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9화
349. 이형문 3
나와 하루의 보금자리인 3층 문을 열자 어지럽게 널린 신발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나탈리아는 문 앞에 서서 가만히 신발장으로 시선을 옮기다 흐트러진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렬하기 시작했다.
“에이. 엄마도 참. 그런 건 내가 하면 되는데······.”
“괜찮아. 엄마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나탈리아가 행복한 얼굴로 신발을 정리해 준다.
“발이 많이 커졌네. 우리 하루. 이제 240밀리 신니?”
“응.”
“그새 10밀리나 늘었구나.”
신발 정리를 끝낸 나탈리아는 이번엔 하루의 머리끝이 자기 눈높이까지 온 걸 흐뭇하게 바라본다.
“못 본 사이 키도 많이 컸고. 키가 안 커서 걱정이 많았었는데······.”
하루가 행복한 얼굴로 답한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나 키 180센티까지 너끈히 클 거래.”
나탈리아는 중학생이 된 하루의 방을 보며 감격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가 가장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는 과거를 자책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우리 하루가 이렇게 크는 동안 엄마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하고······.”
하루는 다시 울먹이려는 나탈리아를 진정시킨 뒤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엄마. 이것 좀 봐봐. 이거 내가 팬에게 선물 받은 건데 이쁘지?”
하루가 팬들이 준 선물을 일일이 설명하는 사이 난 잠깐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방 밖으로 나왔다.
주방으로 간 나는 율무차를 타고 과자를 담아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방 안에서 활달한 하루의 목소리가 연신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나탈리아는 맞장구를 쳐대고 있었다.
잠시 후.
하루가 상기된 표정으로 엄마 손을 잡고 거실로 나왔다.
나탈리아는 날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그동안 우리 하루를 잘 돌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하루가 워낙 알아서 잘합니다.”
“아녜요.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하루는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워낙 조용하고 나서기를 싫어하던 편이라서요.”
“자자. 앞으로도 제가 신경 쓸 테니까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나탈리아가 하루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의 율무차가 담긴 컵을 만지작대던 나탈리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탈리아가 하루를 쳐다본다.
“하루야······ 엄마는 당분간 수원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하루가 멈칫한다.
“어 엄마! 나랑 같이 안 살고? 나 엄마 이제 고생 같은 거 안 시킬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나탈리아가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보며 손을 잡는다.
“알아. 우리 하루 돈도 잘 벌고 엄마 챙길 수 있는 거······ 하지만 양육권 소송 때문에 꼭 직장을 다녀야 해.”
“소송?”
“응. 아빠랑 이혼하고 우리 하루 양육권 소송에서 이기려면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하거든.”
하루 아빠가 보여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으로 인해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다.
그러나 나탈리아가 기억 상실에 걸렸었다는 것과 하루를 두고 집을 나갔었다는 점은 불리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100%의 승리를 위해선 당분간 하루 엄마가 안정적인 직장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게 변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하루 엄마는 이제껏 일하던 수원 효(孝) 요양병원으로 돌아가기로 이야기가 된 상황이다.
하루가 다급히 말한다.
“어 엄마. 그러면 엄마가 내 매니저 해주면 되잖아! 그러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는 거잖아.”
하루는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쵸 윤호 형? 그러면 엄마 수원에 안 가도 되잖아요.”
“하루야. 엄마 말씀부터 다 듣고 난 뒤에 이야기해 줄게.”
하루가 다시금 엄마에게 시선을 돌린다.
“안 그래도 정 팀장님이 그런 제안을 하셔서 엄마도 깊이 생각을 해봤어. 하지만 엄마는 매니저 일을 전혀 모르잖아.”
“그치만······.”
나탈리아가 하루의 손을 꼭 붙들고 토닥거렸다.
“의사 선생님도 갑자기 환경을 확 바꾸지 말고 마음을 편히 먹으라고 하셨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더 좋다고 추천하셨고.”
하루가 눈물을 글썽인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또 헤어져서······ 살아야 한다고?”
나탈리아가 하루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준다.
“헤어지긴 왜 헤어져? 하루가 보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바로 서울로 올라올 건데. 그리고 주말에는 엄마랑 같이 지내면 되지.”
하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탈리아도 가슴이 아픈 듯 목소리에 울음이 살짝 섞여 나왔다.
“엄마도 가기는 싫지만 아빠한테 하루를 뺏길 여지를 조금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이해하지?”
하루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엄마를 배려하기 위해 참는 게 보인다.
그때였다.
