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29. 크리스마스엔 좋은 일이 1
“그러니까. 무당이라는 역할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온다 이거지?”
이지연 작가의 새 작품 <신의 이름으로>는 열혈 경찰과 신참 여검사 미모의 왈가닥 무속인이 힘을 합쳐 살인마를 잡는 코믹한 작품이다.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젊은 무속인 즉 무당이다.
남녀 주인공만큼이나 비중이 큰 역할이고.
“무당이라는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해요. 하지만 막상 연습해 보려니까 전혀 감이 안 오더라고요. 무당이라면 칼춤이라도 춰야 하나요? 훠이~ 훠이~ 이렇게요?”
유진이가 양손에 젓가락을 들고 무당의 칼춤을 흉내 내며 흐느적거렸다.
하지만 고깃집에서 반년간 알바를 한 경험이 있으니 <파란 하늘>의 둘째 딸 역할은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다나.
“잘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파악하는 게 필모 관리의 첫걸음이니까.”
지금 못하면 어때?
나중에 하면 되는 거지.
어차피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을수록 소화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또 학습으로 그 기간을 좁히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뭣하면 전문 무속인의 굿 현장을 찾아가 구경을 하고 인터뷰를 할 수도 있다.
회귀하기 전에 들었던 어떤 배우의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어차피 연기는 ‘척하기’라고 했었지.
죽은 척하기 힘든 척하기 착한 사람인 척하기.
로맨스는 사랑하는 척하기.
공포물에서는 살인마인 척하기.
할리우드의 배우들은 엘프인 척하기도 하고 외계인인 척하는 경우도 흔하잖아?
무당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범위 안이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잘할 자신이 있는 배역만 골라서 엑기스만 빼 먹으며 성장하는 것도 좋다.
배우에게 상을 몰아주는 거야 미래를 아는 나에게는 일도 아니니까.
“아무튼 두 작가님이 절 필요로 하는 게 진짜 꿈만 같아요.”
유진이가 활짝 웃자 미소는 그저 좋은지 따라 웃고 있었다.
“응! 나도! 나도 좋아!”
해맑은 미소의 표정을 보자 유진이와 미리 상의했던 걸 슬슬 밝혀도 될 때가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미소에게 말해도 되겠지?’
‘네.’
마임처럼 입만 뻥긋해도 척척 알아듣는 유진이다.
그럼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미소야.”
“왜요? 삼촌?”
유진이의 품에 안겨 꺄륵대던 미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미소.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니까 힘들지 않아?”
미소가 웃음을 멈추더니 유진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자 유진이가 미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미소야. 엄마가 엄만 거 매니저 오빠는 아셔.”
미소가 우물쭈물하며 답했다.
“사실은······ 나도 유노 삼촌이 아는 거 다 알아······.”
순간 유진이와 난 그대로 얼어버렸다.
* * *
“요 앙큼한 것~! 끄아앙! 벌이다아~.”
“꺄하하하. 엄마. 간지러. 간지러~.”
유진이가 미소의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있다.
내가 회귀한 첫날.
나와 유진이와의 대화를 자는 척하며 살짝 엿들었다고 고백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잠결에 유진이가 훌쩍이는 소릴 듣고 깼다나?
“근데 왜 안 말했어? 요것아.”
“약속했으니까.”
“약속?”
“엄마가 사람들이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모라고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랬어?”
“응!”
“미안해. 미소야.”
유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유진이를 작은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엄마 뚝. 나 괜찮아.”
미소가 자기 소매로 유진이의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미소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다.
“그러면 우리 미소도 뚝.”
“응. 엄마.”
주거니 받거니 서로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니 괜히 짠해진다.
“유진아. 조만간에 이 문제는 해결해 줄게. 걱정하지 마.”
가족 문제는 자칫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스캔들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잘만 다루면 호재가 될 수도 있고.
그러니 그 일은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미소의 호칭 문제를 처리한 나는 곧장 광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버거퀸에서 회사로 연락이 왔었어.”
“왜요? 나 천호동 지점장님 전화번호도 지웠는데요?”
미소를 품에 안은 유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제 버거퀸의 광고로 3천만 원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리자 유진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3천만 원요? 저한테 그런 큰돈을 준다고요?”
“그런데 일단 거절했어.”
유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탁 털어놓고 이야기를 한 이유는 유진이라면 오해하지 않고 들어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 광고 포기한 건 아니니까. 최소한 5천까지는 부를 생각이거든.”
“5천이요?”
