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31. 크리스마스엔 좋은 일이 3
이동민 실장의 따뜻한 시선이 괜스레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우리 윤호. 진짜로 대리 달아도 되겠다 싶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안 그래도 한 팀장이랑 신곡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나보다 낫구나.”
“아 아닙니다. 실장님.”
이동민 실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니긴. 하여간 알겠다. 신곡 작업 스케줄이 정해지면 따로 이야기해주마. 우리 정 스타가 명예 가수 2실 소속인데 그 정돈 알고 있어야지. 안 그래?”
어쨌건 체리블라썸의 미래에도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신곡과 예뜨랑의 화장품 광고?
체리블라썸도 유진이만큼 빠르게 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역시.
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인가 보다.
* * *
이동민 실장과 헤어진 난 곧장 회의실로 이동했다.
“저 왔습니다.”
2실 회의실에서는 구성철 실장과 뿔테 안경을 쓴 30대 후반의 여성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쪽이 정유진 씨 매니저이신가요? 저 버거퀸 홍보실장 안지윤이라고 해요.”
자신을 소개한 안지윤 홍보실장이 악수를 청했다.
악수를 마치자 곁에 있는 여직원도 자신을 소개했다.
“버거퀸의 홍보실 인턴. 이영숙이라고 합니다.”
광고비 협상에 나오는 데 정직원도 아닌 인턴이 나온다고?
“그게 무슨······”
구성철 실장과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안지윤 홍보실장이 이영숙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
“인턴이라뇨. 영숙 씨! 조만간 정직원 발령될 건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곁에 있던 이영숙이 눈을 큼지막하게 뜬다.
“저 정직원······ 이요?”
“아 아직 발령장 못 받으셨구나. 하여간 영숙씨는 버거퀸 정 직원이니까 소개 다시 하세요.”
이영숙은 처음 듣는 표정인 것 같았지만 이내 환한 표정을 짓고서 재차 인사를 꺼냈다.
표정과 말투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버거퀸의 이영숙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이영숙이 태플릿을 펼치고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 자로 정유진 씨를 검색하면 언제나 저희 버거퀸이 함께 검색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저희 버거퀸을 검색해도 유진 씨가 언급되죠. 이것만 봐도 버거퀸과 유진 씨가 상부상조하는 관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성철 팀장이 솔깃해하자 안지윤 홍보실장이 나섰다.
“저희는 유진 씨가 어떤 드라마에 들어가게 되든지 협찬해 드릴 생각이 있어요. 가령 지금 방영되는 ‘아침이 간다’의 연장된 26화까지요.”
“26화까지 연장된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호호. 여기 이 친구가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많거든요.”
안지윤 홍보실장이 이영숙 직원을 가리켰다.
방송계 물을 먹었는데 PD나 AD 쪽은 아니다?
새끼 작가였나?
“그래서 말인데 계약금은 4천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기간은 1년이고요.”
구성철 실장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다.
하여튼 표정을 못 숨기는 사람이라니까.
“실장님께선 최종 결정은 정유진 씨 매니저가 결정하신다고 하시더군요. 결정만 하시면 오늘 당장이라도 도장 찍을 수 있어요.”
결정권이 내게 넘어왔으니 이번에는 제대로 딜을 해 봐야겠다.
“안 실장님. 제의는 상당히 감사합니다만 금액을 결정하기 전에 몇 가지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시작부터 까다롭게 나가자 안지윤 홍보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인에게 4천! 충분히 많은 거 아시죠? 이 이상은 절대 안 돼요.”
이 세상에 절대가 어디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없던 일로 하시죠.”
난 계약은 없던 거로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윤호야! 잠깐만!”
놀란 구성철 실장이 날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곤 회의실 안엔 안 들리게 속삭이며 말했다.
“진짜 거절할 생각이냐?”
“3월부터는 새 드라마에 들어가니 몸값을 올릴 절호의 기횐데 1년은 너무 깁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이번 계약이 파토나기라도 하면 진급도 힘들어져 인마.”
구성철 실장은 내 진급을 고깝게 보는 놈들이 꼬투리를 잡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
무조건 이번 계약은 성사시킬 테니까.
“이지연 작가와 김솔잎 작가가 모두 유진이를 원하는 게 알려지만 화제성은 더욱 높아질 거 아닙니까? 충분히 배팅해 볼 만합니다. 실장님.”
“그러니까 홍보팀을 이용해 그 사실을 살짝 흘려서 기사로 내자고?”
