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7화
307. 최은태 4
명동 고택의 안방.
모시옷을 입은 최은태 회장이 금침 위에 정자세를 하고 앉아 있다.
키는 보통 정도였지만 유난히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이가 많은 노인인데도 이목구비가 또렷해 젊었을 땐 꽤 잘생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최은태 회장도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본다.
강은기가 피습을 당한 이 와중에도 한점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자 갑자기 수만 가지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의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굴렁쇠 엔터’의 대주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 순간 강감찬 대표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회장님. 앉으라고도 안 하십니까?”
그제야 최은태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앞에 놓인 방석 두 개를 가리켰다.
“앉으시게들.”
“예. 회장님.”
강감찬 대표가 냉큼 자리에 앉는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방석에 앉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이 끊겼다.
밖에서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10번이나 지날 때까지 최은태 회장과 난 서로를 마주하며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적막감이 이어지자 강감찬 대표가 다시 한번 분위기를 바꾸려 화두를 던져 준다.
“회장님께 친아들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네. 그러니 이날 이때까지 이러고 있었지.”
“그러시군요. 그런데 오늘 여기 윤호와 은기 군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그 말이 면죄부가 될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강감찬 대표의 목소리에 약간의 감정이 묻어 나온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었지만 최은태 회장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리 생각하네. 말로 때울 상황은 아닌 듯 하더군.”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선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게 중요하겠지. 피해 보상은 그 후의 문제고”
강감찬 대표가 미간을 찌푸린다.
“이기적이시군요.”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보상이라니.
아들이 아닌 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냉정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 명동 최고의 사채업자란 소리를 듣고 있나 보다.
최은태 회장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미간에 일자로 그인 주름을 진하게 드러내면서.
“난 표리부동한 인간이 아닐세. 어차피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이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여기 이 친구처럼 말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날 가리킨다.
아니라고 응답하려 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싶었다.
‘나도 참 많이 바뀌었구나.’
강감찬 대표의 말대로 회귀한 이후 돈이 아닌 사람을 위해 살다 보니 이런 평가도 듣고 있었다.
최은태 회장이 아무런 말도 못 하자 강감찬 대표가 날 재촉한다.
“윤호야. 회장님께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강감찬 대표가 어떤 경우에도 난 네 편이라는 눈빛을 보인다.
그 순간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두근대던 심장이 찬찬히 가라앉았다.
난 최은태 회장을 마주하며 물었다.
“아들을 찾는 진짜 이유가 뭡니까?”
최은태 회장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다 한숨을 내쉰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양자로 들인 만식이 놈 때문일세. 자네도 그놈 알지?”
“압니다.”
“그래. 그놈이 날 배반하고 제법 돈을 빼돌렸더군. 그래 봤자 내 재산의 십 분지 일도 안 되지만. 거참. 늘그막에 이게 무슨 망신인지······.”
최은태 회장은 늙었고 그의 양자 최만식은 젊다.
이 시기라면 사람들도 늙은 회장보다 차기인 최만식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을 테고.
아직은 최은태 회장의 영향력이 살아 있지만 몇 해만 더 지나도 꼼짝없이 밀릴 상황이 되었다.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인간을 양자로 삼으셔서 이런 일을 겪게 하는 겁니까?”
“나라고 알았을까? 친아들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땐 나도 젊었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과를 내는 만식이가 나 같아서 그랬네.”
“그러면 이제 키우던 개가 이빨을 드러냈으니 늙은 당신 대신 배신자와 싸워줄 젊은 개를 들이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아들을 찾는 이유입니까?”
정곡을 찔렀는지 최 회장의 주름진 눈가에 지진이 일어났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속셈으로 아들을 찾다니!
그것 때문에 강은기가 죽을 뻔했는데?
수갑에 한 팔이 묶인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강은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때문인지 잠잠하던 가슴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자넨 꽤 직설적이군.”
“회장님 말씀처럼 저도 표리부동한 인간은 아니라서 그런가 봅니다.”
참으려고 했지만 말이 삐딱하게 나간다.
회귀한 이후 이렇게 감정 조절이 안 된 적은 처음이다.
진정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불길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변화를 알아챈 강감찬 대표의 두툼한 손이 내 무릎을 감싼다.
