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338. 그림자 5
뺨을 맞은 장시아 스크립터가 볼을 붙들고 넋이 나가 버렸다.
주영인을 위해 한 일인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는 못할망정 뺨을 때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주영인이 장시아 스크립터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신 같은 사람······ 제일 싫어! 왜 멋대로 내 일에 끼어들어서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건데? 그러고도 당신이 내 팬이야?”
주영인이 모진 말로 질책하자 장시아 스크립터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마치 영혼이 나가버린 것처럼.
그리고는 이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틈에 난 차수연 실장을 향해 장시아 스크립터를 데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수연 실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전화를 들어 올린다.
“박 팀장님. 소품팀에서 입 무거운 애들로 두어 명 데리고 양계장으로 와주세요.”
그래.
이 정도면 됐다.
팬심에 미쳐 사람을 해치려 했지만 장시아 스크립터는 환자나 다름없었으니까.
잠시 후 소품팀에서 나온 스태프 2명이 넋이 반쯤 나간 장시아 스크립터를 데려갔다.
차수연 실장이 한숨을 내쉬며 날 바라본다.
“정 팀장님. 이렇게 장 스크립터를 넘겨줘서 고마워요. 변호사랑 조용히 처리할게요.”
“이왕이면 교도소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녹화 영상은 지금 전송해 드릴게요.”
까톡으로 녹화된 영상을 건네주자 차수연 실장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먼저 양계장을 나갔다.
“영진아 우리도 가자.”
난 주영인을 향해 고개를 까닥인 뒤 이영진과 양소리 대리와 함께 양계장 밖으로 나왔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오빠.”
뒤를 따라 나온 주영인이 날 부른다.
혹시라도 내가 언론에 흘릴까 봐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하다.
사실 이번 일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 또한 한 사람의 피해자일 뿐.
치사하게 그녀의 이름을 언론에 흘리고 싶진 않았다.
“약속한 대로 언론에는 알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진짜 고맙다면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세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주연 여배우인 주영인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 유진이의 연기 또한 빛이 날 테니 말이다.
“그럴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몸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주영인이 외친다.
“이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번은 절대 안 질 거예요!”
주영인의 눈빛에 투쟁심이 어려 있었다.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영인에게 물었다.
“유진이는 이미 ‘화란전’의 주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설마 그 작품에 조연으로 들어와서 유진이를 꺾으려고 할 생각입니까?”
주영인이 고개를 젓는다.
“이제 와서 조연을 할 바에는 드라마를 안 찍고 말죠!”
“그렇다면 다른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서 정면 대결을 하시겠다?”
“네!”
주영인이 각오를 굳힌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래.
이래야 주영인답지.
유진이에게 라이벌이 생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기에 난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전 이만 바빠서······.”
난 짧게 인사한 뒤 팀원들과 함께 유진이에게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주영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오늘 고마워요 윤호 오빠.”
주영인의 감사하다는 말이 왠지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 * *
대기석으로 돌아오자 유진이가 막 촬영을 마치고 앉아 있다.
그녀에게 범인을 잡았다고 말하자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근데 누가 그랬대요?”
“장시아 스크립터. 근데 걱정하지 마. 이제는 현장에 발도 못 붙일 테니까.”
유진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한다.
“고마워요 오빠.”
“고맙긴 당연한 일인데. 매니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오빠 같은 매니저가 없다는 것 정도는 이제 저도 알거든요?”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고마우면 마지막 촬영까지 열심히 하면 돼.”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는 걸 유진이도 안다.
하지만 일이 생기기 전 미리미리 대처해서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유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근데 왜 저한테 그랬대요?”
잠깐 고민했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걔가 주영인 광팬이라서 그랬대. 네가 주영인의 앞길을 막는 게 싫어서.”
순간 생각에 잠긴 유진이가 입을 다물었다.
난 혹시 유진이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 싶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유진아. 깊게 생각하지 마. 네 잘못도 아니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장시아가 이상한 사람이지 네 잘못은 아니니까. 이런 일에 연연하지 말고 네 연기만 열심히 하면 돼.”
착한 유진이가 스토커의 마음까지 신경 쓸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에서 깨어난 유진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저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응?”
“이런 일로 꺾인다면 절 응원해주는 팬들의 마음을 배신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영인이나 장시아 씨한테는 미안한데······. 이건 미안하다고 물러서거나 양보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몰라 걱정이 태산이던 천호동 버거 소녀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괜히 나까지 뿌듯해졌다.
