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9화
319. <경계 너머로> 시사회 1
조재경 감독.
CK 그룹 명예 회장의 다섯째 손영임의 외동아들이다.
재벌 4세 영화감독이기도 한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로 국내 영화제에서 <상희의 일상>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조재경은 한국 영화계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군대를 면제받은 그는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유학 중에도 또 한 번 성과를 내었다.
CK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 이란 작품으로 조재경은 26살에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분에서 각본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천재 감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올해 27살의 젊은 나이에 잘생긴 외모 빵빵한 집안 배경을 가지다 보니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는 건 당연했고.
다만 난 그런 조재경과 악연으로 얽혀 있었다.
재벌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 재능이 넘치는 그는 갑질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감독이란 직책이 그의 그런 성향을 더욱 부추겼다.
드라마의 왕이 작가라면 영화의 왕은 감독.
그는 현장에서 배우들을 마치 자신의 부하 직원처럼 다루고 연예인들을 보좌하는 매니저들은 아예 노예처럼 부려 먹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매니저를 때리고 스케줄을 멋대로 바꾸는 건 예사.
게다가 자기의 마음에 둔 여자 연예인에게 줄 거라며 사이즈도 안 알려주고 속옷 심부름을 시키거나 한창 인천에서 촬영 중인데 속초에서 해녀가 직접 딴 굴을 사 오라고 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시켜대곤 했다.
그래서 매니저들은 그가 있는 현장을 기피했다.
다만 조재경이 만든 영화는 늘 흥행을 했기에 무조건 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조재경의 비위를 맞추란 지시를 내렸으니까.
게다가 한국 영화계에 막강한 힘을 가진 CK 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조재경의 외삼촌이었기에 업계 누구도 감히 그에게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한국에 돌아왔지?’
회귀 전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건 이맘때가 아니었다.
내년 2월에 해외에서 촬영을 마친 <천년 여우>라는 로맨틱 판타지 영화를 들고 돌아와야 했는데 무슨 일인지 몇 개월은 일찍 한국으로 돌아와 버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조재경과 어울려봤자 도움 되는 일이 없었기에 차에서 내린 일행들을 재촉했다.
“자 자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
그런데 그때였다.
“어이~ 거기~”
‘사람 이름 안 부르고 저러는 건 여전하네 저 인간.’
키 185cm가 넘는 조재경은 수천만 원짜리 이탈리아 명품 양복을 걸치고 있다.
단추 두 개를 푼 푸른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셔츠만 해도 수백만 원은 나갈 명품이다.
소이영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조재경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날 부른 게 자기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난 깔끔히 두 사람을 무시해 버렸다.
“자자. 얘들아. 빨리 들어가자.”
내 재촉에 유진이와 미소 그리고 체리블라썸이 주차장에 연결된 통로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재경의 목소리가 주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요즘 매니저 새X들은 왜 이렇게 싸가지가 없어? 야! 내 말 안 들려?”
큰 소리에 앞서가던 연예인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린다.
난 살짝 짜증이 올라 고개를 돌렸다.
내 연예인들이 겁을 먹는 꼴을 볼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이없게도.
고개를 돌린 내 눈앞에 보인 건 소이영의 은색 미니 백이 빛을 반사하며 날아오고 있는 장면이었다.
‘저 미친 자식이······.’
순간 난 반사적으로 미니 백을 잡았다.
덥석.
맞기는커녕 깔끔하게 백을 붙잡아 버리자 조재경이 미간을 찌푸린다.
“이 새X가?”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난 곧장 백을 들고 그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조재경이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매니저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서 눈을 올려 떠? 그리고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부터 해야지 인마!”
역시나 보자마자 갑질이다.
하지만 난 그의 장단에 어울릴 생각이 없었다.
“제가 왜 그쪽이 부른다고 대답을 해야 합니까?”
“뭐?”
조재경이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곁에 있는 소이영이 외려 화를 내며 말한다.
“정 팀장님! 이분 누군지 몰라요?”
“압니다. CK 손영임 고문의 아들. 천재 감독 조재경.”
“그런데 왜 그러세요?”
난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인간이 천재인 거랑 제가 무슨 상관이냐고요. 천재면 초면인 사람에게 막말해도 됩니까? 백을 던져도 되고요? 예?”
