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5화
355. 주영인 1
팬 미팅과 <신의 이름으로>의 마지막 화 방영이 끝난 다음 날.
차은솔과 계약을 끝냈다.
실제로 일을 하는 건 대학 입학 발표 시점으로 정했다.
환대를 받으며 청주를 떠나 서울로 돌아온 나는 고작 세 시간만 자고서 서연우와 함께 인천 공항으로 왔다.
상하이 뉴미디어가 투자하는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전장의 늑대>의 주연으로 주영인이 발탁되었기에 그 계약을 돕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컬 트레이너인 서연우를 중국으로 데리고 가 링링의 부모님과 만나 인사를 시켜야 했고 왕룽의 부모님도 만나야 했다.
거기다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우호적인 관계에 관해서도 회의를 해야 했고.
인천 공항 주차장에 차를 댄 나는 서연우와 함께 공항 입구로 향했다.
이미 공항 입구에는 주영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팬들이 줄지어 서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의 이름으로>의 대성공으로 인해 탑스타의 입지를 다진 주영인이 해외로 진출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인 언니. 언제 온대?”
“2시 30분 비행기라던데? 세 시간 전에는 공항에 와야 하니까 이제 올 때 됐어.”
“앞으로 5분 안에 오신대. 아까 이 매니저님한테 톡 받았어.”
“헐~ 이 매니저랑 갠톡해?”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여길 알고 찾아와?”
팬클럽 운영진으로 보이는 아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팬클럽 회원 양옆으로 삼각대를 세워놓은 기자들도 시간을 확인하며 주영인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주영인은 어제 끝난 <신의 이름으로>의 주연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은 11시 30분.
‘곧 오겠군.’
발권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뒤 서연우에게 말했다.
“주영인이 먼저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때 우리도 들어갈 거야. 비행기 타서도 서로 아는 척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예. 형.”
그런데 서연우가 공항 앞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근데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여기 와 있는 거예요?”
“에이스 엔터 측 매니저가 미리 알려준 거야.”
엔터 회사들은 회사 소속 연예인들이 출국하거나 입국을 할 때 팬덤에게 미리 고지를 한다.
출국 사진이나 입국 사진을 찍는 찍덕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기를 과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최대한 많은 팬들이 몰려든 사진이 찍혀야 인기의 척도를 대중에게 알려주는 거니까.
기자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같은 이유였고.
덕분에 플래카드를 든 팬카페 회원들은 화력을 보여줘야 한다며 아침부터 공항에 찾아와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왕룽에게서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곧 출발할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
“어 잠시 후에 비행기 타러 출국장으로 갈 거야.”
-아 그게 아니라······.
왕룽이 곤란한 목소리를 낸다.
“왜 그래?”
-우리 회사의 덩차오 부대표가 너랑 나랑 맺은 계약에 불만이 좀 많아. 감독으로 내정된 장태윤 씨도 부대표 라인이니까 알아두라고.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주호연 대표는 왕룽 본부장을 앞세워 굴렁쇠 엔터와 거래를 맺었다.
두 회사가 동등하게 5:5 계약을 맺었지만 부대표 덩차오와 주영인이 주연을 맡을 <늑대의 전장>의 감독인 장태윤 감독이 그 비율 배분에 불만이 있다는 정보였다.
“그러니까 굴렁쇠와 나한테 절반이나 떼 주기에는 아깝다 이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주 대표님이랑 내가 꾹꾹 눌러둬서 대놓고는 말 못 하겠지만 미리 알고 있으라고.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굴렁쇠 엔터는 회사의 매출 규모만 해도 족히 10배 이상은 난다.
그런 큰 회사와 수익 배분을 반반으로 계약을 맺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존심 강한 일부 경영진들은 이 일을 빌미로 왕룽은 경영자의 자질이 없다며 공격하기도 했다면서.
“네가 낙하산이라고 견제하는 측면도 있겠네.”
-어. 그렇지.
왕룽은 자신이 왕민 부서기의 아들이란 게 회사 내부에도 밝혀졌기에 최종 계약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난 그 티끌의 불만마저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 하려고?
“걱정하지 마. 내 친구 낙하산 소리는 절대 안 듣게 할 테니까.”
현재 굴렁쇠의 실적을 비롯해 나 자신을 증명할 카드를 몇 개 준비해 놓았다.
-하긴 너라면 그냥은 중국에 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믿고 있을게.
“오케이.”
그렇게 왕룽과의 전화를 끊고 난 이후 짧은 숨을 내쉬었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파벌싸움이 만만치가 않았다.
사람 사는 데 다 똑같다더니 중국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인천 공항의 입구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왔구나.’
주영인이 탄 흰색 밴이 들어오는 걸 발견한 팬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영인이다!!”
