았기에 계약서에는 장태윤 감독의 사인만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주영인이 장태윤 감독의 전작을 다 봤다며 분위기를 띄웠지만 장태윤 감독의 표정이 굳어 있다.
분명 그저께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여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게 되었다며 즐거워했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설마 계약 자체를 파투내려는 건가?’
왕룽에게 오기 전 파벌 싸움이 심하다는 걸 들었다.
그런데 계약조차 안 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장태윤 감독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국어로 대답한다.
한국어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이 계약. 지금 바로 해야 합니까?”
회의실의 분위기가 싸해진다.
동시에 주호연 대표가 버럭 화를 낸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장 감독!”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주영인도 분위기만으로도 뭔가 잘못 돌아가는 걸 깨닫고 불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난 미소를 지어 주영인을 안심시킨 뒤 장태윤 감독에게 말을 꺼냈다.
“감독님. 저번에 전화로 인사드렸던 정윤호라고 합니다.”
“아 예. 그렇습니까?”
통화까지 해놓고도 시치미를 뚝 뗀다.
“영인 씨가 주연을 맡게 되면 그 어떤 여배우보다 열심히 할 거라는 건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머리도 깎고 몸을 아끼지 않은 연기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건 아시죠?”
장태윤 감독이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요. 오늘 자 한국 신문을 보니 가장 반응이 뜨거운 건 정유진 씨 같던데······. 조연에게 연기로 밀린 배우가 말도 안 통하는 중국 영화에서 주연을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갑작스러운 장태윤 감독의 어깃장을 보다 못한 주호연 대표가 나섰다.
“장 감독! 당신 갑자기 왜 그래? 언어 문제는 성우 쓰기로 했잖아. 그리고 주영인 씨가 주연을 맡아 준다고 좋아했었잖아!”
장태윤 감독이 어깨를 으쓱인다.
“그거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배우 위상이란 게 매일 같을 수도 없는 거니까요.”
장태윤 감독이 이렇게 어깃장을 놓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덩 부대표의 지시대로 태클을 걸겠다 이거지?’
덩차오 부대표의 라인은 수익 분배 비율에 불만을 품고 있다고 왕룽에게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장태윤 감독은 그렇게나 좋아했던 주영인도 탐탁지 않은 듯 시간을 끌고 있었다.
애당초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그 정도가 노골적이다.
하지만 중국의 첫 번째 일정부터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봅시다.’
난 계약서에 사인도 하지 않고 어깃장을 놓고 있는 장태윤 감독을 향해 말했다.
“주영인 씨는 칼을 갈고 중국으로 왔습니다. 장 감독님과 손을 잡고 걸작을 만들어 내겠다고요. 그런 배우를 진짜 놓치실 생각입니까?”
장태윤 감독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대로 어제 한국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 <신의 이름으로>의 주연을 놓치는 건 그로서도 아까운 일일 테니까.
내 압박이 통했는지 장태윤 감독이 슬쩍 덩차오 부대표를 쳐다본다.
덩차오 부대표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장태윤 감독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막 가는 수밖에.
난 장태윤 감독을 노려보며 준비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좋습니다. 만약에 주영인 씨가 필요 없으시다면 전 에이전트로서 계약을 중단시키고 바로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북경 미디어에서 제작 중인 양양 감독님의 작품인 ‘왕가지몽’의 주연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겠습니다!”
양양 감독은 장태윤 감독의 평생 가는 라이벌이다.
회귀 전에도 끝까지 서로를 디스하고 상대 작품을 깎아내리던 사이였고.
양양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장태윤 감독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다급했는지 이번엔 한국말이다.
“아 아니 잠깐만! 양양이라고 그랬습니까?”
“예.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주영인이 양양 감독의 여주인공을 맡는 순간 양양 감독은 엄청난 거드름을 피울 거다.
언론 플레이에 능한 양양 감독이라면 장태윤 감독을 향해 주영인의 가치를 몰라본 무능한 감독이라며 힐난할 게 뻔하니까.
눈이 삐었다든지 그러니까 장태윤은 나보다 한 수 아래라던가.
온갖 사람 염장을 저지르는 말로 장태윤 감독을 깎아낼 게 확실했다.
내 말에 흔들린 장태윤 감독이 대번에 입장을 바꿨다.
“뭐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방금은 주영인 씨의 각오를 보기 위해 도발을 해본 것뿐입니다!”
순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도 속아줘야 했다.
사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의 조건이 훨씬 더 좋은 편이었으니까.
“그러면 계약하실 겁니까?”
“예. 당장 합시다!”
장태윤 감독이 당장이라도 사인할 듯 계약서를 펼쳤다.
그 순간 덩차오 부대표가 날 선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장 감독님. 감독님은 수익 배분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사인하려던 장태윤 감독의 손이 멈칫한다.