“어. 그리고 그 틈에 케이크 먹지 말고.”
슬쩍 또 하나 케이크를 입속으로 가져가던 유진이의 손이 멈췄다.
“들······켰네? 하.하.”
틈만 나면 굶주린 맹수처럼 먹을 걸 노리는 유진이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 * *
버거퀸 홍보실은 크리스마스에도 전 직원이 출근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뭐?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요?”
안지윤 홍보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끝인가요?”
“아 그게 로티리아와 매그넘버거에서도 정유진 씨를 잡아 보려는지 한 번 씩들 찔러본 모양입니다.”
로티리아와 매그넘버거는 패스트푸드 업계 1 2위를 달리는 강력한 경쟁자들이다.
안지윤 홍보실장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하여튼 개XX들이 남 잘되는 꼴을 못 봐요! 걔들은 왜 끼어들어서 초를 친대? 아니 그리고 유진 씨한테 버거퀸이란 연관 검색어가 달려 있는데 어딜 끼어들어 끼어들긴!”
화를 버럭버럭 내던 안지윤 홍보실장은 뭔가 생각났는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잠깐. 그럴 리가 없지. 업계 1 2위의 느림보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걔들은 아쉬운 게 없는데?”
성질 더러운 상사의 짜증을 받아주느라 진땀을 흘리던 김영진 팀장도 이 의견에는 동감했다.
“실장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럼 혹시 굴렁쇠 엔터 측에서 우리의 제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튕겨 보는 건 아닐까요?”
버거퀸의 광고를 총괄해온 홍보실이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이제 막 데뷔한 배우에게 광고 한 편에 3천만 원이라는 좋은 제의를 까이다니.
안지윤 홍보실장이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좋게 제의를 해 볼까요?”
김영민 팀장의 은근한 제시에도 안지윤 홍보실장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쪽에서 그렇게 콧대를 내세우면 당분간 우리도 연락하지······.”
그때였다.
두 상사의 언성이 높아지자 보고를 못 하고 망설이는 이영숙 인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 영숙 씨? 뭐 할 말 있어?”
“특이한 사항 생기면 즉각 보고하라고 하셔서요.”
“내가 그랬지. 근데 뭐가 이상한데요?”
“저기 이것 좀 보시면 ······”
이영숙 인턴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네이브 실검 순위]
1위 정유진 찰 싸대기
5위 아침이 간다 시청률 22%
6위 버거퀸 정유진
7위 버거퀸 얼짱 알바 팬카페
9위 박은빈 발연기
10위 아이돌 대전 체리블라썸
“뭐 뭐예요? 이거? 정유진이 실검 1위?”
“예. 어제 유진 씨가 박은성 씨를 아주 찰지게 때렸거든요. 여기 사진이랑 기사도 좀 보세요.”
[아침이 간다 신의 손 정유진!]
(댓글)
-ㅋㅋ. 와 저 손에 맞으면 살아날 사람 없을 듯.
-유진 씨. 싸대기 학원 다니셨나요?
-저기···. 유진 씨 반했어요.
-미친. 싸대기에 반하냐?
-저건 싸대기라기보다는 어퍼컷 아님? 한 방 맞으면 기절할 듯.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사람들은 정유진이 박은성을 때린 장면을 움짤로 만들어서 퍼트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안지윤 홍보실장이 원인을 분석했다.
신인인데 너무 파급력이 센 게 그냥은 설명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이유를 알았다.
실검 순위 7위에 있는 [버거퀸 얼짱 알바 팬카페]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탓이었다.
순간 안지윤 홍보실장의 표정이 급변했다.
“굴렁쇠에서 괜히 튕긴 게 아니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콧대 세울 만하네. 맘에 들어.”
안지윤 홍보실장의 180도 돌변한 태도에 직원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최무성 대리가 다급히 외쳤다.
“실장님. 오늘 또 트래픽을 오버했습니다.”
“그 그래요? 주문량은?”
“어제보다 17% 더 뛰었습니다.”
놀란 안지윤 홍보실장은 다급히 이영숙 인턴을 불렀다.
“영숙 씨. 방송국에서 생활했으니까 드라마에 관해서는 빠삭하죠?”
“예. 아무래도······요?”
“지금 바로 굴렁쇠 엔터로 갈 건데 나랑 같이 가서 보조 좀 해줘요. 아무래도 방송물 먹어본 자기가 나을 거 아냐? 내가 막히는 거 있으면 옆에서 돕고. 할 수 있겠어요?”