“어쭈. 이 새X가······.”
“경고하는데 말조심하세요. 그리고 이거 가져가시죠.”
난 내가 받은 대로 들고 있던 백을 조재경에게 던져서 되돌려줬다.
명품 백이 툭 하고 그의 가슴께에 맞고 떨어진다.
곁에 있던 소이영이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백을 받았다.
조재경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정유진이 잘 나간다길래 다음 작품에 한 번 꽂아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 때문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난 이글거리는 조재경의 눈빛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순간 이 모든 상황을 잊고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뻔했다.
결코 그와는 어울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조재경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뭐라고?”
“그렇게 하시라고요. 유진이는 조 감독님 작품에는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됐죠?”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조재경이 영화를 제작하면 외가인 CK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100% 맡아준다는 건 업계 관계자라면 누구나 안다.
탑스타 소이영이 옆에 붙어서 애교를 떨고 아끼는 백을 던져도 참는 것이 그런 이유다.
그러나 난 그런 제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뭐 이런 별종이 다 있나 위아래로 훑어보는 조재경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애들 듣는 데서 언성 좀 높이지 마시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조재경이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주먹을 쥔다.
CCTV와 주차장에 있는 차들의 블랙박스가 몇 개인데 겁도 없지.
하긴 뒷일을 걱정하면 조재경이 아니지.
그 순간 소이영이 온몸을 던져 조재경을 말리고 나섰다.
“자 잠깐만요!”
“뭐야? 이영이 너까지 왜 이래?”
“감독님! 참으세요! 이 인간 권투 배웠어요!”
“놔! 지가 세면 얼마나 세다고!”
소이영이 조재경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내게 외친다.
“뭐 해요? 감독님 더 화나기 전에 안 가고! 업계에서 매장당하고 싶어요?”
누가 누굴 걱정해주는 건지.
다만 초면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당했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내 기억 속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하며 경고를 날렸다.
“조 감독님! 앞으로 저나 제 배우들에게는 관심 가지지 마십시오. 카지노 상습 도박 기사가 뜨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 순간 조재경의 움직임이 멈춘다.
“너 그 그걸 어떻게······.”
현재 내 다이어리에는 조재경에 관한 일정 몇 개가 남아 있다.
조재경이 미국에 있을 때 카지노에서 상습 도박을 했다는 것과 자신의 조연출에게 연출료를 안 줬다는 것 등등.
그중 한 가지만 말했을 뿐인데도 조재경이 아무런 대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저 어디서 알았냐고 빽빽 고함을 칠뿐이었다.
“그건 아실 것 없고. 앞으로는 서로 얽히지 맙시다.”
난 내 할 말만을 마친 뒤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등 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물건을 던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일행들을 달랬다.
그리고 미소의 손을 잡고 시사회장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우리 미소. 많이 놀랬지?”
미소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하나도 안 놀랐어요!”
“진짜?”
“네! 삼촌 대땅 싸움 잘하잖아요!”
“내가?”
난 힐끗 곁을 쳐다봤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 사실을 말했을까 탐색하는 순간 한 사람이 유독 당황하는 게 보였다.
“세리 너니?”
세리가 움찔한다.
“예 예?”
“너지?”
“내 내가······ 뭘요? 아 아닌데요? 진짜 아닌데요? 제 오빠를 걸고 절대 아닌데요!”
“너 오빠 없잖아.”
“그러니까요.”
세리가 내 시선을 회피하더니 몸을 홱 돌려 도망가 버렸다.
“하여튼 녀석.”
여전히 씩씩거리는 조재경과 소이영을 둔 채 우리 일행은 이태풍의 <경계 너머로> VIP 시사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VIP 시사회란 보통은 영화 개봉 전날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친분이 있는 연예인을 초청해 영화를 보는 행사를 말한다.
또다시 천만 관객에 도전하는 최성문 감독의 작품이기에 다른 작품들보다 2배나 많은 연예인이 찾아왔다.
연예인들은 포토존에 서서 다들 영화에 대해 한마디씩 꺼내며 <경계 너머로>의 성공을 기원했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포토존을 구경하던 표은미 실장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정 팀장님은 안 들어가세요?”
“아 저도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유진이와 미소를 비롯한 일행들도 표은미 실장과 함께 먼저 상영관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영진이 한 노부부를 모시고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차가 막혀서요.”
