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9화
309. 오복희 1
최은태 회장과 만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강은기와 최은태 회장을 화해시키기 전 우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첫 번째로는 최만식의 예비 장인 박상곤 의원의 비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 탓에 난 다이어리를 펼쳐 강명길 팀장이 돈을 건네는 날짜를 재차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9월 30일]
-PM 11:30 서울 낙산공원 주차장. (보고 사항 : 강명길 팀장에게 지시 전달.)
놈들의 힘이 경찰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내가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실장 자리를 낙점받는 것이었다.
각 실장에게 부여된 독립권은 최만식의 간섭으로부터 내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가 되어 줄 테니까.
짝!
두 손으로 뺨을 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은태 회장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안 이후 심란했던 마음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사라졌다.
“그래. 다시 시작해 보자.”
난 이불을 걷고 일어난 뒤 주방으로 걸으며 기사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신의 이름으로> 12화. 시청률 30.2%!]
[10년 내 최고의 시청률! 이지연 작가의 질주!]
[<신의 이름으로>. 벌써 올해의 작품상과 주연상 신인상 후보들 확정?]
[정유진. SBC와 MBS에서 동시 신인상 수상 가능?]
어젯밤 방영한 <신의 이름으로>의 12화는 결국 30%를 넘었다.
그 탓에 부재중 전화는 77 까톡의 미확인 메시지는 315를 가리키고 있었다.
MBS KBC SBC 방송국의 PD부터 AD까지.
드라마국 예능국 교양국에서 출연해달라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무음으로 해놓았기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잠도 못 잘 뻔할 정도였다.
주방에서 차가운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 하루의 방으로 향했다.
“하루야. 학교 가야지.”
침대 위.
이불을 말고 웅크리고 자던 하루가 힘겹게 눈을 뜬다.
최근 하루는 <먹방의 대가>에 이어 <먹방의 테이블> 예선전을 나가는 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들은 하루가 눈을 껌뻑거리다 화들짝 놀라 앉는다.
“혀 형! 몇 시예요?”
“7시. 아직 시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씻어.”
하루가 이불을 주섬주섬 접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보다 3cm는 자란 터라 세리보다 크다는 게 느껴진다.
하루가 씻는 동안 난 밥솥에서 밥을 꺼냈다.
오늘 아침 메뉴는 김치 참치 볶음밥.
참기름과 김치를 꺼내고 참치를 꺼낸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 MBS 최상병 대표]
“축하 전화인가?”
전화를 받자 최상병 대표가 다급히 말한다.
-정 팀장! 지금 당장 회사로 들어와!
“예?”
-계약해야지. 계약!
“아······.”
그러고 보니 아직 MBS와 <화란전> 계약을 맺진 않았다.
“이따가 작가님이랑 본부장님이랑 다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유진 씨도······ 아 시간이 되나?
“빡빡하긴 한데 오후 촬영만 끝내면 됩니다. 현장 스케줄이 있으니까 3시에서 5시 사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이따 보지!
전화를 끊은 순간 난 잠깐 생각에 잠겼다.
MBS와 계약을 하기로 했지만 새벽에 받은 까톡 때문에 고민이 된다.
[KBC 양준수 CP : 우리 국장님이 MBS랑 똑같은 조건으로 맞춰준단다! 제발 우리 쪽 제안 좀 들어봐!]
[SBC 정삼룡 CP : 정 팀장. 우리 대표님이 당장 유진 씨랑 정 팀장 데려오라신다. 아침에 데리러 갈까?]
<신의 이름으로>가 30%를 넘자 KBC와 SBC도 태도를 바꾸었다.
“그래도 MBS가 우선이지.”
돈을 더 준다고 해도 MBS가 먼저 손을 뻗은 상황을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때 하루가 젖은 머리카락을 샤라락 흔들며 샤워실에서 나온다.
단발을 목표로 기르고 있었기에 귀를 덮을 정도로 찰랑거리고 있다.
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는 하루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하루야. 형이 샴푸 광고 하나 따다 줄까?”
하루가 배시시 웃는다.
티 없는 하루의 웃음에 나도 따라 웃게 된다.
“저 이제 5천 이하 광고는 안 받는데. 아시죠?”
돈 욕심이 별로 없는 하루였기에 장난인 걸 안다.
그러나 난 더 오버해서 말했다.
“에이~ 5천 가지고 되겠어? 1억은 되어야지!”
하루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 아니에요. 형. 농담이었어요.”
“알아. 근데 난 진담인데?”
지난주 <먹방의 대가> 11화의 시청률은 11.3%.
10%를 넘긴 탓에 CK 식품의 양은정 홍보 이사는 광고료로 5천을 더 지급했다.
그 탓에 현재 하루가 광고하는 레토르트 식품 <깔끔한 하루 카레>의 광고비는 총 1억 2천이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진 것보다 하루가 이렇게 밝아진 게 좋았다.
“근데 형. 오늘 아침은 김치볶음밥이에요?”