홍보실장의 제안에 이영숙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보실의 탑에게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 줄 기회였으니까.
“예. 물론입니다.”
“바로 준비하세요. 그런데 정유진 씨는 뭘 좋아하려나? 이럴 게 아니라 누가 천호동 지점 점장님한테 빨리 좀 전화 좀 해봐요! 우리 차세대 버거퀸 유진 씨 좋아하는 게 뭔지 당장 알아내라고!”
안지윤 홍보실장의 호통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변덕스러운 상사의 지시에 김영진 팀장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저기 천호동 지점장님이시죠? 여기 본사 홍보실인데요······.”
* * *
미소의 그림 그리기 숙제와 유진이의 대본 연습을 동시에 봐 주는 중이다.
“미소야. 거긴 살색이 좋지 않을까?”
인어 공주의 얼굴을 파란색으로 칠하려던 미소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알았어요! 하긴 인어 공주는 나중에 사람이 되니까······. 그래야겠다.”
“그 그런 거야?”
“네. 삼촌. 물고기 피부는 파란색 사람은 살색이잖아요!”
아니 원래도 인어 공주 얼굴색은 살색이었을 텐데?
한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난 곁에서 대본을 씹어먹을 듯 노려보는 유진이에게도 말했다.
“유진아. 조금 전 대사는 조금 더 경쾌하게 읽어.”
“네! 삼촌!”
“내가 왜 네 삼촌이야?”
“그냥 한번 말해 봤어요.”
킥킥대던 유진이는 다시금 대본에 집중했다.
그사이 난 SNS를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거퀸 계약을 미루길 잘했어.’
내 생각대로 네이브의 연예 기사면엔 온통 <아침이 간다>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침이 간다> 22화 시청률 22.5%]
[이지연 작가 또 한 번 대박 작품을 만들어내다!]
[드라마의 대모 이지연. 올해 작품상 1순위?]
[<아침이 간다> 신인 배우 발견! 정유진.]
<아침이 간다> 22화가 시청률 22.5%를 달성한 탓에 연예 기사면이 기록적인 시청률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덕분에 유진이가 박은성의 뺨을 후려친 영상 또한 덩달아 이슈가 되었고.
-싸대기 맞은 후에 박은성 님 표정 좀 봐라. 진짜 당황하신 듯.
-연기에 물이 오른 최은영과 박은성 사이에 있는데도 전혀 안 밀림. 존재감 좀 보소.
-그런데 쟤. 버거퀸 얼짱 알바라는 걔 아냐?
-맞아. 천호동 버거퀸 정유진.
심지어 얼짱 시절의 카페마저 다시금 제대로 활동을 시작했단 기사도 있었다.
관련된 기사가 계속 올라온 덕에 유진이는 현재 네이브 실검 1위를 네 시간 동안이나 차지하고 있다.
무려 크리스마스에 말이다.
이래서 ‘실력보다 운’이라 말도 틀린 게 아니다.
물론 롱런을 하려면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폰에서 눈을 떼고 있지 않자 유진이가 슬그머니 자기 순위를 묻는다.
“오빠. 저 지금 몇 위예요?”
“아직 1위야.”
“헐~ 대박.”
유진이는 실감이 나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소식에도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다음 아닌 다이어리에 적힌 일정 하나 때문이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19년 12월 25일]
-PM 07:00 강동경희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1F VIP실 장준혁. 화환 발송.
대형 사극을 2개 연속으로 성공시키며 최고의 주가를 갱신해 온 배우 장준혁은 한 달 전 전속계약 해지 소송을 낸 후 1인 기획사로 독립했다.
너무도 과한 스케줄 때문에 데뷔 후 10년 동안 쉬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런데 과로가 쌓인 탓인지 운전 중 심장마비로 인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가득한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진실한 사람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런 그가 잠시 후 오후 3시 30분경 천호대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현재 시각은 2시 30분.
이제 1시간이 정도가 남았다.
잠깐 고민이 일었지만 결국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무슨 테러를 막으려는 것도 아닌데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할 이유는 없으니까.
굳게 마음을 먹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내일은 다른 일정이 없으니까 집에서 쉬어. 난 모레 11시에 데리러 올 테니까 오디션 준비 잘하고.”
유진이와 미소가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배웅했다.
“네. 오빠. 운전 조심하세요.”
“삼촌~ 안녕~!”
난 두 사람과 인사하고 천호대로로 차를 몰았다.
장준혁을 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