“미안. 고생했다.”
“두 분 이쪽으로 오세요. 저희 팀장님은 처음이시죠?”
이영진과 동행한 두 사람은 이태풍의 부모님인 이상우 선생과 유지예 여사.
두 분 모두 키도 크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특히 아버님인 이상우 선생은 어지간한 중견 배우 뺨치게 생겼다.
태풍이 외모가 어디서 왔나 했더니 유전자 빨이었다.
전화상으로 통화는 했었지만 만나는 건 처음.
난 힘든 발걸음을 한 두 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태풍의 어머니가 거친 손으로 내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운다.
“아이고~ 괜히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이 들락거리다 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팀장님.”
“아닙니다. 태풍이가 주연을 맡은 첫 영화인데 당연히 두 분이 오셔야죠.”
이태풍의 부모님이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한때 난독증으로 고생하며 배우 인생을 포기하려던 아들이 이제는 당당히 최성문 감독의 작품에 주연이 된 걸 보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 태풍이 얼굴이 어디서 온 건가 했더니 두 분을 아주 쏙 빼닮았네요.”
이태풍의 어머니가 남편의 손을 꼭 붙잡는다.
“나보단 이 양반을 닮았죠. 학창 시절에 이 양반이 강원도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어요.”
순간 이태풍의 아버지가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는다.
“어허! 이 사람 쓸데없는 소리를!”
난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도 아버님이 강원도 최고 미남이신 것 같은데요?”
이태풍의 어머니가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우리 팀장님이 뭘 좀 아시네요. 제 눈에도 이이가 최고랍니다?”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이태풍의 아버지가 연이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거 사람도 참. 크흠흠!”
오늘같이 좋은 날.
이태풍의 부모님 금슬이 여전하다는 것 또한 보기 좋은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하나뿐인 아들이 날 만난 후 제대로 인생이 풀리고 있다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마친 뒤 두 사람에게 상영관을 가리켰다.
“이제 태풍이가 노력한 결과를 보셔야죠.”
“그래요. 팀장님.”
그런데 그때였다.
이태풍의 아버지가 아까부터 들고 있던 금색 보자기 두 개를 내민다.
“내 정신 좀 보게. 이것 좀 받으시오 매니저 양반.”
“이게 뭡니까?”
“잣이오. 내가 제일 좋은 거로만 따왔으니 식구들이랑 같이 드시면 될 거요.”
거절하려 했지만 이태풍의 어머니가 꼭 좀 받아달라 말한다.
“맘 편히 받아요. 회사에는 따로 보냈으니까. 이거 하나는 같이 사는 가족들이랑 드시면 되고 다른 하나는 광주에 갈 때 수녀님께 가져다 드리세요.”
이태풍이 내 사정을 말했나 보다.
난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선물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난 이영진에게 선물 보자기를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곤 두 사람과 함께 상영관으로 향했다.
* * *
VIP 시사회가 열리는 VIP 1관 앞.
이태풍이 직접 관객들의 티켓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예. F열 8번 석. 들어가셔서 중간입니다.”
이태풍이 다정하게 미소를 짓자 팬들이 감격해서 외친다.
“꺄아아악! 오빠! 저 진짜 팬이에요!”
“저도요! 오빠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에요.”
“여기 티켓에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팬들은 상영관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이태풍에게 몰려들었다.
덕분에 나와 이대호는 옆에서 계속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해야 했다.
“오늘 상영 끝나고 나서 최대한 시간을 빼 보겠습니다. 지금은 뒷분들이 기다리시니까 안으로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예. 감사합니다.”
연예인이 사과하게 만드는 건 매니저 실격.
불편한 소리는 전부 매니저의 몫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태풍이 보고 있었기에 적어도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거나 쌍욕을 먹는 일은 없었다는 거다.
그렇게 한동안 허리가 아플 정도로 인사를 마치고 난 뒤 마지막에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인사가 대략 10분간 이어진 뒤 최성문 감독과 배우들도 다들 자리에 앉았다.
“폰은 진동이나 무음으로 해주시고······.”
매너를 지켜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 이후 조명이 꺼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배우 이태풍의 영혼을 갈아 넣은 <경계 너머로>의 VIP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한 순간.
조용해야만 하는 상영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