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7화
297. 한우주 1
‘뭐야 이건?’
원래 강하나의 보컬은 감미로운 목소리에 탄탄한 발성이 더해져 모든 음역에서 막힘없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서연우의 트레이닝을 잠시 받고 난 이후 모든 음역에서 그녀가 가진 장점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녹음실에 모인 모두는 새롭게 진화한 강하나의 노래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노래는 끝났지만 녹음실에는 여전히 짙은 적막감만이 흐르고 있었다.
녹음 부스 안에 있던 강하나가 뛰어나올 때까지.
“나 방금 엄청 잘했죠? 그쵸? 내 착각 아니죠?”
“대박인데?”
“같은 곡 맞아?”
모두가 일제히 엄지를 치켜들자 강하나가 까무러칠 듯 좋아한다.
그리고 강하나는 3살이나 어린 서연우를 선생님으로 인정했다.
“선생님 대~박!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서연우 또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씨야말로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걸 그렇게 한 번에 하세요?”
두 천재가 만나자 놀라운 결과물을 내놓고 있었다.
흥이 난 이동민 실장은 계약 조건을 통 크게 올렸다.
“연봉 4천! 회사 근처에 쓰리룸! 그리고 할머니한테는 요양사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더욱 좋아진 조건에 서연우의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가 감사합니다!”
잠시 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도착해 두 번째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결과는 대성공!
보컬이라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세리는 물론이고 댄스를 전문으로 하는 멤버들도 이제까지 받아본 교습 중 단연 최고라며 서연우를 족집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강하나와 체리블라썸은 내일부터 제대로 트레이닝을 받기로 하고서 돌려보낸 뒤 연이어 서연우에게 링링이 부른 노래를 들려줬다.
노래를 다 듣고 난 서연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직접 들어봐야 알겠지만 성대가 많이 약한 거 같은데요?”
척하면 척이다.
한 번 듣고 곧바로 성대의 문제를 알아차릴 줄이야.
“성대에 문제가 있다면 가수를 하는 건 무리일까요?”
서연우가 고개를 젓는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요. 작년에도 비슷한 경우의 학생을 가르쳐 봤는데 관리를 잘해서 에이스 엔터 연습생으로 들어갔거든요.”
“정말입니까?”
“예. 방금 들려주신 링링이라는 친구는 특히 음을 예쁘게 낼 줄은 아니까 성대를 최대한 덜 쓰는 창법으로 바꾸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요. 물론 직접 들어봐야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지만요.”
역시 서연우를 데리고 온 게 정답이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에 곧장 강지영 본부장의 방으로 향했다.
녹음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자 강지영 본부장은 곧바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거주하실 곳은 정 팀장이 처리해 주세요.”
“예.”
“할머니를 모신다고 하니 계단 없는 곳으로 찾아보세요.”
“예. 그러겠습니다.”
우린 서연우를 누가 빼앗아갈까 급히 계약서의 작성을 마쳤다.
계약을 마친 그를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서연우를 차에 태운 난 왕룽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실력파 보컬 트레이너를 구했어. 미리 녹음해 둔 링링의 노래를 들려줬는데 자기가 관리할 수 있을 거 같대.”
-진짜야?
왕룽이 중국으로 간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트레이너를 구했다고 하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대표님이 지금 런던으로 출장 중이라서 컨펌받는 데 며칠 걸릴 거야.
“급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링링에게 좋은 소식이나 전해주라고 연락했어.”
-그래. 링링이 진짜 좋아하겠네. 고맙다 윤호야.
“고맙긴. 하여간 수고하고~”
전화를 끊고 나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서연우가 주춤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저보다 많이 형님이신데······ 말씀 편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팀장님이시고······ 같은 회사고.”
높임말을 하는 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난 그런 서연우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잘 좀 부탁한다.”
“네 형님!”
서연우가 기쁜 표정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 * *
서연우의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최대한 집 가까이 내려주고 싶어 골목길로 들어갈 때였다.
“형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이 위로는 이중주차라서 올라가면 차 빼기 힘드실 거예요.”
집까지는 대략 600m나 남았는데 여기서부터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래? 알았어.”
골목길 입구에 차를 대었다.
“그런데요 형님.”
“말 편히 해.”
“예 형. 오늘 일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오늘 공사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것과 일자리를 제안해 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정 고마우면 앞으로 네가 가르칠 애들이나 잘 챙겨. 그거면 되니까.”