하루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그럼 엄마! 내가 수원에 엄마 집 사줄게! 지금 원룸에 산다고 했지?”
나탈리아가 흐뭇한 표정으로 하루의 손을 꼭 잡는다.
“우리 아들이 진짜 다 컸네······.”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 이후 쏟아지는 광고를 거르는 데만 며칠이 걸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광고는 들어오고 있었고.
집을 사는 것도 하루가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괜찮아 하루야. 엄마도 돈 있어. 엄마가 그동안 모아둔 돈만 1억이야.”
5년 동안 모은 돈이 1억.
하루의 존재를 기억조차 못 했으나 나탈리아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요양보호사를 하며 모든 돈을 금고에 차곡차곡 쌓아뒀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은 이제야 그 돈이 하루의 아빠에게서 하루를 데려와 살기 위해 마련한 소중한 돈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나탈리아는 새로 집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자기 힘으로 집을 구할 수 있다면 양육권 소송에 가산점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하루가 날 쳐다본다.
“형. 그러면 저 일주일에 이틀 정도 스케줄 뺄 수 있을까요? 당분간만이라도요.”
“당연하지. 그리고 일주일에 이틀간만 일한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다. 아예 당분간은 그냥 푹 쉴까?”
회사에서 알면 펄쩍 뛸 이야기지만 난 하루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이번 생은 돈보다 내가 아끼는 사람의 행복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의 현재 상황이라면 한 달 정도 쉰다고 해도 금세 제 자리로 돌려놓을 방법도 있었고.
하지만 하루가 고개를 젓는다.
“저도 이제 팬들이 있는데······ 그렇게 막 쉬면 안 되죠. 일주일에 이틀만 쉬면 돼요.”
하루가 기특한 대답을 한 뒤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주말에는 내가 수원으로 내려갈게. 지하철 타면 금방이야.”
지나가던 소도 웃을 소리를 하다니!
“지하철이라니! 너 지하철을 마비라도 시키고 싶니? 어머니 집에 갈 때는 매니저들이 데려다줄 거고 앞으로는 학교에 갈 때도 따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하루가 머리를 긁적이며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런 그때 갑자기 머리를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수원 집은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루 어머님.”
“예?”
“제가 아는 분이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매가는 5억인데 1억만 내면 입주가 가능할 겁니다. 나머지는 대출도 받을 수 있고 잔금은 천천히 내도 됩니다. 대출도 잘 나오고요.”
우먼즈의 대표 장지혜의 남편은 유성 건설이라는 대형 건설사를 운영하고 있다.
수원 영통 쪽에 보안 시설이 갈 갖춰진 VIP용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 불경기로 인해 가격이 하락한 데다 일부 호실은 비어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곳이 있어요?”
“예. 관심 있으시면 연락 한번 해 보겠습니다.”
“예. 그러면 한번 알아봐 주세요.”
허락을 받자마자 난 곧장 우먼즈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이 울리기도 전 장지혜 대표가 전화를 받는다.
-어머머 콧대 높으신 정 팀장이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주셨을까?
최근에 장지혜 대표의 전화를 피했더니 토라진 목소리를 낸다.
“요즘 좀 바빠서 그랬습니다. 일 끝나면 골프도 같이 치시죠.”
순간 장지혜 대표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진다.
-오케이~ 접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실은 11월호 표지 모델. 원래 하나 혼자만 하기로 했었는데 거기에 하루를 더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 순간 장지혜 대표의 목소리가 두 톤이 올라간다.
-진짜요? 정말? 진짜죠?
“예.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하루랑 하나랑 원 플러스 원으로······ 어떠십니까?”
-잠깐만요.
헛기침을 몇 번 한 장지혜 대표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내가 뭘 해주면 될까요? 정 팀장님 성격에 절대 공짜는 아닐 테고······.
“실은······.”
난 남편에게 말해 휴(休) 오피스텔의 회사 보유분을 싸게 넘겨줄 수 없냐 부탁했다.
-정 팀장님이 쓰게요? 그러면 굳이 분양받지 말고 하나 쓰세요. 회사 보유분이 넉넉히 있어요.
“아 제가 살 곳은 아니고요.”
-그럼 누가 사려고 하는 건데요?
“방송에서 하루가 어머니 만난 거 보셨죠? 하루 어머니께서 거기에 살고 싶어 하십니다. 하루도 종종 거기 내려갈 거고요.”
순간 장지혜 대표의 목소리가 한 톤 정도 더 올라간다.
-어머머. 그래요? 근데 우리 남편도. 정 팀장님이랑 골프 치려고 벼르고 있는 거 알죠?