“크흠. 그거야 뭐······ 없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애당초 장태윤 감독이 덩차오 부대표에 동조한 건 자신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든다 생각했기 때문.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굴렁쇠 간의 5:5 계약은 장태윤 감독에게도 적용되니까.
덩차오 부대표가 던진 도발에 주호연 대표가 끼어든다.
“부대표. 적당히 좀 하지? 이미 결정 난 일을 왜 그렇게 왈가왈부하고 그래?”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주호연 대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대표 역시 따로 뒷배가 있었다.
그렇기에 주호연 대표가 마냥 찍어누르기에는 만만치가 않은 상대였다.
물론 왕룽이 아버지의 힘을 빌린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지만 그 힘을 빌리기엔 또 너무 소소한 일이었다.
덩차오 부대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솔직히 저희가 중국 내 방송권과 배급망을 다 가지고 있는데 수익의 절반이나 내주는 게 말이 됩니까?”
중국으로 넘어갈 때 한국 기획사들이 8 대 2나 9 대 1의 계약을 받아들이는 건 이유가 하나였다.
땅이 넓은 중국 시장을 일일이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 연예기획사에서 곳곳에 뿌려둔 인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아예 방송조차 못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 내 엔터 회사들은 한국 회사와의 계약에서 온갖 갑질을 하기로 유명했다.
주호연 대표는 이를 악물며 덩차오 부대표를 압박했다.
“자네는 굴렁쇠 엔터에 좋은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압니다. 하지만 당장은 한한령 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잖습니까?”
난 불만 가득한 덩차오 부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부대표님 말씀은 굴렁쇠는 상하이 뉴미디어의 힘이 없이는 중국 진출이 힘들다고 하시는 거죠?”
덩차오 부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게. 솔직하게 현실을 말한 거니까. 그리고 우리도 중국 내 라인을 깔기 위해서 쏟아부은 돈이 어마어마해. 당연히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도 어마어마하고.”
“정말로 굴렁쇠가 상하이 뉴미디어의 도움 없이는 중국 시장에 진출하지 못할 거라 보십니까?”
덩차오 부대표가 코웃음을 친다.
“당연하지. 이곳 중국 시장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당신네가 톱스타를 데리고 있다고 해도 중국 내 배급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돼. 그게 현실이야.”
“알겠습니다.”
그 순간 난 기다렸다는 듯 왕룽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룽 본부장님. 제가 화연 미디어에서 받은 제의. 부대표님께 말씀드린 적 없습니까?”
“아뇨. 아직 저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말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군요.”
왕룽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덩차오 부대표를 쳐다본다.
“화연의 장웨이 회장이 정 팀장을 스카우트하려고 백지 수표를 들이밀었다고 하더군요.”
순간 덩차오 부대표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보다 몇 배나 더 규모가 큰 화연 미디어 그룹의 장웨이 회장이 직접 날 스카우트하려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 그게 사실인가?”
“화연 측에 심어둔 인사들을 통해 교차 검증을 해본 결과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굴렁쇠는 저희가 아니더라도 화연을 통해 이곳 중국 시장으로 얼마든지 진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 정 팀장을 통해서!”
그와 동시에 날 쳐다보는 덩차오 부대표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오만한 장웨이 회장이······ 이 친구를?”
덩차오 부대표의 위치는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연예 사업 분야의 부대표이다.
그런데 화연 미디어 그룹의 장웨이 회장이라면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회장보다 한 수 위의 거물이었기에 덩차오 부대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왕룽은 왠지 신이 난 표정으로 덩차오 부대표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심지어 장웨이 회장의 오른팔인 류신 실장이 직접 한국을 찾아가 스카우트를 시도했다고 하더군요. 의심이 가시면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왕룽의 말이 이어질수록 덩차오 부대표의 말이 더듬거린다.
왕룽이 잘 토스해 줬으니 이젠 내가 스파이크를 때릴 차례였다.
난 웃으며 덩차오 부대표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뭐 정~ 내키지 않으시면 아예 굴렁쇠와의 계약도 파기하시죠. 단 잘못은 상하이에 있으니 위약금을 주셔야 할 겁니다.”
덩차오 부대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결국엔 주호연 대표가 끼어들었다.
“부대표. 거기까지 하지. 여기서 더 선을 넘어 정 팀장이 화연과 손을 잡게 된다면 난 오늘 일을 회장님께 보고드리겠네!”
덩차오 부대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회장은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대 대표님. 전 그저 우리 회사의 이득을 위해서······.”
“지금 무슨 말을 하든 조금 전 자네의 소인배 같은 실수는 덮지 못해. 차라리 입을 다물게!”
덩차오 부대표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떨궜다.
완벽한 나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