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9화
289. 운명을 바꾸다 2
원래 쓰촨성의 지진으로 죽는 건 왕룽의 약혼녀인 릴리 혼자뿐이었다.
하지만 행사장이 무너지자 놀란 왕민 부서기는 아들인 왕룽과 며느리인 릴리가 함께 죽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민 부서기가 연신 감격한 말투로 감사를 전해왔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덕분에 내 아들과 며느리가 살았으니······.
“아닙니다 부서기님. 친구로서 꿈자리가 사나워 오지랖을 떤 것뿐인데 우연히 들어맞은 것뿐입니다.”
회귀 전처럼 극존칭을 하며 대했더니 왕민 부서기가 조심스레 말한다.
-그러지 말게. 내 아들의 친구면 아들이나 마찬가진데 편히 말하도록 하게.
차후 중국 공산당의 최고 간부가 자신을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연신 재촉하는 그의 말에 알겠노라 대답했다.
왕민 부서기는 마지막으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를 하라는 말을 남겼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왕민은 이런 건 거절하는 게 아니라며 딱 잘라 말한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불리니 듣기 좋군.
말을 끝낸 왕민 부서기가 다시 자기 아들을 바꿔 달라고 한다.
전화를 왕룽에게 건네자 왕룽이 들뜬 기색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참이나 대화한 왕룽은 나중에 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윤호야. 우리 아버지께서 너 중국에 한 번 데려오라는데?”
“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시네.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다셔.”
왕룽은 자기가 성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가 친구를 보자고 한 게 처음이었다고 흥분한 기색이다.
“아니다 그냥. 우리가 귀국할 때 같이 갈래?”
릴리도 그러자고 권했지만 도저히 그럴 시간이 나지 않았다.
“아니. 유진이 스케줄이 꽉 차 있어 도저히 못 갈 거 같아. 다음 기회를 보자.”
릴리의 목숨을 구한 탓에 생각지도 못한 초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석에서 말없이 있던 링링이 눈빛을 반짝이는 게 보였다.
내게 인정만 받으면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듯 말이다.
‘링링. 조금만 기다려.’
난 일부러 링링의 눈빛을 모른 척한 채 지진 때문에 놀란 일행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 * *
왕룽과 릴리 링링의 한국 방문 일정은 3일.
원래라면 첫날은 주영인이 맡아서 한국 관광을 시켜주기로 했었지만 쓰촨성의 지진 때문에 일정이 꼬였다.
일단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쉬고 싶다는 요청에 결국 우리 집으로 세 사람을 데려왔다.
“어서들 오세요!”
미리 연락을 받은 유진이와 미소는 엄청난 환대로 세 사람을 반겼다.
링링이 중간에서 통역을 맡았기에 대화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정인지 주인아줌마가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내일 L.M.L 브랜드 쇼케이스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릴리는 방해가 안 된다면 자기도 게스트로 나서는 건 어떻냐고 제안해왔다.
난 곧장 이영아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제안을 전했다.
-세상에! 릴리면 요즘 중국에서 반응이 가장 핫하다는 모델이잖아요.
“예. 지금 저희 집에 있습니다.”
나는 릴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냈고 깜짝 놀란 이영아 실장은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조건 콜! 유진 씨 다음으로 순서 잡을게요. 그래도 되죠?
“그렇게 하시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때부터 릴리는 유진이에게 모델 워킹을 알려주며 무대 준비를 도와주겠노라 말했다.
“유진. 도와줄게요!”
“알았어요 릴리 언니.”
1층의 거실이 협소한 까닭에 마당으로 나갔다.
릴리가 먼저 자세를 알려주며 워킹을 시작한다.
“허리를 세우고 시선은 살짝 아래로.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걸으면 돼요. 이렇게요.”
삼선 슬리퍼를 신은 릴리는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걸음걸이를 시작했다.
마당에서 말리고 있던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릴리의 설명을 통역해 주자 유진이도 빨래걸이에서 수건을 하나 뺀 다음 어깨에 걸치고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똑같이 삼선 슬리퍼를 신고 말이다.
“이렇게요?”
릴리가 고개를 젓는다.
“으음. 뭔가 이상해요. 몇 번만 더 해봐요!”
릴리의 말대로 처음 한두 번은 어색했다.
하지만 릴리가 몇 번 더 워킹을 보여주자 유진이는 금세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진이의 워킹은 마치 릴리를 카피한 듯 변했다.
마치 모델 릴리를 ‘연기’하듯 말이다.
열 번 정도의 워킹이 끝나자 릴리가 오케이를 외쳤다.
“와우~ 엄청난 소질이에요! 전문 모델로 나서도 크게 성공할 거예요!”
릴리의 극찬에 유진이가 활짝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카메라로 촬영을 하던 링링이 아쉬운 듯 외친다.
“유진 언니! 한 번만 더요!”
“또?”
“예. 유진 언니는 우리 언니보다 몸매가 예쁘니까 조금 더 라인을 살리는 워킹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제 안목을 믿어 보세요!”
링링은 중국으로 돌아가면 팬카페에 올릴 거라면서 마치 전문 카메라 감독처럼 연신 요구를 해대고 있었다.
릴리가 군말 없이 보고 있는 걸 보면 허황된 말은 아닌 것 같다.
덕질도 경지에 달하면 프로 뺨치는 실력자가 되는 게 드문 일도 아니니까.