“고 골프채도 주셨는데 자주 라운딩 해야······죠.”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 30분 뒤.
난 회사가 가지고 있는 보유분을 시세보다 10% 정도 싸게 넘겨받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루의 엄마는 보안 시설이 잘 갖춰진 휴(休) 오피스텔로 거주처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 * *
나탈리아가 수원에 내려가는 건 앞으로 1주일 뒤.
그때까지 나탈리아는 하루의 방에서 지내면서 못다 한 회포를 풀고 내려가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곧바로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배우 2실이 있는 4층 문을 연 순간 매니저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쳐댄다.
“정 팀장! 수고했어!”
“팀장님. 멋졌어요!”
“이야. 우리 정 팀장님. 하루 엄마를 직접 찾아오셨다면서요?”
“역시 정 스타. 이번에도 한 건 했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칭찬이 터져 나왔다.
지난 이틀 동안 하루가 엄마를 찾은 미담은 모든 포털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은 케이블인데도 불구하고 시청률 16.3%를 달성했다.
그로 인해 굴렁쇠 엔터로 검색하면 연관되어 나오던 박상곤 의원과 관련된 상납 기사도 싹 다 사라지고 하루만 검색되고 있었다.
덕분에 배우 3실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우리 배우 2실의 입지는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연말에는 별도 실로 독립하겠지만 여전히 내 소속은 배우 2실이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일이 고개 숙이며 인사를 나눴더니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땐 허리가 뻐근할 정도였다.
자리에 앉자 도란희가 빠르게 달려온다.
“하루 우승 기념으로 오늘 회식 어때요? 하누~! 하누~!”
그 순간 나는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지?”
도란희가 움찔한다.
“뭐······가요?”
“너 맞잖아.”
도란희가 시선을 회피한다.
“글쎄요~ 도통~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솔직하게 불면 한우 사줄게.”
도란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 맞아요. 오늘 팀장님 들어오면 일어서서 기립 박수로 맞이하자고 한 거 맞아요!”
그럼 그렇지.
“다음부터는 이런 거 하지 마. 창피하게······.”
“그래도 팀장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데. 이 정도는 해야죠!”
“하여간 이미 회사 감사도 끝났으니까 오늘은 법카로 실컷 먹자. 내가 실장님한테 허락받을게.”
“아싸! 하누! 하누!”
도란희가 신이 나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 : 방상영 이사.]
전화를 받자 방상영 이사가 지금 당장 보자고 한다.
“조금 있다가 팀장급 회의 열리는데도요?”
-그래. 회의 전에 할 말이 있으니까 당장 올라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전화를 끊은 난 방상영 이사의 방으로 향했다.
* * *
방상영 이사는 이기철 이사가 쓰던 개인 사무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온데간데없고 검은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 계열들의 가구들이 미니멀리즘의 스타일로 단출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 앉지.”
방상영 이사가 하얀색의 소파를 가리켰다.
예전엔 늘 속내를 모를 정도로 무뚝뚝한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마도 서예종과 손을 잡고 뒷배가 생긴 것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가 보다.
소파에 앉자 방상영 이사가 근황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정 팀장. 역시 대단해. 팀 매출은 벌써 140억을 넘겼고 하루 군에 관한 일도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다니. 앞으로도 기대가 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운······ 그런데 운도 몇 번이 반복되면 실력이지. 암.”
고개를 끄덕인 방상영 이사가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마치 뱀과도 같이 변해 날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자신의 뒷배가 되는 최만식 대표를 닮아가듯 말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방상영 이사가 시선을 거두고는 묻는다.
“실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뭐가 말입니까?”
“자네 말이야······ 왜 이 회사에 남아 있는 거지? 그 정도 실력이면은 진즉에 독립하고도 남았을 텐데?”
내가 남아 있는 건 굴렁쇠 엔터를 바로잡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다.
독립한 다음 모든 걸 홀로 짊어지는 것도 싫었고.
하지만 난 대답 대신 이유를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방상영 이사의 눈이 번뜩인다.
“자네가 계속 회사에 남는다면 이왕이면 적이 아니라 아군으로 두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순간 그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방상영 이사는 이제는 자신의 라인에 설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하는 거였다.
“내 편에만 서. 그러면 자넬 서른이 되기 전에 내가 있는 이 이사 자리에 앉혀주지!”
방상영 이사가 온갖 감언이설로 날 설득하려 하지만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난 자세를 똑바로 한 채 방상영 이사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린 적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