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2화
342. 하루살이 1
이수찬은 까톡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검은 머리로 염색한 하루의 엄마 나탈리아는 요양보호사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난 하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까톡을 보냈다.
[정윤호 : 지금 어디 있다는데?]
[이수찬 : 6개월 전까지 수원 효(孝) 요양병원에 있었다고 하길래 애들을 그리로 보냈습니다.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윤호 : 그래. 만약 찾으면 하루가 간절히 찾는다고 전해. 그리고 연락처도 받아두고. 아 하루 아빠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는 것도 절대 잊지 말고.]
[이수찬 : 예. 형님.]
이 좋은 소식을 하루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그 감정을 억눌렀다.
중요한 결승전을 코앞에 두고 있는 데다 막상 수원으로 찾으러 갔는데 못 찾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형. 바빠요?”
“아냐. 이제 끝났어.”
난 폰을 내려놓은 뒤 상에 차려진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근데 이 밥 진짜 맛있네. 쌀이 다른가?”
“예. 갓 정미한 햅쌀이에요. 그리고 양배추 찜도 한번 드셔보세요.”
하루는 깜박했다며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에서 양배추 찜을 꺼내왔다.
“양배추는 여기 간장에 찍어 드세요.”
하루가 시키는 대로 양념간장에 양배추 찜을 찍어 먹는 순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달콤한 양배추의 즙이 입 안에 가득 퍼지며 양념간장의 짭조름한 맛과 어울리자 다른 밥반찬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감칠맛이 끝내줬다.
“와~ 이거. 대박이네. 양배추만으로도 오늘 우승하겠다. 어떻게 만들었기에 양배추에서 이런 오묘한 맛이 나지?”
하루가 씨익 웃는다.
“비밀 레시피예요.”
“그런데 이 밥상은 누구한테 올리는 밥상인데?”
하루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웃는다.
“그것도 비밀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 아직도 누구인지 알려줄 생각은 없나 보다.
“그래. 알았어. 하여간 최선을 다해.”
“예.”
“자자 샵에 들러야 하니까 너도 같이 한술 뜨자.”
“네.”
하루와 난 그때부터 빠르게 밥을 비웠다.
하루에게 씻고 나오라고 한 뒤 난 설거지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끝낸 뒤엔 하루가 입을 옷과 조리 도구 세트를 따로 챙겼다.
이번 경연을 위해 사준 최고급 칼 세트는 얼마나 소중히 다뤘는지 새것처럼 반들반들해 보인다.
난 더불어 칼갈이도 챙긴 뒤 하루가 현장에서 갈아입을 옷도 몇 벌 더 준비했다.
‘그나저나 이왕이면 결승전에 하루 엄마가 왔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수찬이 하루의 엄마를 찾아와 주기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하루가 대접하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엄마일 게 틀림없을 테니까.
* * *
집으로 찾아온 이영진에게 하루를 맡기고 체리블라썸의 숙소로 이동했다.
어제 약속한 대로 체리블라썸 멤버들을 <먹방의 테이블> 게스트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아침 9시 30분.
체리블라썸의 숙소에 도착하자 다들 자고 있는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난 아이들과 이주영 대리가 깨어나길 잠시 기다리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들을 확인했다.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 라이브. 오후 5시. 1부 방송! (총 3부)]
[<먹방의 테이블>. 결승 투표 문자. 1577-8282]
[<먹방의 테이블>. 4강전에서 하루가 만든 화제의 ‘연탄불고기’. 백종석 대표와의 콜라보 상품 판매 예정. 10월 말!]
<먹방의 테이블>의 지난주 준결승 방송 시청률은 11.5%.
오디션 프로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이었는데 어제 스캔들 덕분인지 <먹방의 테이블>은 실검 순위와 기사를 도배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청률이 얼마나 나오려나?”
그때였다.
끼이익.
방문 경첩 소리가 들리더니 우연희와 세리의 방이 열린다.
늘 우연희가 가장 먼저 일어났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세리가 팅팅 부은 눈을 비비며 처음으로 나타났다.
“세리야. 괜찮아? 눈이 왜 그래?”
세리가 부은 눈을 어렵게 뜬다.
“어? 오빤 언제 왔어요?”
“방금. 근데 눈이 왜 그래? 울었어? 차도희 때문에?”
세리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게 아니라······.”
뒤따라 나온 우연희가 인사하며 대신 대답한다.