주영인이 핑크색 샤넬 투피스를 입고 차에서 내린 순간 팬들의 환호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꺄아아악! 언니!”
“언니! 여기 좀 봐주세요!”
“여기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는데도 주영인은 태연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얼굴로 팬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주영인은 자신이 찬 팔찌 귀걸이 브로치들을 잘 드러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주영인 정도의 탑스타가 되면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나 다름없었다.
신상 백에 신상 구두.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의 시작 전만 하더라도 주영인은 광고주들의 협찬은 받아도 드러내는 걸 귀찮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광고주’들을 향한 서비스가 끝내주고 있었다.
‘유진이한테 자극을 받았나 보군.’
유진이는 자신이 쓰는 광고 상품은 스타그램을 통해 늘 노출 시킨다.
덕분에 비공식적으로 광고주들이 좋아하는 연예인 1위였다.
그래서인지 최근 그 노출도가 광고비에 조금씩 적용되고 있었다.
주영인은 라이벌인 유진이에게 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무려 2분이 넘는 시간 동안 협찬 상품을 어필한 주영인이 액세서리를 가리며 두 손을 모았다.
쇼가 끝이 났다는 신호다.
순간 주영인의 매니저인 안영희 실장이 전투적인 태도로 인파를 헤치기 시작했다.
“자자. 기자분들은 좀 비켜주세요. 인터뷰 시간은 돌아오는 대로 따로 잡을 테니까. 저기 김 기자님! 사람 말 좀 들어요! 길 좀 막지 말고!”
이어서 공항 안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도 서둘러 달려와 주영인을 호위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가겠습니다.”
경호원들이 나서자 출국장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조금은 빨라졌다.
주영인이 티켓팅을 하고 출국장으로 나선 후 그제야 팬들이 아쉬워하며 소란을 끝냈다.
처음 보는 소란 탓인지 서연우는 반쯤 얼이 나가 있었다.
난 그런 서연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봐둬. 연우야. 앞으로 너도 겪을 일이니까.”
서연우가 눈을 끔뻑거린다.
“예? 제가요?”
“그래. 너 가수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거 기억 안 나? 널 성공시켜서 이것보다 두 배 정도 많은 팬들이 공항에 올 수 있게 해줄게.”
난 서연우를 가수로 데뷔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제야 서연우도 언젠가 스타가 되는 순간을 그리는지 주영인이 지나간 길을 다시 한번 눈으로 담고 있었다.
* * *
중국으로 가는 비즈니스석.
주영인이 끊어준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으로 8A와 8B 좌석에 앉았다.
주영인과 안영희 실장은 내 앞자리인 7A와 7B 좌석에 앉았고.
그런데 같은 비즈니스석 뒷열에 기자 2명과 주영인을 따라다니는 낯익은 ‘홈마’ 한 명이 보인다.
아직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이었기에 난 즉시 주영인에게 까톡을 보냈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녀의 에이전트니까.
[정윤호 팀장 : 7D 8D 좌석에 바로스타 종민석 신입 기자 연예올타임즈 구지암 기자입니다. 주의하세요.]
7D 석은 통로를 사이에 둔 7B 석의 바로 옆자리.
주영인은 7A 석이라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기자가 통로로 나와 일어서면 주영인이 뭘 하고 있는지는 볼 수 있었다.
[주영인 : 헐.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기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대요?]
[정윤호 팀장 : 뭐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개 돌리지 마시고 태연하게 구세요. 그리고 공항에 내리면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에서 경호원들이랑 사람들 나와 있을 테니까 빠르게 합류하시고요. 본사에서 뵙도록 하죠.]
[주영인 : 알았어요. 오빠. 아 근데 말이에요······.]
주영인이 까톡으로 뭔가 말을 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폰에서 위잉 하는 진동음이 울린다.
[알림 : 2020년 10월 18일 ‘정유진’의 새로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10월 17일.
내일 유진이에게 새로운 일정이 뜬다는 소리였다.
내 몸은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는데 말이다.
난 주영인과의 까톡을 멈추고 즉시 18일의 일정으로 다이어리를 넘겼다.
아무리 급해도 유진이보다 급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너무도 터무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18일]
-AM 09:00 [NEW. 정유진] 컨디션 저하로 인한 스케줄 취소. (화상 회의 내용 : 주영인과 정윤호 팀장의 열애 스캔들 기사 후속 처리 대응.)
원래 유진이는 내일 ‘중간일보’ 최소혜 기자와의 인터뷰가 잡혀 있다.
차은솔의 사진을 기사에 실어주는 대가로 한 인터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일로 그 인터뷰가 취소된단다.
‘주영인과 내가 열애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다이어리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에브리데이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주영인이 일부러 스캔들을 내는 건가?’
하지만 난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주영인이라면 중국에서 사상 최대의 도전을 하는 지금 이 순간 성공보다 감정을 따를 리는 없었다.
