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3화
353. 차은솔 1
오후 5시가 되었다.
회사의 앞에는 유진이와 미소의 팬클럽을 합쳐 재탄생한 ‘유앤미’ 팬클럽 회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오늘 초청한 사람은 소극장의 규모에 맞게 150명 정도였다.
“매니저 오빠! 우리 언제 들어가요?”
팬클럽 회원들의 반복된 질문에도 이영진은 방실방실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는 5시 30분이긴 한데 소극장 정리되는 대로 입장하면 돼. 단 지정석 이외에는 앉으면 안 되고. 다들 알지?”
교복을 입은 팬클럽 회원들이 이영진을 보며 장난스레 투덜댄다.
“그냥 온 순서대로 들어가면 안 돼요? 저희가 제일 먼저 왔는데!”
“어 아무리 그래도 안 돼. 그러기에 미리 와도 소용없다고 했잖아.”
“헐~ 겁나 꼰대야.”
“그러게~”
꼰대란 말을 들었지만 이영진은 애써 화를 참았다.
“거기서 꼰대가 왜 나와? 나 올해 27살이거든?”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는다.
“그러면 젊은 꼰대!”
순간 도란희가 미성년자 팬클럽 회원들에게 다가갔다.
머리에 꽃 하나 달아도 될 만한 웃음을 짙게 머금고서 말이다.
“어머~ 우리 애기들~ 말 함부로 하면 소극장에 안 들여 보내준다? 아니면 오늘 하루 종~일 나랑 이 젊은 꼰대 오빠랑 담당 바꿀까?”
순간 이영진을 놀리던 팬클럽 회원들이 냉큼 입을 다문다.
도란희의 표정을 본 순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역시 도란희야······’
하여간 지정석 때문에 이영진을 비롯한 몇몇 매니저들이 곤란을 겪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팬클럽 회원들에게 지정석을 정해주지 않는다면 극장에 들어가며 앞 좌석을 차지하려다 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되어 버릴 거고.
그래서 좌석은 100% 추첨을 하되 함께 등록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같이 앉을 수 있게 배려를 해준 상태였다.
그렇게 줄을 정리하던 사이 까톡이 도착했다.
[러블리♡유진 : 오빠 10분 뒤에 도착해요!]
[미소천사♥ : 삼촌 나도 10분 뒤에 도착해요!]
[정윤호 팀장 : 일단 도착하면 지하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와. 차창 밖으로 고개는 절대 내밀지 말고.]
유진이가 창문으로 얼굴을 비추면 애써 세워놓은 줄이 흐트러질 수 있다.
그러니 차량 커튼을 가린 채 주차장으로 바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까톡을 끝낸 난 내가 맡은 미성년자 3명의 위치를 찾았다.
‘저기 있네.’
길게 늘어뜨린 줄 맨 끝자락에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유연과 이상은은 각각 ‘홈마’의 경험이 있다 보니 DSLR 카메라를 들고 왔다.
반면 차은솔은 기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아담한 컴팩트 디카를 들고 있었다.
차은솔은 아직은 ‘홈마’는커녕 그저 덕질하는 평범한 여고생일 뿐.
‘그러면 이제 어디 한번 낚아볼까?’
난 치솟아 오르려는 입꼬리를 억누른 채 미래의 탑 레벨 ‘홈마’를 픽업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길게 줄을 선 팬들의 끝에 내가 찾던 차은솔과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유연 이상은 차은솔.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세 사람은 오늘이 개교기념일이라 팬클럽 미팅에 겨우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유진이가 알아보기 쉽도록 사복의 가슴 부위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김유연이 차은솔의 카메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은솔이 너 카메라가 왜 그래?”
이상은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왕이면 돈 좀 더 써서 좋은 거 맞추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미래의 한국 탑 홈마에게 장비 지적질이라니.’
회귀 전에는 차은솔도 대포알 렌즈가 달린 디카를 가지고 다니긴 했었으나 그녀가 유명해진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
폰으로 찍은 사진으로도 수많은 커뮤니티를 들었다 놨다 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3년이나 남은 미래의 일이다.
친구들에 비해 작은 카메라가 부끄러운지 차은솔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돈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차은솔이 투덜대자 두 사람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한다.
“뭐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지.”
“그건 그래.”
차은솔의 어깨가 살짝 처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미래의 내 팀원이 기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으니까.
“유연이 상은이 그리고 은솔이지?”
김유연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 정 팀장님이다. 안녕하세요!”
김유연이 친근한 모습으로 방실방실 웃는다.
덕질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회사 매니저들과의 관계.
매니저들과의 친분이 있어야지 스케줄도 미리 알 수 있고 촬영할 때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니까.
하지만 조금 전 상황을 본 이상 김유연에게 좋은 자리가 나갈 일은 앞으로 없을 거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유진이의 팬이었기에 최대한 좋게좋게 말했다.