“어. 세리네 집에서 참기름 올라왔어. 그걸로 해줄게.”
“아싸! 그러면 유진이 누나랑 미소랑 아줌마도 부를까요?”
“다 불러! 오늘은 내가 실력 발휘 좀 해보지 뭐.”
어젯밤 내 심란함을 풀어준 식구들에게 보답을 해줘야겠다.
난 즉각 찬장을 열고 스팸 한 통을 꺼냈다.
김치 참치 볶음밥에서 스팸 김치볶음밥으로 메뉴 전환이다.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채운 순간 절로 콧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김치~ 김치~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김치~”
어느새 나도 미소처럼 흥얼거리며 김치송을 부르고 있었다.
* * *
양평 세트장.
<신의 이름으로>의 17화 분량을 촬영하는 날.
시청률 30%를 넘다 보니 후반부의 촬영에도 스태프들 발걸음에는 힘이 넘쳐 흘렀다.
“자자. 빨리 다음 씬 갑시다!”
“영철아. 컷 끝나면 바로 2번 세트장으로 뛰어!”
“예. PD님!”
다들 얼굴엔 화색이 역력했지만 지쳐서 땀을 흘리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 탓에 난 근처 커피숍 세 군데에 전화해 커피 300잔과 샌드위치 300개를 시켰다.
잠시 후.
세 커피숍에서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도착했다.
“잠깐 쉬면서 요기나 하시죠.”
순간 현장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 정 팀장님. 감사합니다.”
“유진 씨. 잘 먹을게.”
주연배우의 매니저들이 그런 날 보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럴 때 제공되는 뇌물(?)은 스태프들이 배우를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간식 타임이 끝나자 촬영이 재개되었다.
난 유진이가 촬영에 들어간 사이 대기 의자를 정리했다.
그때 차수연 실장이 다가왔다.
“정 팀장님. 고마워요. 덕분에 다들 힘을 많이 받아요.”
“아닙니다. 어제 30%를 넘었는데 당연히 한턱 쏴야죠.”
싱글벙글 웃던 차수연 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런데 다음 작품 MBS랑 하는 거 확정 났어요?”
드라마 제작사 ‘붉은 달’이 부도가 난 까닭에 차수연 실장의 ‘블루드래곤’이 업계 1위로 올라온 상황.
이참에 2위 드라마 제작사와 간격을 확실하게 벌리겠다며 <화란전>을 노리고 있었다.
“아뇨 아직 확정은 안 났습니다. 오후에 MBS에 들어가서 계약하려고요.”
“그러면 오늘 그 계약. 조금만 미룰 수 있어요?”
“설마 ‘화란전’을 제작하시려고요?”
“기회만 주어진다면요. 그리고 제작비 여유는 외주 제작사가 더 있는 거 아시죠? 투자 빵빵하게 땡겨 올게요.”
“글쎄요. 이미 MBS 대표님과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차수연 실장이 내 팔을 잡고 애원한다.
“에이~ 도장 안 찍었으면 우리 조건이나 들어보세요. 네? 세 시간 이내로 연락드릴게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종 결정이 어찌 될진 몰라도 선택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래서 난 일단 조건이 정해지면 까톡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
* * *
‘만신 월아’로 열연을 한 유진이가 대기 의자로 돌아왔다.
더는 ‘만신 월아’의 촬영분이 없었기에 탈을 벗기려 했다.
그런데 그때 촬영을 끝낸 김수희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순간 유진이는 벌떡 일어나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오늘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그러지 마~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김수희 선생님이 장난을 치자 유진이가 눈을 찡긋한다.
“그러면 진유정 여사처럼 말할까요?”
“얘는~? 이제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러면 이상하지. 너 찍히고 싶니?”
“하긴. 그렇겠죠?”
김수희 선생님이 싱긋이 웃으며 나를 번갈아 본다.
“두 사람 덕에 정말 오래간만에 30% 드라마에 출연한 게 고마워서 인사나 하려고 왔어.”
“아니에요. 선생님!”
“아니긴. 그런데 유진이 너 차기작 벌써 정해졌다며?”
“네! 곧 계약할 거 같아요.”
“그럼 나도 네 여주인공 작품에 오디션이라도 봐야겠다.”
“선생님께서요?”
김수희 선생님이 날 힐끗 쳐다본다.
“다들 그러더라고. 정 팀장만 따라가면 흥행은 보장된다면서?”
<화란전>에서 원로 배우들이 맡을 만한 역은 악역뿐.
악역은 임팩트는 강하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크다.
드라마에 흠뻑 빠진 시청자들은 배역 속 캐릭터와 실존 인물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맡을 만한 역할이 마땅치 않을 것 같습니다.”
김수희 선생님이 씨익 웃는다.
“왜? 이 작가가 악역이 아주 잘 나왔다고 하던데?”
“이번에도 악역을 맡으셔서 광고 한편 못 따셨다고 들었는데 다음 작품은 제대로 된 작품에 들어가셔야죠.”