서연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가르치는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 자신 있거든요. 앞으로 제가 맡을 가수들은 최고로 만들어 볼게요.”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난 기뻐하는 서연우를 보며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연우 너 원래 가수 되려고 했었지?”
“예······.”
서연우는 원래 가수가 되려 했었지만 외모 때문에 포기를 한 상황이다.
하지만 난 그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보컬 트레이너로서 몇 년만 고생하자. 그러면 네 앨범 반드시 내가 만들어 줄게.”
놀란 서연우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지 진짜요?”
“그래. 당장은 네가 다른 애들의 꿈을 우선으로 해야겠지만 네 꿈은 내가 이뤄줄게. 그러니 우리 애들 좀 잘 부탁한다.”
서연우가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예! 형!”
서연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젠 가 보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앞에 있는 동네 슈퍼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연우야. 내리자.”
“예?”
차에는 비상등을 켜놓은 뒤 서연우와 함께 내려 동네 슈퍼로 향했다.
깜빡이며 졸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우릴 반긴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여기 계란 과자 있나요?”
“저~ 안에 있어요.”
난 곧장 슈퍼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쌓인 계란 과자를 본 나는 여러 개를 꺼내 소쿠리에 담았다.
그리고는 날 따라온 서연우에게도 과자들을 사라고 말했다.
“할머니께 사 드린다고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 그리고 할머니 좋아하는 거랑 네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서연우가 날 빤히 쳐다본다.
“뭐 해? 빨리 안 고르고? 형 빨리 또 돌아가 봐야 해.”
바쁘단 말에 서연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카스타드 크림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 이거 좋아하세요.”
“고작 그거 한 개? 네가 좋아하는 건?”
“전 괜찮아요.”
보다 못한 난 바구니에다 종류별로 과자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것도 먹을 만하고 이것도 괜찮고. 요건 우리 미소가 먹는 걸 한입 얻어먹어 봤는데 맛있더라. 아 맞다 음료수도 좀 사자.”
난 주인아저씨가 잠이 싹 달아날 정도로 과자와 빵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버렸다.
서연우가 양손에 과자와 음료수가 가득 찬 비닐봉지를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너무 많아요. 형.”
“별로 안 많아. 그리고 이거.”
난 마지막으로 주머니 안에서 미리 준비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월급 나올 때까지 일단 이걸로 버텨. 이사비는 회사에서 낼 테니까 생활비로 쓰면 될 거야.”
200만 원.
현재 서연우의 상황이라면 이 돈도 그리 넉넉한 돈은 아닐 거다.
하지만 그 이상 주면 부담을 줄 것 같아 일단 적절한 금액만 넣었다.
“아 아니에요. 저 돈 있어요.”
“오늘 일당도 못 받고 공쳤으니 주는 거야. 넣어 둬. 형 돈 많다.”
서연우는 양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어 저항도 못 한 채 찔러지는 봉투를 받아야만 했다.
“아니 그래도······.”
“할머니 잘 챙겨 드리고 잘 먹고 건강할 것. 그게 팀장으로서 내리는 첫 번째 지시 사항이야. 이 돈은 용돈이니까 갚을 생각하지 말고.”
월급을 받겠지만 할머니 밑에 들어갈 돈이 한두 푼이 아닌 상황.
애당초 강감찬 대표가 내게 상여금을 잔뜩 주는 것도 이런 데 쓰라고 주는 거였다.
난 그 돈을 아끼지 않고 서연우에게 사용했다.
“할머니 기다리실 텐데 어서 들어가 봐.”
등을 떠밀자 서연우가 마지 못해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제야 나 역시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려 하는 순간.
백미러로 집으로 돌아가던 서연우가 멈춰 서 내게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녀석. 참 말 안 듣네.”
난 차를 출발시키며 반쯤 열린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일 보자!”
뒤이어 서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진짜로요!”
서연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골목길에 울려 퍼져 나갔다.
* * *
서연우와 계약을 맺은 다음 날.