“상봉이가 바빠서 내가 저녁때까지는 케어할 거야. 그런데 유연이랑 상은이는 카메라 좋은 거 쓰네. 니들이 오늘 사진 담당이야?”
“예. 팬클럽 회장님이 저희보고 사진 담당하라고 하셨어요.”
팬클럽 회장은 ‘홈마’ 경험이 있는 두 사람에게 오늘 팬카페에 올릴 사진을 맡겼다.
“그러면 은솔이 너도 오늘 카페 사진 담당이니?”
차은솔이 고개를 젓는다.
“아뇨. 전 아직 실력이 안 되어서요. 그냥 저 혼자 소장하려고 카메라 가지고 온 거예요.”
마치 자신은 유진이의 사진을 카페에 올릴 자격이 없다는 말투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차은솔을 달랬다.
“좋아하는 사람을 찍는데 실력이 무슨 상관이야? 마음만 담기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차은솔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리고 이따가 사진 찍은 거 나한테도 좀 보내줄래?”
“제가 찍은 사진을요?”
“어. 유진이한테 주게. 아 미소한테도 줘야겠다.”
차은솔이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매니저 오빠!”
부족한 장비로 사진을 찍는다면 그 사람의 실력이 오히려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난 이참에 미래의 차은솔이 아니라 현재 차은솔의 실력도 확인할 생각이었다.
나는 차은솔의 기를 살려준 뒤 유앤미 회원인 김유연과 이상은에게도 당부했다.
“두 사람도 오늘 팬카페 올릴 사진 잘 부탁해?”
차은솔을 대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도 소중한 팬클럽 회원이었기에 다정하게 대했다.
그 순간 김유연과 이상은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예! 매니저 오빠!”
“저희만 믿으세요!”
연신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이제는 차은솔까지 끼워 어떻게 사진을 찍을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 * *
굴렁쇠 엔터의 지하 소극장.
지정석이 정해진 150명의 팬클럽 회원들이 모든 자리를 채웠다.
현재 시각 오후 5시 30분.
<신의 이름으로> 24화는 밤 10시부터 시청 시작이지만 그전에도 여러 행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규모 행사라 사회자를 섭외하지 않았기에 내가 MC를 맡았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예쁘고 내일도 예쁜 정유진과 반짝반짝 아침 햇살처럼 미소 짓는 정미소 입장입니다~”
난 조금은 과한 수식어로 유진이와 미소를 소개했다.
미소의 손을 잡은 유진이가 방청객석에 손을 흔들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진이는 머리에 백합 머리핀을 했고 유진이의 손을 잡은 미소는 핑크 드레스에 사과머리를 하고 있었다.
“언니! 오늘 너무 이뻐요!”
“누나! 여기 좀 봐주세요!”
“미소야 여기! 여기!”
“꺄아아악! 미소야!”
“미소 짱 귀엽다!”
‘유앤미’ 팬클럽 회원들은 합쳐 놓자 환호성이 2배나 커지고 있었다.
팬클럽 회원들은 카메라와 폰으로 유진이와 미소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유연과 이상은은 자신들이 들고 온 DSLR로 양측 복도 쪽에서 사진을 연속해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은솔은 아직도 사진을 찍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세팅이 끝났는지 차은솔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무대 위 유진이와 미소의 모습에 무섭게 집중한 차은솔은 흔들림조차 없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곁에서는 익룡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들이 울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재능이네 저거.’
차은솔의 사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가장 먼저 진행된 일정은 운영진 임명식이다.
팬클럽 운영진은 과거 ‘천호동 얼짱 버거 소녀’의 운영진 최상민 정아름 이지호가 맡았다.
닉네임인 버거맨 패티걸 양상추소년으로 말할 수 없었기에 다들 본명으로 임명장을 건넸다.
유진이가 먼저 임명장을 건넨 뒤 미소가 자기도 주겠다며 임명장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오빠! 언니!”
미소가 사과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임명장을 건넬 때마다 운영진 세 사람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렇게 임명식이 끝난 이후.
일렬로 줄을 서 팬 사인회와 포토 타임이 이어졌다.
유진이와 미소가 나란히 테이블에 앉은 채로 몰려오는 팬들과 손잡고 아이 컨택을 시작했다.
“이름이 뭐라고요?”
“우와! 이름 예쁘다 언니. 예~지~!”
유진이와 미소가 일일이 ‘친필’ 사인을 건네주자 팬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좋아한다.
그 이후 미소가 가장 기대했던 프로그램 시간이 되었다.
“자. 그러면 다음으로는 ‘미소가 만드는 어묵 따라 만들기’ 코너를 시작하겠습니다~”
미리 만들어 놓은 큰 어묵 반죽을 갖고 나와 비닐을 깔아둔 테이블 위에 놓았다.
미소가 식빵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테이블 앞에 섰다.
양손에 위생 장갑을 낀 미소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자~ 미소와 함께 어묵을 만들 다섯 명의 지원자만 받겠습니다!”
솔직히 여기까지 와서 ‘어묵 반죽’을 하고 싶을까 싶었지만 완전한 내 오산이었다.