“어젯밤에 떡볶이 또 시켜 먹어서 그래요. 밤에 저희 몰래 엽기킹떡볶이를 시켜 먹으려다 들킨 거 있죠?”
1일 2 떡볶이라고?
그건 좀 심한데?
“자제 좀 하지. 떡볶이 칼로리가 얼마나 높은데?”
세리가 움찔하더니 우연희에게 변명을 해댄다.
“그래도 어제는 좀 먹어야 하는 날이었잖아! 매운 걸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그래서 봐준 거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밤늦게까지 안 자고 간식 먹은 건 혼나야지!”
우연희가 잔소리를 하며 장난스레 세리의 양 볼을 잡아당긴다.
세리의 볼이 찹쌀떡처럼 늘어났다.
“언니~이~ 아파파파!”
세리가 꽥꽥거리며 저항했지만 팔 길이에서부터 워낙에 차이가 나다 보니 우연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난 그사이 냉동실에 넣어둔 아이스팩을 꺼내왔다.
“세리야. 일단 붓기부터 가라앉히자.”
“오빠.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그럴래? 여기.”
난 냉동실에서 꺼내온 아이스팩을 우연희에게 건넸다.
우연희가 세리의 얼굴에 아이스팩을 씌우자 다시 한번 비명이 들린다.
“으아아! 차가워!”
세리가 오두방정을 떨며 소란스러워지자 잠에서 깨어난 은아와 양은비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윤호 오빠. 하이~”
경연은 오후 5시부터지만 사전 인터뷰가 잡혀 있기 때문에 오후 2시까지는 스튜디오에 도착해야 했다.
샵에서 꾸며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앞으로 30분 안에는 출발해야 했고.
“다들 빨리 씻고 갈 준비하자. 밥은 이따가 가면서 도시락 사줄게. 세리만 빼고.”
팅팅 부은 얼굴의 부기를 빼려면 별수가 없었다.
그러자 세리가 두 손을 모은다.
“유노 오빠. 나 김밥 반 줄만 먹으면 안 돼요?”
“응. 안 돼. 돌아가.”
“히잉~ 너무해.”
세리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빵빵한 눈두덩이를 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멤버들이 씻는 사이 난 이주영 대리에게 세리와 차도희의 사이가 멀어진 이유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하루의 아홉 번째 생일날.
차도희는 하루가 받은 생일 선물을 보고는 탐이 나 자신에게 달라고 했단다.
하루는 세리가 준 선물이라며 다른 걸 주겠다고 했지만 차도희는 꼭 그게 갖고 싶다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래도 하루가 주저하자 차도희는 자기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하루의 엄마까지 언급하면서 하루를 몰아붙였다고 한다.
결국 하루는 엄마가 일자리를 잃을까 봐 겁이 나 세리가 준 선물을 내줬단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그런 짓을 했다고요?”
“예. 세리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도희랑 크게 싸웠다네요. 그리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원수처럼 지냈고요.”
“그 나이 때부터 갑질에 분란까지 능숙하다니······ 타고났네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게 되자 세리가 차도희를 끔찍이 싫어하는 게 이해가 갔다.
난 에이스 엔터에서 본 차도희의 행동들을 말해주며 이주영 대리에게 재차 경고했다.
“도희 걔. 주의 깊게 봐주세요. 보통 애가 아니네요.”
“예. 안 그래도 한명호 팀장님이랑 이 실장님도 따로 대책을 세워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세리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세리 할아버지]
‘세리 할아버지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지?’
난 이주영 대리에게 먼저 아이들을 챙겨달라 말했다.
이주영 대리가 방을 나가자 난 홀로 남아 전화를 받았다.
-정 팀장인가?
“예. 할아버님.”
-정 팀장. 내가 정 팀장 볼 낯이 없게 되었어.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문이 그놈. 재활원에서 퇴원하는 날이 오늘이라서 데리러 갔는데 새벽녘에 혼자 퇴원을 했다는구만. 서울로 아들 보러 간다고.
“이형문 씨가요?”
하루의 아빠 이형문은 그동안 알코올 중독 치료 시설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 퇴원이라 세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를 맞이하러 갔단다.
하지만 일행이 시설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하루 아빠는 혼자 병원을 나섰다고 한다.
하루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수를 둔 상태지만 친아버지가 만나러 오는 것을 악착같이 막을 수는 없다.
‘어떻게 한다?’
하필이면 결승전인 오늘 이런 사고가 터지다니.
하지만 난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제껏 잘 막아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알코올 중독 센터에서 퇴원하고 나서 아들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별일 아닐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하여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 나랑 안사람도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네.