광고주는 어지간해선 악역 배우에게 광고를 맡기지 않는다.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비호감이 되는 게 악역이니까.
그런데 김수희 선생님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봐 정 팀장. 내 나이쯤 되면 사람들 평가는 큰 의미가 없어.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상도 받아 봤으니까. 뭐랄까······. 이제 죽기 전까지 남은 건 도전뿐이야. 이제까지 해보지 않은 역할을 마음껏 해보고 싶어. 배우에게 그것만큼 자극적인 건 없거든.”
김수희 선생님이 단순한 마음으로 날 찾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 뜻이 그렇다면······ 제가 좋은 배역을 찾아보겠습니다.”
“고마워. 정 팀장.”
부탁을 마친 김수희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아 그리고 예전에 내가 했던 말 있지?”
“예? 무슨······.”
“왜 세계로 뻗어 나가란 말 있잖아.”
예전 김수희 선생님은 유진이와 날 자기 회사로 오라고 했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선 굴렁쇠의 틀 안에 있으면 안 된다고.
“그러셨죠.”
“그런데 내가 틀렸어. 정 팀장이 맞았고.”
난 잠시 대꾸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젊은 시절에는 일본 잡지에 나오는 화려한 외국 배우들의 사진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만 했어. 나도 그런 배우들과 어깨를 함께 하고 싶었고······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더라? 해외에서 오히려 유진이를 찾는다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아권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영어 자막을 찾는 팬들이 늘 정도로 유진이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계속 지금처럼만 해. 두 사람은 내가 꾸던 꿈보다 더 큰 꿈을 두 사람이 꾸면 좋겠어.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세상 사람이 모두 유진이의 이름을 알게끔. 어때. 두 사람. 할 수 있지?”
김수희 선생님은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라며 덕담을 해주고 있었다.
유진이와 난 서로를 잠깐 쳐다본 뒤 그녀에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
김수희 선생님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현장 촬영을 끝내고서 유진이와 함께 MBS 본사로 향했다.
우릴 기다리던 강감찬 대표와 곽무혁 팀장 그리고 이지연 김솔잎 한우주 작가와도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마친 우린 발걸음을 재촉해 대표이사실로 올라갔다.
대표이사실에는 최상병 대표와 함께 김격식 드라마국 국장이 함께 앉아 있었다.
“이지연 작가님 오셨습니까? 자자 여기 앉으십시오. 아이쿠. 우리 유진 씨도 오셨네.”
<신의 이름으로>가 30%를 넘자 최상병 대표가 이지연 작가와 유진이부터 챙긴다.
그 순간 이지연 작가가 코웃음을 친다.
“최 대표님! 오늘은 ‘화란전’ 때문에 인사를 왔는데 메인 작가님이랑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제야 최상병 대표가 아차 하고 말한다.
“아이고~ 한 작가님.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최상병 대표가 한우주 작가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인다.
한우주 작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아니 대표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순간 이지연 작가가 말리고 나섰다.
“이봐. 한 작가. 메인 작가가 그렇게 매가리 없이 굴면 보조 작가인 나랑 솔잎이는 어떻게 해?”
김솔잎 작가도 덩달아 이지연 작가의 편을 들었다.
“그래요. 작가님. 우리 메인 작가님이 저자세로 나가면 우리도 방송국에서 무시당해요. 어깨에 힘 빡 주고 다니세요!”
사실 신인 작가가 그렇게까지 힘을 주고 다니면 욕을 먹는다.
하지만 <화란전> 정도 규모의 대작을 맡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대형 드라마 작가는 수십 아니 수백 명의 목숨줄을 쥔 사람이니까.
그러니 자신감 없는 모습보다 조금은 도도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낫다.
조언을 받은 한우주 작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자. 한 작가님. 여기 자리에 앉으시죠.”
최상병 대표의 안내에 작가들이 먼저 앉은 뒤 강감찬 대표와 곽무혁 팀장 그리고 내가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곧장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와 약속한 데서 변동 사항은 없었다.
유진이의 출연료는 무려 1억.
S급 대우를 받게 된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책임 CP는 최태중 그리고 연출은 양현섭 PD에게 맡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작가님?”
양현섭 PD?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최태중 CP는 사극 경험이 풍부하지만 트렌디 드라마로 승승장구한 양현섭 PD는 사극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년 9월에 연출을 맡은 <칼끝에서>라는 퓨전 사극을 대차게 말아먹게 된다.
그 탓에 난 조심스레 회귀 전에도 <화란전>을 맡았던 오복희 PD를 추천했다.
“최 대표님. 죄송한데 오복희 PD님이 연출을 맡아주시면 안 됩니까?”
김격식 국장이 화들짝 놀라 외친다.
“뭐~? 드라마국 최악의 꼴통에게 이런 대작을 맡기자고?”
오복희 PD.
전작에서 주연배우를 구타해 현재 징계 중인 경력 10년 차 여자 PD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