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4화
344. 하루살이 3
내게 손을 잡힌 하루 아빠 이형문이 복도에 무릎을 꿇었다.
“야야~ 이 이거 안 놔?”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이형문의 말에 그가 원하는 대로 손을 놓아줬다.
순간 내 손에서 벗어나려던 이형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쿵.
“크흑!”
꼴사납게 대리석 바닥에 엉덩이를 찧은 그가 씩씩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형문이 일어나며 자기 손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붙잡은 부위가 벌겋게 변해 있었다.
“딱 두고 봐. 내가 조용히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넌 이제 뒤졌어!”
대체 뭘 믿고 큰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난 하루를 데려올 때 이형문이 하루에게 폭행했던 증거를 다 모아두었다.
게다가 하루의 엄마도 찾았기에 이제는 부담 없이 친권 박탈 소송을 할 수가 있었다.
소송에서 승리하면 하루의 친권은 자연스레 엄마의 손으로 넘어갈 테니 말이다.
그때였다.
소란이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하루를 쫓아다니는 스토커가 찾아와서 내쫓는 중입니다.”
난 관계자용 패찰을 내밀며 하루 매니저라는 걸 알렸다.
“아 그렇습니까?”
방송국 경호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건 해당 방송국에 출연하러 온 연예인들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을 펼치는 하루의 스토커라는 말에 경호원들의 안색이 굳게 변한다.
“이봐요.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입니까? 당장 안 꺼져요?”
“여기서 소란 피우면 재미없을 줄 아쇼.”
경호원들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오자 이형문이 다급히 두 손을 젓는다.
“소 소란이라니! 스토커라니! 이거 왜 이래? 내가 하루 아비 되는 사람이야!”
경호원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 사람 말이 맞습니까? 정 팀장님.”
“아버지는 맞지만 잦은 구타와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원에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여기로 찾아온 겁니다. 자식이 돈을 버니 내놓으라면서요.”
경호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인터콤으로 무전을 날린다.
“예. 하루 아빠에 관해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예. 예.”
경호원들이 연락하는 사이 이형문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날 노려본다.
감히 하루의 아빠인 자신을 쫓아낼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때 무전을 주고받던 경호원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귀 안에 이어폰을 꽂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무전을 끝내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이형문의 주위를 포위했다.
“당신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애를 팼다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식을 때려?”
PD에게 직접 연락을 받았는지 두 사람이 날 선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는지 이형문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 뭐야? 이것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하루 애비라니까?”
“거참. 말 안 듣네. 이리 오쇼.”
경호원들은 이형문의 양쪽에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야! 놔! 안 놔?”
결국 이형문이 두 덩치에 의해 공중으로 달랑 들어 올려진다.
“조용히 나갑시다. 아저씨.”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날에 찾아와서 뭘 어쩌려고? 당신. 진짜 아빠 맞아?”
경호원들은 더 씩씩거리며 욕을 하더니 이형문을 번쩍 들고 나간다.
이형문이 마구 발버둥을 치며 내게 고함을 지른다.
“놔! 정윤호! 너 이 새X 어디 두고 봐! 절대 이대로 안 끝날 테니까!”
이형문의 성난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린다.
다행히 스튜디오의 문은 방음이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소란을 알지 못했다.
여기서는 보는 눈이 많고 CCTV도 잔뜩 있어 이대로 보냈지만 나 역시 그냥 끝낼 생각은 없다.
‘하루 엄마를 빨리 데려와야겠군.’
하루의 엄마가 일한다는 수원 효(孝) 요양병원까지는 빨리 밟으면 1시간 10분 정도면 닿을 거리.
아무래도 직접 내려가서 하루의 엄마를 모셔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지 이형문에 대한 완벽한 대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난 곧장 회사에도 연락해 소송 준비를 부탁한 다음 서울로 올라오고 있는 세리네 가족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이형문이 현장에 나타나서 내쫓았고 이제는 수원으로 나탈리아를 찾으러 간다고.
* * *
수원 효(孝) 요양병원.
나영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좁은 숙직실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으으~ 잘 잤다.”
기지개를 켠 나영희가 숙직실 벽의 시계를 쳐다본다.
“응? 벌써 6시 10분이네?”
나영희는 야간 근무를 준비하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며 숙직실을 나왔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이정미 수간호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영희 쌤. 어제도 집에 안 갔어요?”
“예. 병원 침대가 편해서요.”
이정미 수간호사가 고개를 젓는다.