전화 너머로 세리 할머니의 한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껏 아무런 문제 없이 막아준 것만 해도 세리의 할아버지 내외는 큰일을 한 셈이었다.
난 놀란 두 사람을 안심시킨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이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의 아빠가 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하루 아빠라면 그 쓰레기······.
“영진아.”
-죄송합니다.
“아냐. 나도 너랑 마음은 똑같으니까. 그래도 입조심 하고 현장 스태프한테 외부 방청객은 최대한 걸러 달라고 부탁해 둬.”
현장에서 방청객 100명에게 티켓을 나눠줄 예정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나도 곧 갈 테니까 거기서 보자.”
하루의 엄마에 관한 단서를 찾은 날.
하루의 아빠가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 * *
<먹방의 테이블>의 결승전 촬영 현장.
하루는 이영진에게 체리블라썸은 도란희와 이주영 대리에게 맡긴 뒤 난 조한일 PD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스튜디오 한쪽에 있던 TVM의 조응천 이사가 날 불렀다.
“정 팀장.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조응천 이사는 <먹방의 대가>를 연출한 유현지 PD를 동행하고 있었다.
“예. 조 이사님.”
난 일부러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응천 이사는 지난번 CK 그룹 최 전무의 압박에 굴복해 하루를 떨어뜨리라는 지시를 막아주지 못했었다.
“지난 일로 화가 많이 났나 보군. 내가 미안해. 최 전무님이 워낙 강압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나도 막을 수가 없었어.”
“그거야 저도 이해합니다만 제 연락조차 안 받으신 건 뭡니까? 거기에 더 실망했습니다.”
조응천 이사가 헛기침을 한다.
“크흠. 미안하대도 자꾸 그런다?”
그때 유현지 PD가 나선다.
“정 팀장님이 이해 좀 하세요. 최 전무님 쪽이랑 조 이사님이 얽힌 게 좀 많아서 힘을 쓸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무튼 그날은 유현지 PD의 정보 덕에 위기를 넘겼다.
그녀의 체면을 살려주려면 이쯤 해서 넘어가 줘야지.
조응천 이사에게 마음의 빚을 남겨두는 것도 내게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부르셨습니까?”
“왜긴 왜야. 이달 말에 ‘먹방의 대가’ 후속 드라마 크랭크인 들어가려면 이제 출연료 협상을 해야지. 응?”
유현지 PD가 냉큼 말을 이어받았다.
“정 팀장님. 태풍 씨 출연료 깎아주기로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전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무실이 아니라 여기서 협상하자고요?”
조응천 이사와 유현지 PD가 고개를 끄덕인다.
“더 늦췄다가는 우리도 곤란해지니까 그냥 여기서 구두로 협상하지.”
우선 출연료에 대해 구두 협상이라도 하자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태풍이는 원래 4천만 원으로······”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진다.
“······정하려 했지만 2천만 원으로 정했습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두 사람이 짧게 한숨을 쉰다.
그 정도면 충분히 배려한 거라는 걸 두 사람도 아는 눈치다.
“태풍 씨 인기를 고려하면 2천만 원은 공짜나 다름없네요. 천만 배우를 편당 2천만에 쓴다라······ 나쁘지 않네요.”
두 사람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진짜로 내가 바란 건 이태풍의 계약이 아니었다.
이태풍은 극 중 조연.
진짜 바라는 건 주연인 하루의 출연료였다.
“그런데 하루 출연료는 얼마나 주실 겁니까?”
순간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루?”
이태풍의 출연료가 2천만 원이다.
아무리 이태풍이 인지도가 있다고 한들 <먹방의 대가> 후속편의 주인공은 하루다.
그렇기에 난 흐뭇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인공인 하루가 조연인 태풍이보다 출연료가 낮은 건 말이 안 되잖습니까? 더군다나 ‘먹방의 테이블’ 결승전에 올라왔고 오늘 우승까지 하면······.”
그 순간 두 사람이 당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태풍의 출연료 협상을 이제껏 끌어온 게 하루 출연료를 올리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안 까닭이다.
“어 얼마나 부르려고?”
난 두 사람을 똑 부러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드라마와 예능에서 연달아 10% 시청률을 달성한 게 하룹니다. 편당 5천만 원으로 출연료를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하루만 오 오······ 오천?”
“그 그럼 둘이 합쳐 7천?”
스타는 스타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지론.
난 씨익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두 사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