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315. 강하나 vs 이브원 2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아이돌. 여러분의 이브가 되고 싶어! 이브원입니다!”
좁은 통로였지만 11명은 우릴 보며 폴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선 최인석 AD가 마지못해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받았다.
“자자! 인사는 다음에 하고 바쁘니까 대강 하고들 지나가자!”
하지만 인사를 마치고도 박예슬의 시선은 좀처럼 강하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불길함을 느낀 난 빠르게 강하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박예슬이 슬그머니 발을 뻗는 게 보였다.
복도 CCTV가 있어도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 찍히지도 않을 각도란 걸 알고서 말이다.
그 순간 채 말릴 틈도 없이 박예슬의 구둣발이 강하나의 한복 끝단을 밟았다.
앞만 보고 걷고 있던 강하나의 몸이 휘청거린다.
“어~ 어~?”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기에 앞으로 넘어지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덥썩.
강하나의 몸이 앞으로 조금 기운 채로 멈춰 섰다.
“괜찮아?”
강하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예. 죄송해요. 오빠. 옷이 걸려서 그만······.”
강하나가 몸을 바로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
“걸린 게 아냐.”
“네?”
박예슬은 나이답지 않게 나름 머리를 썼지만 이 판에서 구르고 구른 날 상대하긴 아직 너무도 어렸다.
난 박예슬이 입을 열기도 전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외쳤다.
“박예슬! 너 하나 무대 망치려고 작정했어? 하나 옷을 왜 밟아?”
말할 타이밍을 뺏긴 박예슬이 뒤늦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다.
“시 실수예요.”
“실수?”
“그 그래요.”
순간 앞서가던 최인석 AD가 발걸음을 멈추며 뒤로 돌아본다.
“늦었는데 또 뭡니까?”
안 그래도 리허설을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상황.
일을 방해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 일이다.
난 박예슬이 강하나의 옷깃을 밟아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고 먼저 말해 버렸다.
이런 작은 신경전일수록 제대로 대처해야지 다시는 장난칠 엄두를 못 낼 테니까.
내 말을 들은 최인석 AD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박예슬. 너 하나가 무대 망치면 니가 책임질 거야?”
“그 그게······.”
한 박자 빠른 대응 탓에 상황이 박예슬의 뜻과는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예슬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소란이 커지자 이브원을 인솔해 가던 이희진 본부장이 되돌아왔다.
“잠깐만요! 아니 이 좁은 공간에서 실수할 수도 있죠! 두 분 애한테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희진 본부장이라면 K& 매니지먼트의 서열 3위.
사실상의 매니지먼트 운영을 총괄하고 있기에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최인석 AD의 성깔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 본부장님. 벌써부터 애한테 이딴 장난질이나 가르쳤습니까?”
이희진 본부장이 움찔한다.
“장난질이라뇨! 실수한 거 가지고 너무 몰아세우시는 거 아니에요?”
박예슬도 곁에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진짜 하나 언니한테 나쁜 짓 할 생각은 1도 없었어요! 진짜예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을 거다 이거다.
최인석 AD는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에는 박예슬과 이희진 본부장에게 경고하는 걸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일단은 PD님께 알리지 않겠지만 또 한 번 이러면 그땐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희진 본부장이 당황해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최인석 AD는 야멸차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희진 본부장이 날 노려본다.
제대로 본방에서 붙기도 전에 찍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태연하게 그녀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이희진 본부장의 짬이라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절대 몰랐을 리가 없었으니까.
‘실수? 웃기고 있네. 방금 표정만 봐도 당신 역시 공범이야.’
난 강하나의 한복에 묻은 먼지를 손수 털어주며 힐끗 박예슬을 쳐다봤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꽤 분한 듯했다.
“예슬아. 뭐해? 어서 가야지! 우리도 시간 없어 얘.”
“예 예. 본부장님.”
박예슬은 이희진 본부장의 채근에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그사이 난 강하나의 한복에 묻은 먼지를 깔끔히 제거했다.
“고마워요 오빠. 저 이제 괜찮아요.”
“그래. 그럼 갈까?”
박예슬과 가벼운 기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난 강하나와 함께 리허설 무대로 향했다.
* * *
이브원의 대기실.
박예슬은 복도에서 있었던 일로 이희진 본부장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다.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진심으로 대답한 건 아니었다.
이희진 본부장이 PD를 만나러 간다며 자리를 비우자 최소영이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어?”