“하여간 우리 영희 쌤 너무 열심이시다. 좀 쉬엄쉬엄해요.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며 살아?”
나영희가 지난 5년간 술 한 번 안 마시고 TV도 보지 않고 일에만 매달리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이정미 수간호사였다.
나영희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전 일할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근데 301호 복남이 할머니는 어떠세요?”
아직 근무 시간까지는 몇 시간 남았지만 나영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이정미 수간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못 말려. 하여튼 복남이 할머니는 지금 산책을 못 나가서 우울해하고 있을걸요?”
“네. 쌤! 그럼 잠깐 보고 올게요.”
“보고 바로 나와요. 같이 저녁 먹으러 가게.”
“네~”
인사를 꾸벅한 나영희가 301호로 향했다.
301호에 들어가자 텅 빈 6인실 병실에 박복남 할머니만 남아 TV를 보고 있었다.
일주일 전 침대에서 내려오다 발목이 골절된 탓에 식사 후 혼자만 산책을 못 가고 있었다.
나영희 간호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우리 예쁜 복남이 할머니. 다리 좀 어떠세요?”
올해 85살 복남이 할머니가 그제야 TV에서 시선을 돌린다.
“이게 누구야? 우리 미스코리아가 오셨네?”
“또 또 그러신다. 제가 무슨 미스코리아예요?”
“내 눈에는 미스코리아보다 나영희 선생이 더 이쁜데?”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나영희가 할머니의 이불을 정리해 주며 묻는다.
“근데 할머니. 화장실 가셔야 하지 않으세요?”
“아냐. 아직 괜찮아.”
그때였다.
아까부터 TV를 계속 보던 복남이 할머니가 묻는다.
“근데 영희 선생. 병원에서는 저런 음식은 못 먹나? 참 맛나게 생겼어.”
복남이 할머니가 화면을 가리켰다.
TV에서는 오늘 방영되는 <먹방의 테이블>의 결승 무대 2부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백종석 대표는 결승전 음식으로 나온 붉은색 스프를 가리키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저기 빨간 국물이 보르시치라는 이름인데 로씨아 음식이래. 맛있어 보이지 않아?”
“글쎄요? 한번 물어볼게요.”
복남이 할머니가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영희 선생도 원래는 로씨아 사람이었다면서?”
나영희가 반달 눈을 하며 웃는다.
“그렇긴 한데 그 시절은 기억이 안 나서 잘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래?”
“네. 그나저나 복남 할머니. TV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나영희는 평소에 TV를 보지 않았기에 복남이 할머니가 무슨 재미로 TV를 보는지 알지를 못했다.
“응. 저 쪼끄만 애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게 기특하고 대견해서 눈물이 난다니까? 저기 봐봐. 저기~”
복남 할머니가 TV를 가리켰다.
화면에서는 백종석 대표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누굴 위해서 이 음식을 만든 건지 비밀인가요?
백종석 대표의 말에도 하루란 남자아이가 대답은커녕 빙긋이 웃기만 한다.
-우리 하루 군이 방송을 아네. 알겠습니다. 일단 맛을 보죠. 아까 된장찌개와는 너무도 다른 음식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방송에는 러시아인들이 먹는 보르시치란 스프와 샤슬릭 그리고 빵이라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TV를 보던 나영희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뚝뚝뚝.
나영희가 울기 시작하자 복남이 할머니가 깜짝 놀라 손을 뻗는다.
“우리 영희 선생. 왜 울어? 고향 생각이 나서 그래? 그러면 애들 면회 올 때 사 오라고 할게. 근데 저건 이태원 같은 데서 팔려나?”
나영희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복남 할머니······.”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이정미 수간호사가 나타났다.
“영희 쌤! 원장님이 어서 영희 쌤을 숨기래!”
“절 왜 숨겨요?”
“누가 영희 쌤을 잡으러 왔대!”
그 순간 다리가 풀린 나영희가 복남이 할머니의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이정미 수간호사가 급히 뛰어가 나영희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 원장 쌤이 지금 그 사람 붙잡고 있으니까요. 빨리 가요! 응?”
“예. 예. 간호사님.”
나영희는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두려움을 느끼며 서둘러 301호를 나섰다.
* * *
수원으로 내려온 나는 곧바로 효(孝) 요양병원의 원장실을 찾았다.
이번 조사를 맡은 흥신소 직원으로부터 병원 원장이 입원 전 상담을 직접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난 할머님의 병원 입원 절차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핑계로 원장과의 만남을 요청했고 원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솔직한 목적을 털어놓았다.