“예. 바로 그겁니다.”
“이지연 작가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자기 이름을 파는 걸 알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그러니까 미리 양해를 구해야죠.”
“고양이 목에 방울은 누가 달고?”
난 두 손으로 구성철 실장을 가리켰다.
“당연히 전지전능한 우리 구 실장님이 하셔야죠. 저 겨우 1년 찹니다.”
구성철 실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요놈 요거. 나한테 떠넘기시겠다? 이럴 때만?”
장난스레 웃자 구성철 실장이 주먹을 살짝 치켜든다.
이크 조심해야겠네.
그런데 1년 차란 게 생각보다 좋았다.
한계가 있는 만큼 골치 아픈 문제는 떠넘기면 그만이니까.
“알았다. 그쪽은 내가 맡기로 하고 들어가서 마무리나 짓자. 자신 있지?”
“예. 틀림없이 다시 연락해 올 겁니다. 오늘은 그냥 보내는 거로 하죠.”
“하긴 내 눈에도 급해 보이긴 하더라.”
“그리고 오늘 기사 보셨죠? 아까 전까지 유진이가 실검 1위 했었습니다. 지금은······ 8위까지 떨어졌지만 나름 선방하는 중이네요.”
구성철 실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대표님이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 내 새끼가 이 정도일 줄을 나만 몰랐나 보다.”
괜스레 머쓱해진다.
“······아닙니다. 실장님.”
“아니긴. 들어가서 마음껏 해봐.”
“예!”
“근데 아까 사고 났었다며? 괜찮아?”
어쩐지 오자마자 날 이리저리 쳐다본다 했더니 그 때문이었군.
오덕구 팀장에게 뒤늦게 보고를 들었단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구성철 실장에게 거뜬하다고 말했다.
“저 튼튼한 거 아시면서. 근데 ······ 수리비 견적이 120 나왔는데요?”
구성철 실장이 발끈한다.
“지금 차가 문제냐? 너 안 다친 게 중요하지! 차야 수리하면 되는 거고 오늘 협상 끝나면 내일은 무조건 병가 내고 쉬어! 아니다. 그냥 모레까지 쉬어!”
“감사합니다 실장님.”
“감사는 무슨. 들어가서 협상이나 마무리하자. 끝나고 소고기 사줄 게. 아픈 데는 소고기가 최고다.”
순간 눈이 번뜩 뜨였다.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회의실로 돌아온 난 곧바로 블러핑을 쳤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로 만나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를 보였으니 저쪽도 한번은 튕길 터.
서로가 바닥이 드러날 때.
그때부터 진짜 협상이 시작된다.
그런데 안지윤 홍보실장의 태도가 어딘지 이상했다.
“잠깐만요. 정 매니저. 나랑 이야기 좀 해요.”
“저랑요?”
“예. 단둘이.”
나갔다 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날 보는 안지윤 홍보실장의 태도가 180도로 변해 있었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말씀하세요. 어차피 구 실장님께 다 보고를 해야 합니다.”
구성철 실장을 팔며 안 나가겠다고 버티자 안지윤 홍보실장은 한숨을 쉬고 폰을 내밀었다.
“이거 정 매니저님 맞죠?”
안지윤 홍보실장이 내민 폰에는 내 얼굴이 기사에 나와 있었다.
[목숨을 건 자동차 충돌. 장준혁을 구한 의인.]
-강동 소방서 김춘수 소방사 장준혁을 구한 사람은 굴렁쇠 엔터의 매니저라고 밝혔다.
-오늘 배우 정유진 씨의 매니저인 정모 씨가 천호대로에서 목숨을 건 충돌을 무릅쓰고 탑스타 장준혁 씨를 구했습니다.
-······한편 버거퀸의 얼짱 알바로 널리 알려진 정유진 씨의 매니저 정모 씨는 며칠 전에도·········
(댓글)
-현장에서 직접 봤음. 자기 차로 장준혁 씨 차를 막고 구조하는데 미친. 심장 터지는 줄 알았음.
-매니저가 아니라 모델 같네. 키도 크고 옷도 괜찮고.
-연예인은 천호동 버거퀸 얼짱에 매니저는 얼짱 훈남에. 그림 좋은데.
-저 매니저 오빠 팬카페 없음?
-내가 만들까? 얼짱 매니저 팬카페? ㅋㅋ
벌써 기사가 올라왔어?
댓글로는 쓸데없는 소리가 가득했지만 기사를 본 안지윤 홍보실장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지윤 홍보실장이 날 향해 말했다.