박예슬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짜증을 부렸다.
“근데 그 매니저 어떻게 눈치챘지? 완벽했었는데!”
박예슬의 혼잣말에 최소영이 말한다.
“하려면 좀 잘하지. 그게 뭐야?”
“아 몰라! 그 매니저 때문에 다 망쳤어.”
투덜거리던 박예슬이 최소영을 바라본다.
“근데 언니. 나 화장실 갈 건데 같이 안 갈래? 아까 물 마신 게 계속 신경 쓰여.”
“그래? 그러지 뭐.”
티격태격하는 사이지만 아이스톤 시절부터 항상 같이 다니다 보니 이젠 같이 움직이는 게 편한 두 사람이었다.
박예슬과 최소영은 매니저에게 말한 뒤 둘이서만 화장실로 향했다.
11명이나 되는 터라 매니저들이 늘 붙어 다닐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온 순간 복도 너머로 강하나가 도란희 매니저와 함께 화장실로 오는 게 보였다.
순간 박예슬의 눈이 번뜩였다.
최소영이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묻는다.
“너 또 뭐 하려고?”
“그냥 이야기 좀 할 거야. 언니는 보기나 해.”
최소영은 대체 뭘 하려나 싶은 생각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강하나가 박예슬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자 박예슬이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모은다.
“하나 언니~ 아깐 정말 미안해. 진짜 고의가 아니었어.”
최소영도 곁에서 친한 척 인사를 건넸다.
“언니. 그동안 잘 지냈지?”
그 순간 곁에 있던 도란희가 가로막고 나섰다.
“미안한데. 하나가 지금 좀 바빠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거든? 비켜 줄래?”
날이 선 도란희의 말에 박예슬이 입술을 삐쭉인다.
“매니저 언니. 아까 실수였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우리 진짜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는 건데 그것도 못 하게 해요? 본방까지는 아직 시간 좀 있잖아요.”
도란희는 고의로 한복을 밟아 놓고선 이렇게 친한 척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니들 진짜······.”
도란희는 미친 척하고 어린 애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일 각오를 다졌다.
그때였다.
강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란희야. 잠깐 얘들이랑 이야기 좀 할게.”
“하나야. 그러지 말고 여긴 내가······.”
“괜찮아.”
담당 연예인의 간청에 결국 도란희는 어쩔 수 없이 몇 걸음을 떨어졌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도란희가 멀찍이 떨어진 순간 박예슬이 웃으며 본색을 드러내었다.
“언니 완전히 용 됐더라?”
최소영도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강하나가 흔들리면 오늘 음방 순위를 역전할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게~ 요즘은 우리 연락도 안 받고. 좀 떴다고 너무하는 거 아냐?”
10살 터울의 동생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말하는데도 강하나는 묵묵히 두 사람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박예슬이 비꼬듯 말한다.
“왜 대답이 없어? 뭐라고 말 좀 해. 앞으로도 우리 안 보려고 그래? 응?”
강하나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다 한숨을 내쉰다.
“니들.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거야?”
박예슬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고작? 지금 고작이라고 그랬어?”
그 순간 강하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됐다.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뭐?”
“박예슬. 최소영. 니들 앞으로는 나한테 말 걸지 말아 줬으면 해.”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숫기 없고 늘 웃기만 하던 허당 강하나가 이렇게 딱 부러지게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언니. 지금 뭐랬어?”
강하나가 변했다.
예전처럼 겁 많고 눈치만 살피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강하나가 단호한 표정으로 외친다.
“아까 옷 밟은 거 사과라도 하면 모른 척 용서라도 해 줄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앞으로 또 이렇게 지저분하게 나오면 아이스톤에서 니들이 내게 했던 일들 있지? 그거 전부 다 내 라이브 방송에서 알릴 거야!”
현재 강하나는 매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에 실시간 시청자 수 7천 명을 상대로 방송 중이다.
거기다 구독자 수만 해도 100만 명을 훌쩍 넘은 파워 유튜버.
그런 강하나가 아이스톤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면 박예슬과 최소영으로선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박예슬과 최소영은 자신들이 상대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눈앞의 강하나는 과거 자기들의 눈치만 살피던 소심했던 강하나가 아니라 백만 유튜버이자 음원 1위의 강자라는 것을.
상황을 이해한 박예슬과 최소영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나 언니. 지 지금 협박······ 하는 거야?”