회귀 전 그녀와 내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그녀가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댈 때였으니까.
일단 그 가능성은 잠시 접어두고 기자가 허위로 기사를 쓸 가능성을 우선시했다.
내 대답이 늦어지자 주영인이 까톡을 보내온다.
[주영인 : 오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주영인의 까톡에 대답하려는 그때였다.
7D 석에 있던 바로스타 종민석 기자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까부터 주영인이 계속 까톡을 보내자 화장실에 가려는 척하며 화면을 훔쳐보려는 모양이다.
[정윤호 팀장 : 7D에서 기자 일어납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시죠. 폰 액정 가리세요.]
[주영인 : 그래요. 그럼 나중에······.]
주영인은 까톡을 끝냈다는 듯 태연히 폰을 집어넣었다.
‘바로스타’ 종민석 기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화장실로 향한다.
‘저 인간이 범인인가?’
현재 종민석 기자 이외에 구지암 기자와 유명 홈마 한 명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하지만 비즈니스석에 있는 일반인도 의심의 대상이다.
SNS에서 헛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대번에 기사가 뜰 테니까.
어쨌건 대체 누가 주영인과 날 스캔들로 엮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절대로 당할 생각은 없었다.
‘누군지 몰라도 걸리면 절대로 가만 안 둬!’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른 채 일어날 모든 경우를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이륙할 예정이오니······.”
안내 방송이 끝난 후.
시끄러운 엔진음 소리와 함께 내가 탄 중국행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중국 상하이 공항.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이라 빠르게 입국장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주영인이 수많은 중국 팬들에 둘러싸인 틈을 타 상하이 뉴미디어에서 마중 나온 사람과 만났다.
“여깁니다! 정 팀장님!”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가 내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왕룽의 부하 직원과 인사한 뒤 그 뒤를 따라가자 검은색 벤츠 스프린터 한 대가 공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차를 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검은색 스프린터의 뒷문을 열자 벤츠 스프린터의 넓은 뒷좌석에는 왕룽이 미리 앉아 손을 흔들고 있다.
“여~ 브라더. 왔어?”
“뭐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영인 씨 쪽은 누가 챙기고?”
“진짜 VIP는 이쪽이니까. 안 그래?”
왕룽이 웃으며 어서 올라타라고 한다.
차에 오르며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러면 영인 씨 쪽은 누가 맞으러 갔고?”
“걱정하지 마. 이번에 한국에서 온 손님들 동선은 우리 라인 사람들이 책임지기로 했어. 새로 이사가 된 분이 맡았어.”
“알았어.”
“자 그럼 출발~”
30분 거리의 상하이 뉴미디어 본사까지 가는 동안.
왕룽은 어제 있었던 <신의 이름으로> 완결 화의 시청률을 언급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39.5%를 찍냐? 한국 시청률은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우린 3%만 넘어도 대박인데······.”
중국은 3%만 해도 대박 5%만 넘어도 초대박의 범주에 든다.
중국에서 시청률 1%만 해도 서울시의 인구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국 현지에서 6%를 넘은 작년 상반기 시청률 1위 작품은 스트리밍 만으로 15억 뷰를 넘겼다.
주영인이 찍을 <전장의 늑대>를 공개할 스트리밍 사이트 ‘요우쿠’에서.
“인구수랑 방송국의 개수 차이가 나니까 그럴 수밖에.”
“하여간 그래도 축하한다. 뉴스만 봐도 연말 상 싹쓸이는 예약해 둔 당상이던데?”
“축하는 무슨. 유진이가 잘해서 그렇지 뭐. 그리고 상이야 뭐. 가능성이 높지.”
“그건 너도 인정하는구나?”
“당연하지. 신인상은 확실히 유진이 거지.”
그렇게 서로 덕담하던 도중 왕룽이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내일 우리 아버지랑 만나는 약속은 안 잊었지?”
“그걸 어떻게 잊어?”
왕민 부서기.
중국의 차후 실권자 중 한 명이 날 보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들의 은인으로 대하겠다며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요즘도 내 이야기 많이 하셔?”
“그래. 맨날 너 보고 싶다고 하셔.”
왕민 부서기의 엄한 얼굴을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지난주 왕룽에게 자기 아버지한테 받고 싶은 선물을 꼭 생각해 두라는 말을 다시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 부탁할 생각은 없었지만 현재는 꽤 어려운 부탁이 하나 생긴 상황이었다.
그 순간 왕룽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저번에는 부탁할 거 아무것도 없다더니?”
“생겼어.”
“뭔데?”
나보다 더 신나 하는 왕룽에게 왕민 부서기에게 할 부탁을 먼저 털어놓았다.
적어도 될지 안 될지 정도는 알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왕룽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