굴렁쇠 엔터는 다시 한번 소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가 고작 10화만 방영되었을 뿐인데도 방송사의 PD와 CP들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전화를 피하자 배우 1실과 3실뿐 아니라 가수 실을 통해서도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덕분에 굴렁쇠 엔터의 팀장들은 빨리 차기작을 결정해 달라고 애원을 해오고 있었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팀장급 회의를 끝내고 돌아오자 이영진이 사색이 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KBC 양 CP님께서 다섯 번이나 연락하셨습니다. 회의 끝나고 나오는 대로 바로 전화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팀장급 회의를 갔다 온 동안 이영진의 폰으로 전화가 다섯 번이나 걸려왔단다.
“그 그래?”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상봉은 이영진보다 더 하얗게 질린 채로 말한다.
“팀장님. SBC 정삼룡 CP님은 일곱 번 전화하셨어요. 당장 찾아오실 기세던데요?”
이미 MBS의 최상병 대표와 구두로 계약을 했기에 두 사람의 제의는 거절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 사정을 CP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도장 찍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며 억지를 쓸 게 뻔하니까.
어차피 지금 한우주 작가와 <화란전>의 계약을 맺으러 갈 생각이었기에 난 걱정하는 두 사람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영진아. 상봉아. 지금부터 잘 들어~?”
“예.”
“난 지금부터 잠수탄다!”
이영진과 정상봉이 일제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예?”
“티 팀장님!”
놀란 두 사람에게 하루만 더 버텨달라 말했다.
“지금 전화 받아봤자 욕만 먹을 거야. 그러니까 차기작 계약 맺어서 올게. 그리고 차기작을 잡은 후에는 두 방송국도 내가 책임지고 수습할게.”
이영진이 한숨을 내쉬며 묻는다.
“아까 팀장님이 회의 들어갔다고 했는데 또 전화 오면 뭐라고 하죠?”
“회의는 끝났는데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해. 전화도 안 받는다고 하고.”
“끄응······ 알겠습니다.”
난 급히 짐을 챙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영진이 내 팔을 붙잡는다.
“그냥 저희도 전화를 끄면 안 될까요?”
“응. 안 돼. 돌아가.”
난 팀장의 권위(?)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급히 지하주차장으로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계약을 맺어야 타 방송국 CP들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을 테니까.
* * *
강남역 인근.
난 30분에 3천 원짜리 유료 주차장에다 차를 댄 다음 일정을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1년 3월 17일]
-PM 01:00 <화란전> 저작권 소송 관련 회의. (보고 사항 : 보조 작가 출신 한우주. 스승인 유선정 작가의 시나리오를 탈취했다는 혐의로 피소.)
“아직 안 사라지네······.”
올해 23살인 한우주 작가가 쓴 <화란전>은 내년 상반기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한다.
하지만 <화란전>이 고작 4화 만에 시청률 15%를 돌파하자 스승인 유선정 작가가 즉각 소송을 건다. 제자인 한우주 작가가 자신의 시놉시스를 훔쳐서 대본을 썼다면서 말이다.
그러자 한우주 작가는 즉각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모든 것이 자신의 창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송의 결과는 패배였다. 유선정 작가가 한발 앞서 시놉시스의 저작권을 등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선정 작가는 업계 1위인 KJ 로펌의 힘으로 한우주 작가를 찍어 눌렀고 소송에서 진 그 뒤로 한우주 작가는 작가로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난 지금부터 그 일을 막을 생각이다.
“지금쯤이면 시놉시스는 나왔겠지?”
우선 내가 할 일은 한우주 작가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는 것.
그리고 곧장 시놉시스의 저작권 등록부터 할 생각이었다.
유료주차장에 나와 300m를 걷자 그녀가 사는 연립 주택 ‘다정빌라’가 나왔다.
한우주 작가가 사는 곳은 202호.
아버지는 건설업 일용직으로 일을 하셔서 주로 지방을 도시기에 고등학교 3학년인 남동생 한 명과 함께 살고 있다.
다정빌라 202호에 도착한 난 미리 사 온 선물용 고급 초콜릿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런데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빛이 바랜 푸른색 현관문 안에선 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혁아! 가지 마!
-말리지 마. 내가 오늘은 진짜 그 아줌마 만나서 결판을 내고 올 거야.
-우혁아. 그러지 마! 이번에는 진짜 내 이름도 넣어준댔어.
-장난해? 지난번에도 그렇게 하자고 하고서 누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냈잖아! 이번에는 뭐가 다른데?
누나인 한우주 작가는 동생 한우혁을 필사적으로 말리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선정 작가가 한우주 작가의 작품을 가로챈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걸 알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