“협박? 사실을 말하는 것도 협박이 되니?”
강하나는 자신의 팬클럽 ‘ONE & only’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을 발탁해 준 정윤호에게도 말이다.
박예슬은 강하나를 흔들기는커녕 자신이 흔들려 버렸다.
“누 누가 아는 척하고 싶대?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박예슬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함께 온 최소영을 향해 말했다.
“소영 언니! 우리도 어서 가자! 우리는 무대 준비해야지.”
“그래. 가자.”
두 사람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달아나 버렸다.
사라진 두 사람을 보며 강하나가 한숨을 몰아쉰다.
“하아~ 하아~”
10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애들을 상대로 열을 낸 게 한심하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하나도 이제 좀 연예인 같은데?”
“그러게요. 이젠 혼자 놔둬도 되겠는데요?”
뒤를 돌아본 순간.
어느새 정윤호가 도란희가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강하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다 들으셨어요?”
“응.”
“어디부터요?”
정윤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 순간 강하나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확 하고 달아올랐다.
* * *
매일 너튜브 라이브 방송을 한 덕에 강하나의 멘탈은 강철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백만 유튜버로서의 자기 위치를 알고 경쟁자들의 괴롭힘에 맞서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한층 더 성장한 강하나의 모습을 보며 칭찬을 건넸다.
“잘했어 하나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강하나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 아니에요. 어린애들이랑 싸운 게 뭐가 자랑스럽다고요······.”
“가만히 있으면 더 바보가 됐을걸? 대신에 앞으로 싸우는 건 우리 매니저들에게 맡겨줘. 알았지?”
겸손하고 정중한 것도 정도란 게 있다.
특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 연예계에서 착하기만 하면 오히려 더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
화를 낼 땐 내 줘야 바보 취급을 당하지 않는 법.
어찌 보면 10살 터울의 동생들 행패를 이제껏 참은 게 용한 거다.
난 빙긋이 웃으며 강하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강하나가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괜찮다니까?”
그 순간 강하나가 속삭이듯 말한다.
“저 저······ 화장실 좀······.”
“아~”
어쩐지 곁에 있던 도란희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더라니.
“어 어서 다녀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강하나를 데리고 본방 무대를 위한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오늘의 1위 후보곡은 강하나의 <새로운 시작> 강하나와 김종훈의 듀엣곡 <혼불> 그리고 이브원의 였다.
“자신 있지?”
순간 강하나가 1위 후보답게 당당히 외쳤다.
“네! 오빠!”
* * *
이브원의 첫 무대가 시작되고 얼마 후.
박예슬은 리허설 때도 하지 않았던 안무 실수를 해 버렸다.
전원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혼자 터닝을 해 버렸다.
첫 데뷔 무대에서 실수한 탓에 전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황한 박예슬은 연달아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질렀고 칼군무를 자신했던 이브원은 미숙한 점을 한껏 드러내고 말았다.
조금 전 강하나와의 충돌이 오히려 박예슬을 흔들어 버린 모양이다.
무대를 끝낸 박예슬과 이브원은 죄를 지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내려왔다.
“고개 들어! 실수해도 기죽지 말랬지! 다음에 잘하면 돼!”
“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이희진 본부장도 화를 내기보다는 격려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브원 멤버 중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 우리의 차례.
난 무대 아래에서 심호흡하던 강하나와 김종훈을 향해 말했다.
“편하게 노래하고 와.”
강하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예? 그러다 예슬이처럼 실수하면요?”
“하면 하는 거지 뭐.”
김종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윤호야. 조금 전에 이브원 실수하는 거 못 봤어? 절대 실수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실수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아.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커버해 줄 테니까.”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담겨 있던 긴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반주를 하기 위해 손가락을 풀던 김종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하여간 윤호 쟤도 정상은 아냐. 안 그러냐 하나야?”
“그러게요. 종훈 오빠. 윤호 오빠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떨지도 않죠?”
두 사람은 날 보며 웃고 떠들면서 남은 긴장감을 완전히 털어 버렸다.
그때 MC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번 곡은 오늘의 1위 후보곡 ‘새로운 시작’입니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곁에 있던 스태프가 사인을 보냈다.
“올라가세요. 두 분!”
김종훈이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날 쳐다본다.
“윤호야. 다녀올게.”
“오빠. 다녀올게요.”
두 사람을 향해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놀다 와.”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며 무대로 향한다.
1위 타이틀 꼭 가져오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