유진이는 자신의 말이 오만했다고 생각했는지 혀를 빼꼼히 내밀고 부끄러워한다.
“대신 제가 너무 버릇없이 굴면 오빠가 꼭 알려줘야 해요?”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자신감 있게 굴어. 그게 더 보기 좋으니까.”
유진이가 힘을 내며 외쳤다.
“넵! 그럼 저 잘하고 올게요!”
이미 밤 12시가 넘었지만 유진이는 다시 한번 힘을 내기 시작했다.
장시아 스크립터의 뜻대로 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 * *
10월 7일.
<신의 이름으로> 21화는 시청률 34.8%를 찍었다.
그리고 10월 8일.
‘만신 월아’가 죽고 ‘청명’이 복수를 하는 22화가 방송되는 날.
컴백을 앞둔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1층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다음 주에는 컴백 준비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마지막 방송보다 한 주 일찍 모여 축하 파티(?)를 할 생각으로 말이다.
드라마 시작까지는 10분.
하루와 정인지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우린 둘러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선녀 선생님의 에어로빅 학원에 들러 안무 레슨을 마치고 온 세리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다.
“헉헉. 오빠. 컴백 하기도 전에 죽을 거 같아요~”
“세리야. 요즘 많이 힘들어?”
“네. 선녀 쌤이 이번엔 12주는 너끈히 소화할 체력을 만들자며 제대로 작정하고 레슨하세요. 진짜 장난 아님!”
“허리 업 활동이 체력 때문에 일찍 끝났으니까. 그게 아쉬우셨나 보지.”
“네. 그러시대요!”
그때 곁에 있던 양은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보다 윤호 오빠 하나 언니 너튜브 방송 보니까 새 자작곡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던데. 설마 또 앨범 내요?”
세리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그럼 우리 하나 언니랑 경쟁해야 해?”
강하나는 다음 주를 끝으로 음악방송 무대에서 내려온다.
강하나가 지금 만드는 자작곡은 너튜브를 중심으로 뿌릴 예정이었기에 체리블라썸과 강하나가 경쟁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세리가 당황하는 걸 보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자신 없어?”
세리가 우물쭈물거린다.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하나 언니랑 싸우는 게 싫어서요.”
난 장난스레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체리블라썸 활동을 좀 더 미룰까?”
순간 세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근거 없는 자신감을 담아 외친다.
“아뇨? 그리고 하나 언니가 벌써 4주나 1위 했으니까 저희가 이길 수 있어요. 분명해요!”
세리의 패기 넘치는 대답에 양은비가 피식 웃는다.
“너 하나 언니 앞에서 지금 한 말 고대로 할 수 있지?”
세리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린다.
“무 무슨 말?”
“하나 언니 이긴다는 말! 방금 네가 했잖아.”
“그랬긴 했는데······.”
세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기어들어 간다.
하여간 허풍선이 녀석.
그래도 투지를 보여주는 세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나는 너튜브를 메인으로 활동할 거라서 음방에서는 너희랑 겹치는 일 없어. 음원차트 정도야 조금 겹칠 순 있을지 몰라도.”
세리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아~ 다행이다.”
“어쨌건 이번에도 잘해보자.”
그제야 세리가 해맑은 표정으로 외친다.
“네!”
네 사람이 웃고 떠들던 그때 야식으로 만든 떡볶이가 도착했다.
“먹으면서 기다리자.”
컴백 때문에 넷 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오늘 하루는 쫄쫄 굶었다기에 떡볶이 먹는 것을 허락했다.
네 사람의 앞에 떡볶이가 놓이자 다들 눈이 돌아가 버렸다.
“아싸! 난 계란 2개!”
“전 국물 좀 많이 주세요. 계란 풀어서 먹게.”
“전 어묵 많이요.”
“전 떡만 주세요.”
네 사람이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떡볶이를 달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정인지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떡볶이를 나눠준 순간 <신의 이름으로> 22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신의 이름으로> 22화는 유진이의 유진이에 의한 유진이를 위한 화였다.
‘만신 월아’가 죽는 전반부.
엄마의 죽음에 절규하는 ‘청명’의 중반부 연기.
그리고 후반부의 사이코패스 살인마와의 격투 액션까지.
50분의 시간 동안.
지루할 틈 없이 유진이의 연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가까스로 살아서 도망간 이후 ‘청명’은 남자 주인공인 ‘최강인’과 여자 주인공 ‘방신애’의 도움을 받아 상을 치르기 시작했다.