“저요!”
“전 미소가 만든 어묵을 집에서 다 재현해봤어요! 저요 저!”
150명 중에서 30명 정도가 손을 들어 올린다.
그와 동시에 미소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더니 미소의 환호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소극장을 울린다.
“우와~~”
그 순간 마치 마법에 홀린 듯 지원자가 늘어난다.
“저 저도요!”
“팀장님! 저 안 뽑아주시면 오늘 집에 안 갈 거예요!”
미소는 연신 환호성을 질렀고 그럴 때마다 미소에게 홀린 지원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결국 난 추첨을 선언했다.
무려 53명이나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추첨으로 뽑은 5명만 남고 아쉬워하는 팬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 같이 미소를 따라 앞치마를 두르고 위생 장갑을 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어묵 반죽을 만지작거리며 미소가 만드는 걸 보며 반죽을 시작했다.
“티라노는 이렇게 반죽해야 해요!”
미소가 작은 손으로 테이블 위의 어묵 반죽을 시작한다.
티라노사우루스 모양의 어묵 반죽이 형태를 잡아가자 다들 미소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미소는 태연하게 꼬리 다리 머리를 만든 다음 몸통을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밀가루를 섞어 무려 30cm나 되는 어묵을 오로지 어묵 반죽과 밀가루만으로 만들어 내었다.
티라노사우루스 어묵 완성이다.
“짠~ 참 쉽죠?”
미소가 자기 작품을 가리켰지만 팬들의 어묵은 절반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자 미소는 돌아다니면서 팬들이 만드는 어묵에 대한 감평을 시작했다.
“어! 이건 코끼리다!”
“이건 기린······이에요?”
“이건······ 원숭이······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와~ 이건 인어다!!”
분명 ‘미소가 만드는 어묵 따라 만들기’였는데 창의적(?)인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착한 미소는 그것도 잘 만들었다며 연신 칭찬을 쏟아내었다.
잠시 후.
반죽이 끝난 어묵은 매니저들에게 건네져 식당의 튀김기로 배달되었다.
남은 반죽들은 식당 이모님이 동그랗게 말아서 튀겨주실 예정이었고.
그렇게 행사는 즐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잠깐의 쉬는 시간.
난 차은솔을 소극장 한쪽 구석으로 불러내었다.
“은솔아. 혹시 이제까지 찍은 사진 좀 볼 수 있을까?”
차은솔이 고심을 하다 사진을 몇 개 골라 내민다.
“세 개 중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드세요?”
차은솔이 내민 사진을 본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대박이네. 이게 콤팩트 디카로 찍은 거라고?’
한 장은 유진이와 미소가 손을 잡고 방청객에게 반갑다며 인사하는 사진.
또 다른 사진 한 장은 유진이가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미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환하게 웃는 사진.
그리고 마지막 사진 한 장은 내가 유진이와 미소의 곁에서 두 사람을 소개하고 유진이와 미소가 날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다.
마치 프로 사진사가 최고의 DSLR로 찍은 것처럼 사진 속 유진이와 미소의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더 좋은 카메라를 준다면 당장이라도 회귀 전 ‘홈마’의 능력을 뽑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차은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팀장님은 어떤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세요?”
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셋 다 좋아. 그런데······ 두 번째가 제일 좋은 거 같아.”
차은솔이 고개를 갸웃한다.
“전 세 번째가 제일 표정이 살아서 보기 좋아 보이던데······.”
솔직히 나 역시 동감했지만 세 번째를 고를 수는 없었다.
유진이가 날 보는 시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건 공개하면 안 되겠네······.’
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외면한 채 차은솔에게 부탁했다.
“은솔아. 그리고 부탁인데 내가 나온 마지막 사진은 좀 지워줄래?”
차은솔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정도로 별로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유진이랑 미소 팬클럽인데 매니저인 내가 나오면 좀 그렇잖아.”
“전 괜찮은데······.”
“넌 괜찮아도 연예인이랑 매니저가 같이 찍힌 사진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잖아. 부탁 좀 할게.”
차은솔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그래도 그냥 지우긴 아까우니까 매니저님한테는 드릴게요.”
“고마워. 유진이랑 미소가 너무 좋아하겠다.”
차은솔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어쨌건 재능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영입을 시도할 순간이다.
“은솔아. 너 사진에 재능 있는 거 같은데······ 대학에 입학하면 우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안 할래?”
차은솔은 현재 홍연대학교 디자인전공 수시모집에 원서 접수를 해놓았다.
회귀 전 기억에 따르면 그녀는 1차에 당당히 합격하게 될 예정이다.
그 미래를 알고 있는 난 차은솔이 혹할 만한 조건을 제시했다.
시급 1만 5천 원에 추가 인센티브까지 주겠다고.
그런데 차은솔은 고민도 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팀장님.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
회귀 전처럼.
이번에도 역시나 시작부터 거절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이번엔 차은솔이 거절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