나영희 씨 아니 나탈리아를 찾아왔다고.
그런데 그 순간 올해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김철수 원장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이정미 수간호사에게 나탈리아란 환자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말이다.
난 즉시 내가 찾는 사람이 환자가 아닌 요양보호사란 걸 알렸다.
김철수 원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저희 요양보호사 중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만······ 혹시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김철수 원장이 시치미를 떼지만 이미 확인까지 하고 온 상황이다.
‘아무래도 그냥은 안 알려주는가 보군.’
난 흥신소 직원들과 함께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습니다만 나탈리아 씨에게 아들이 간절히 찾는다는 말은 꼭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하루 아빠가 친권을 무기로 아들의 앞길을 막으려는 중이라고도요.”
김철수 원장은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끝끝내 입을 닫았다.
대신 그는 인터폰을 누르더니 경호원을 불렀다.
문이 열리더니 경호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원장님? 왜 부르셨습니까?”
김철수 원장이 날 쳐다본다.
“이분. 저 정중하게 병원 정문으로 모셔 나가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경호원 두 사람이 내 곁에 달라붙었다.
“나가시죠.”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병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흥신소 직원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병원 후문 쪽으로 나탈리아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순간 이제껏 김철수 원장이 날 붙잡고 있던 이유는 나탈리아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경호원들을 시켜 날 정문으로 안내했던 거였다.
“못 도망가게 잠시만 붙잡아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경호원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지금 뭐 하십니까?”
“제가 좀 급해서요.”
나는 양옆을 지키던 경호원들을 뿌리치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1층 후문을 열고 나가자 저 멀리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흥신소 직원들이 두 사람의 여성을 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나탈리아.
하루의 엄마였다.
검은 머리로 염색하고 위로 쪽을 튼 나탈리아는 분홍색 간호사복을 입은 여자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난 흥신소 직원들을 뒤로 물린 뒤 겁먹은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탈리아 씨! 많이 놀라셨죠? 꼭 전해 드릴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탈리아가 눈치를 보며 말한다.
“무 무슨 말요?”
“하루가 지금 애타게 나탈리아 씨를 찾고 있습니다.”
나탈리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루 씨가 저를요? 남편이 절 잡으러 온 게 아니고요?”
뭔가 이상하다.
하루 씨?
아들인 하루를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순간 불길한 상상력이 빛을 발했다.
‘설마······ 기억을 잃은 건가?’
세리의 할머니나 동네 사람들에게 듣기로 나탈리아느 하루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말했었다.
‘나의 보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그런 나탈리아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가면서도 세리의 할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기도 했었다.
돈을 벌어서 하루를 데려갈 테니 그때까지 잘 좀 부탁한다고.
그런 나탈리아가 하루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건 하나밖에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억누른 채 물었다.
“나탈리아 씨. 혹시······ 기억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순간 나탈리아가 곁에 있는 이정미 수간호사를 쳐다본다.
이정미 수간호사는 나탈리아의 손을 꼭 붙들고 외친다.
“우 우리 영희 씨가 왜 기 기억을 잃어요? 그런 일 없으니까 그만 가세요!”
이정미 수간호사는 나탈리아의 남편이 날 보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라며 확인시켜 주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병원 후문으로 김철수 원장이 뛰어나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채였다.
김철수 원장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나탈리아와 이정미 수간호사 앞에서 두 팔을 펼쳤다.
“영희 씨는 못 데리고 갑니다!”
김철수 원장의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져 나온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내가 아들의 이름을 팔아서 이형문에게 나탈리아를 데려가는 줄로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제껏 떨고 있던 나탈리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원장님. 수간호사님. 저. 잠깐만 이야기해 볼게요. 이 분. 눈빛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괜찮······겠어?”
“예. 그리고 제게 아들이 있다잖아요······.”
나탈리아는 자신이 엄마란 사실을 깨달은 순간 조금은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나탈리아의 말에 김철수 원장과 이정미 수간호사가 마지못해 앞을 비켜준다.
“그쪽 성함이 정윤호라고요?”
“예. 전 하루 군의 매니저입니다. 그리고 현재 하루 군은 하루 아빠에게서 떨어져 저와 같이 살고 있고요.”
나탈리아의 질문에 난 내가 누구인지를 짧게 답했다.
“그런데 진짜 기억을 잃으신 게 맞습니까?”
나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지금 전······ 남편을 피해 도망치다가 5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요.”
내 생각이 맞았다.
나탈리아는 남편을 피해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아들에 관한 기억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