따뜻한 온기가 무릎에 느껴진 순간 마치 마법처럼 차분하게 가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강감찬 대표를 쳐다보자 그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순간 강감찬 대표가 내 아버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망상이 잠깐이나마 들 정도였다.
고개를 끄덕인 난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시금 차분하게 최은태 회장에게 되물었다.
“진짜 그게 전부입니까?”
최은태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젓는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네······.”
“예?”
“이유? 솔직히 말하자면 그 같잖은 이유보다는 아들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네.”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쉰 최은태 회장이 말을 계속 이어간다.
“아들을 만나면 안아줘야 할지 미안하다 해야 할지. 잘 컸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할지. 용서해 달라고 애걸해야 할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지금 난 그 생각으로 가득하니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 따윈 묻지 말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짙은 회한이 묻어 나온다.
대체 왜 이제야 찾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강감찬 대표가 그 말을 듣고 답한다.
“회장님. 고민되시면 모두 다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모두?”
“수십 년이나 홀로 산 아이입니다. 회장님이나 저나 어린 시절 그 고통을 겪어 봤지 않습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강감찬 대표도 부모 없이 자란 시절이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최은태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야겠군. 아들을 찾는다면 마음이 가는 대로 해야겠어.”
강감찬 대표가 이번엔 날 쳐다본다.
“윤호야. 그러면 이젠 누가 회장님의 진짜 아들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냐?”
고개를 끄덕인 난 품속에서 강은기의 머리카락이 담긴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최은태 회장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그건 뭔가?”
“은기의 머리카락입니다.”
“그런······가?”
최은태 회장의 음성이 짧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번엔 날 쳐다본다.
“자네······ 건 없나?”
난 짧은 한숨을 내쉬고 미리 준비한 종이봉투 하나를 더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말없이 봉투를 받아든 그가 탁자 곁에 있는 벨을 눌렀다.
3초도 되기 전.
최영호 은행장이 들이닥쳤다.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김 박사한테 보내거라.”
최영호 은행장이 놀란 눈을 하고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아 예. 예.”
“결과를 보는 데는 얼마나 걸린댔지?”
“특급으로 하면 5시간 정도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검사하고 지급으로 연락해 달라고 전해라.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이제껏 평정을 지키던 최은태 회장의 말이 조금 빨라지고 있었다.
최영호 은행장은 공손하게 종이봉투를 받아든 다음 밖으로 나가버렸다.
짧은 한숨이 서로 간에 몇 번이나 오간다.
그리고 최은태 회장이 우리 쪽을 쳐다본다.
“결과가 올 때까지······ 조금 기다리며 이야기나 하지.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좀 하면서.”
잠시 후.
비서가 가지고 나온 다과를 먹으며 회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혹시 최은태 회장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했지만 그는 일절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굴렁쇠 엔터 이야기만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 최만식에 관한 게 궁금하다고?”
“예. 명동 최고의 부자란 분이 최만식 그 인간을 단번에 쳐내지 못하고 밀리는 이유가 뭡니까? 양아들이라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하시는 겁니까?”
“한때는 그랬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네.”
“그런데 왜 바로잡지 않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 뱀 같은 녀석이 어찌나 교활한지 잡기가 쉽지 않아. 거기다가 내가 보유하고 있던 미래상상 저축은행이 만식이 손에 넘어갔네. 그 은행이 들고 있던 굴렁쇠의 지분 15%도.”
원래 굴렁쇠 엔터의 지분은 최은태 회장이 30% 강감찬 대표가 29% 최만식 대표가 10%를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이기철 이사와 다른 서예종 출신 주주들이 가지고 있었고.
최은태 회장은 자신이 가진 두 개의 저축은행을 통해 굴렁쇠의 지분을 간접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은행 중 하나가 최만식의 손에 들어가자 자연스레 굴렁쇠 지분의 절반도 넘어갔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만식이 그놈. 나 몰래 서예종 출신 주주들의 지분을 인수했더군. 그러니 아마 그놈 지분이 현재 30%는 넘을 거야.”
즉 최만식이 굴렁쇠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는 뜻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아직은 내가 가진 힘이 있어 눈치를 보지만 기회가 되면 놈들은 반란을 일으킬 걸세.”
그러자 강감찬 대표가 묻는다.
“회장님의 자금 동원력이라면 한판 싸워 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래. 돈 싸움을 하면 내가 질 리는 없지. 상장하면 돈으로 주식을 긁어모으면 되니까.”