주인공 두 명을 제외하고 손님 하나 찾아오지 않는 ‘만신 월아’의 집에서 대청마루에 혼자 앉은 ‘청명’이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
달빛 아래 울리는 ‘청명’의 진혼곡은 듣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고 있었다
드라마가 끝난 후.
잘했다고 칭찬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유진이는 미소를 꼭 껴안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이 했지······.’
유진이는 ‘만신 월아’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말투 습관 표정 동작.
노인정에 갈 때마다 그분들의 모습을 관찰했고 시나리오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대사를 곱씹으며 자신을 ‘만신 월아’와 일체화시켰다.
하지만 이젠 진짜 ‘만신 월아’라는 캐릭터를 놓아줘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고생했어 유진아.”
어깨를 토닥거려주자 유진이가 살포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엄마의 품에 안긴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엄마. 왜 울어? 슬퍼?”
“아냐. 좋아서······.”
“좋은데 왜 울어?”
“원래 어른은 좋아도 울어.”
“그렇구나~”
유진이와 미소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만신 월아’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광고주들부터 기자들 그리고 각 방송국의 PD들까지 유진이를 찾아대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언제나 그랬듯 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하자 다음으로는 까톡이 쏟아졌다.
그중에는 우먼즈의 장지혜 대표도 섞여 있었다.
[우먼즈 장지혜 대표 : 정 팀장. 다음 달 표지 상의 좀 해. 이번엔 아예 정 팀 특집으로 가자. 이태풍 하루 유진이 강하나까지. 어때?]
기분 좋은 소식이었지만 이건 내 선에서 거절.
한 번에 한 명씩 표지로 내세워야지 최대한 뽑아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앱 업데이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브리데이 V3가 출시되었습니다.]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적용대상 : 에브리데이 V2 에브리데이 V10.1)]
‘그래. 앱 업데이트가 이맘때였었지.’
혹시 패치 설명을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지난번처럼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패치 설명을 볼 수가 없었다.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다이어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YES/NO?]
그렇다면 닥치고 YES!
그 순간 설치 파일이 다운로드 되기 시작했다.
[설치 파일을 다운로드 중입니다.]
[에브리데이 V3 설치 파일을 다운 중입니다.]
[에브리데이 V11 설치 파일을 다운 중입니다.]
이번엔 V10.2가 아닌 V11 파일이 다운되고 있었다.
메이저 버전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건 대규모 업데이트가 일어난다는 소리.
파일 전송이 끝나자마자 패치 내용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1]
[설명]
-다이어리 전체 일정의 30%가 변경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변화된 일정이 미래 일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패치 내용]
-1. 사용자가 관리하는 ‘김세리’ ‘유은아’ ‘강하나’ ‘이태풍’의 새로운 일정이 추가됩니다.
-2. 새롭게 추가되는 스타의 일정은 스타마다 하루에 하나로 한정됩니다.
-3. 새롭게 추가된 스타와 관련된 새로운 일정은 알람으로 알려드립니다.
새롭게 업데이트된 에브리데이 V11에는 현재 내가 데리고 있는 정실모 멤버들의 이름이 모두 다 들어가 있었다.
대형 업데이트에 걸맞게 이제는 유진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관리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새 일정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알림: 2020년 10월 15일 ‘정유진’의 새로운 일정이 등록되었습니다.]
[알림: 2020년 10월 24일 ‘김세리’의 새로운 일정이 등록되었습니다.]
[알림: 2020년 10월 25일 ‘이태풍’의 새로운 일정이 등록되었습니다.]
패치 설명의 2번째 항목대로 스타마다 각각 따로 미래 일정이 떠올랐다.
“이왕이면 좋은 일정이 떴으면 좋겠는데······.”
난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새롭게 업데이트된 일정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10월 15일은 유진이의 팬클럽 미팅 일정 10월 25일은 이태풍이 상영 한 달 차에 지방 행사를 마무리 짓고 서울로 돌아온다는 평범한 일정이다.
그런데 10월 24일 일정은 꽤 심각한 내용이었다.
[에브리데이 V11]
[날짜 : 2020년 10월 24일]
-PM 10:00 [NEW. 김세리] <연예가 빅뉴스> 김세리. 걸프렌즈7 차도희 폭행. (회의 내용 : 에이스 엔터와 협상 준비.)
‘우리 착한 세리가 사람을 때린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