“1년에 5천!”
하지만 그 금액에는 조건이 있었다.
“대신에 정 매니저도 같이 출연해 주는 조건으로!”
날 보는 안지윤 홍보실장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대고 있었다.
하지만 단호히 외쳤다.
“안 됩니다!”
무지개 반사를 외치듯 빠르게 말하자 안지윤 홍보실장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유진 씨랑 매니저님이 같이만 나와 주시면 그쪽이 원하는 대로 5천 책정해 드린다니까요? 당연히 매니저님 몫으로도 광고비 따로 챙겨 드리고요.”
난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광고에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안지윤 홍보실장이 한숨을 내쉬며 날 흘겨본다.
“하아. 좀 솔직해지죠? 이번 기회에 티비에 나가서 얼굴 좀 알리면 좋잖아요. 방송 출연 욕심 있는 매니저들 많던데.”
그거야 다른 욕심들이 있어서 그런 거고.
매니저를 하면서 쌓은 방송계 인맥을 이용해 예능인 혹은 방송인으로 전향하는 이들도 은근히 많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다.
비록 내게도 별도로 광고비 5백만 원을 준다는 게 조금 끌리긴 하지만 말이다.
“진짜 철벽이시네. 알았어요. 그러면 얼마 바라시는데요? 이야기나 해 보세요.”
“기간은 6개월 금액은 5천만 원입니다. 시리즈 광고를 찍으면 금액은 새롭게 협상하고요. 대신에 일체의 빵류 광고는 안 찍겠습니다.”
조금은 무리한 조건일 수 있었기에 다른 빵 광고는 안 찍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1년이 아니라 6개월이요?”
“예.”
안지윤 홍보실장이 어처구니가 없다며 벌떡 일어났다.
“너무 하신다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못 해요! 영숙 씨. 가죠. 다른 모델 찾아봐요.”
“아 예. 예.”
당황한 이영숙이 따라 일어난다.
하지만 난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요즘 매출 안 좋으시죠?”
순간 나가려던 안지윤 홍보실장이 발걸음을 멈추고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매출 완전! 좋거든요!”
안지윤 홍보실장은 협상에는 통 재능이 없어 보였다.
3개월 만에 메인 홍보 모델인 박은빈을 교체하려고 하면서 매출이 좋다니.
그 말을 누구보고 믿으라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거짓말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박은빈의 인기가 떨어졌으니 버거 매출도 덩달아 떨어졌을 거고. 귀사에서도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했을 게 아닙니까?”
“무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지금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아쉬운 건 저희가 아닙니다. 로티리아에서도 연락 오고 있는 건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안지윤 홍보실장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로티리아는 뻥이지만 절묘한 타이밍에 날린 블러핑이 먹혔다.
“아 그리고 요즘 박은빈 SNS 댓글 상태는 아시죠?”
아이돌이 연기자로 전업할 경우 대개 악플에 시달린다.
이유는 단 하나.
연기를 못하니까.
그런데 박은빈의 경우는 유독 심한 상황이다.
지옥에서 온 연기 발과 손이 오그라드는 연기 그냥 노래만 부르지 등등.
박은빈에 대한 대중의 평가를 이야기할수록 안지윤 홍보실장의 얼굴은 점점 더 새빨간 홍시처럼 변했다.
“아니라고요!”
한동안 씩씩대던 안지윤 홍보실장이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후우.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해서. 하지만 로티리아에서는 저희만큼 안 줄 거예요. 거기 홍보팀이 얼마나 짠데요?”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죠.”
난 구성철 실장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구성철 실장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쇼 타임이다.
“안 실장님. 우리 유진이 3월부터 차기작에 들어갑니다.”
“그래서요?”
“그런데 차기작을 맡은 작가님이 누구냐면 허허 이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유명하신 분인데?”
구성철 실장의 너스레에 안지윤 홍보실장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실장님 연기력이 아주 그냥 십 점 만점에 십 점이네.’
안지윤 홍보실장의 고민이 길어졌다.
더 기다릴 생각이 없던 난 구성철 실장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실장님. 오늘 저녁에 그냥 로티리아나 먹을까요? 요즘 거기서 나온 신상이 참 좋던데.”
“아? 더블더블? 그래 그거 내 딸아이도 잘 먹더라고. 로티리아 홍보실 김 차장이 무료 쿠폰을 잔뜩 보내줬는데 그거 쓰지 뭐.”
순간 안지윤 홍보실장이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 정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