“그러면 왜 이리 보고만 계십니까?”
“정치!”
단 한마디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난 최은태 회장에게 물었다.
“설마 최만식 대표가 정치권에 줄을 댔습니까?”
“그래. 박상곤 여당 당대표 후보 딸과 조만간 약혼식을 한다더군. 차기 여당 대표를 장인으로 삼게 되는 셈이지. 어쩌면 미래의 대통령을 말일세.”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강지영 본부장을 노린다던 인간이 갑자기 여당 대표 후보 딸과 약혼식을 하다니!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박상곤?’
난 잠깐 대화를 멈추고 급히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박상곤과 관련된 일정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9월 30일]
-PM 11:30 서울 낙산공원 주차장. (보고 사항 : 강명길 팀장에게 지시 전달.)
회귀 전.
김동수에게서 서울 낙산공원 주차장에서 사람 하나를 만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난 당시 다른 스케줄로 인해 강명길 팀장에게 그 지시를 전달했다.
당시 강명길 팀장은 미팅이 끝나고 난 뒤 P 의원의 보좌관을 만나고 왔다며 으쓱거렸다.
대체 누구냐고 물었는데도 대답하지 않더니 한 달쯤 뒤 술에 취해 말했었다.
P 의원은 박상곤 여당 대표였고 그날 그의 보좌관에게 돈이 든 가방을 건넸다고 말이다.
다이어리를 보고 그 기억을 떠올리자 최은태 회장이 묻는다.
“혹시······ 은기 그 친구에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폰을 뚫어지게 쳐다본 터라 오해를 사버렸다.
“아닙니다. 회장님.”
“다행······이군.”
난 안도하는 최은태 회장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혹시 최만식을 치실 생각은 있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흥미로운 듯 쳐다본다.
“설마 자네가 만식이와 싸워 볼 생각인가? 버거울 텐데?”
“혼자서는 그렇겠죠. 하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최은태 회장이 강감찬 대표를 쳐다본다.
“이 친구. 생각보다 과감하군. 헌데도 허풍으로 들리지는 않아.”
강감찬 대표가 씨익 웃는다.
“마치 젊은 시절의 회장님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크흠! 난 이렇게 무모하진 않았네!”
“글쎄요. 구두 닦던 청년 최은태가 명동의 현금왕이 될 거라고 했을 땐 지금보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최은태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이야긴 됐고. 최만식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으니······ 답해주지.”
최은태 회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놈이 내게서 훔쳐 간 모든 걸 무너뜨리고 종국엔 예전 명동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거지 시절로 돌려놓을 생각일세!”
표정도 목소리도 담담했지만 뼈에 새긴 듯한 각오가 느껴진다.
순간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말을 마친 최은태 회장이 한숨을 내쉰다.
“이만하면 답이 되었는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러시다면 박상곤 의원 쪽 정보를 물어다 드리겠습니다.”
최은태 회장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혹 박 의원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뒷돈을 받는 사진을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확히는 본인이 아니라 비서겠지만요.”
최은태 회장이 씨익 웃었다.
“어찌 구할지는 묻지 않지. 가져다만 주게! 박 의원을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 바로 최만식을 처리하지.”
“알겠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난 모른 척 입을 꾹 닫았다.
어차피 설명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갈 때 즈음 누군가 대청마루를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내 닫혔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문지방에는 최영호 은행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누런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회장님. 나왔습니다!”
“이 이리 가져와.”
손을 내뻗은 최은태 회장의 표정에는 조급함이 보인다.
최영호 은행장이 종이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받은 최은태 회장이 손을 덜덜 떨며 봉투를 열기 시작했다.
바스락하는 소리를 내며 새하얀 A4 용지 2장이 종이봉투 밖으로 나온다.
최은태 회장이 A4 용지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 명동 제일의 사채꾼이 눈물을 보이다니.
“회 회장님!”
최영호 은행장이 외친 순간 최은태 회장은 괜찮다며 손을 젓는다.
“괜찮아······.”
최은태 회장이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내게 종이 방향을 틀어 준다.
“이 이것 좀······ 보게.”
최은태 회장이 내민 검사지에는 의뢰인 K라는 글자 아래 친자 확률 99.9994%라 적힌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