그 덕에 유진이의 워킹이 시간이 갈수록 완벽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둑어둑해지는 천호동 주택의 마당에선 중국에서 최근에 핫한 모델의 지도를 받은 한국 최고의 여배우가 삼선 슬리퍼와 분홍 수건을 들고 워킹 연습을 하느라 비지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왕룽을 깨워 2층으로 향했다.
이제 습관이 됐는지 내가 챙겨주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디톡스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릴리와 링링까지도.
“다들 일어나 있네?”
미소가 조로로 달려와 어젯밤 링링이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다며 자랑을 한다.
“삼촌. 내 팬이 중국에도 있대요.”
중국 팬클럽 ‘유미애’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우와~ 좋겠네?”
“응!”
“그러면 더 좋은 소식 하나 알려줄까? 조만간 한국에도 엄마랑 우리 미소 정식 팬클럽 만들 거야.”
현재 유진이의 팬클럽 역할은 버거 소녀 시절에 만들었던 팬카페가 대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에서 정식 팬클럽을 만들어서 관리해야 했다.
규모가 커진 팬클럽은 조공이니 뭐니 해서 큰돈을 다루다 보면 사건이 터지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회계 담당자를 두고 공식 팬클럽을 운영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다.
한국에 정식 팬클럽을 만든다는 이야기에 미소가 신난다며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나도 팬클럽 생긴대~”
“진짜? 잘됐네?”
“응!”
기뻐하는 미소를 보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자자. 어서 준비들 해. 시간이 빠듯하니까.”
준비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L.M.L 브랜드 쇼케이스가 열리는 삼성동 아트홀로 향했다.
아트홀에 도착하자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량을 안내하는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500석으로 무대를 꾸며 놓았는데 추가로 초청 인원을 늘려 700석까지 늘어났다.
그 탓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사람 많네.”
차를 대자 오늘 진행을 맡은 L.M.L의 최선미 대리가 급히 뛰어나와 우릴 반겼다.
“다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최선미 대리는 관계자들만 이용하는 통로로 우릴 안내했다.
주차장에서 50m 정도 떨어진 2번 출입구로 가던 도중 최선미 대리가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정 팀장님······. 이 대리님. 혹시 패션 업계에서 일하셨어요?”
현재 이미리 대리는 새벽부터 현장에서 유진이의 의상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백스테이지에 걸린 옷을 확인하고는 부족한 부분을 그 자리에서 즉각 해결하더란다.
“굳이 따지면 그렇죠?”
이미리 대리는 디자이너 출신에 뉴욕에서 보그지의 편집장 후보 중 한 명이었다고 대답했다.
최선미 대리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세상에. 어쩐지 남다르시더라. 그래서 그랬구나······.”
최선미 대리는 깐깐한 이영아 실장이 백스테이지에서 유진 씨의 의상을 모두 맡겨버리는 게 어쩐지 이상했다 소감을 밝혔다.
우리 팀원이 인정받는다는 소리에 괜히 내 어깨가 으쓱거렸다.
“원래 대단하신 분이죠. 커리어만 따지면 대한민국에서 이미리 대리님만 한 분도 없을걸요?”
최선미 대리는 사적으로 친해져야겠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어느새 2번 출구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백스테이지로 향하는 긴 통로가 보였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우린 최선미 대리의 뒤를 따라 좁은 통로를 줄줄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삼성동 아트홀의 백스테이지.
LM 의류 산하 L.M.L 브랜드팀 직원들이 일렬로 늘어선 옷걸이에 체크가 끝난 의상을 하나씩 걸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메인 모델인 정유진의 의상만은 별도의 옷걸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L.M.L 브랜드 팀원이 아닌 굴렁쇠에서 나온 이미리 대리가 직접 의상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총 10벌의 의상.
이미리는 디자인 북과 대조하며 디테일한 체크를 시작했다.
그중 2번과 3번의 의상에서 문제가 생긴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곧장 수선을 시작했고 지금 막 옷걸이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2번 의상의 지퍼 수리를 마쳤다.
“휴우~ 오래간만에 하니 피곤하네.”
새벽부터 바짝 긴장하고 일한 탓인지 어느덧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이미리는 이번엔 비즈가 달린 3번 의상을 수선하기 위해 옷걸이에서 옷을 빼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 너 뭔데 함부로 쇼에 올라가는 의상에 손을 대?”
이미리는 대체 누가 이렇게 큰소리를 치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새하얀 정장을 입은 여성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
상대는 바로 LM 의류의 조진희 이사.
이미리가 귀국했던 그해 LM 의류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을 때 면접관으로 나왔던 고위직이었다.
미국물 먹은 커리어 말고 국내 커리어를 제시하라던 그 억지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하지만 이미리는 LM 의류의 이영아 실장과 껄끄러워지기 싫어 LM 의류에 지원서를 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이미리는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질 않길 바라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저기 이영아 실장님께서 유진 씨 옷은 제게······.”
조진희 이사는 이미리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외쳤다.
“야! 내 말 안 들려? 일단 의상에서 손부터 떼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자 백스테이지를 관리하고 있던 안상연 팀장이 급히 뛰어왔다.
“아 이사님. 이분은 정유진 씨 스타일리스트예요.”
조진희 이사가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그게 뭐? 스타일리스트면 스타일리스트답게 골라주는 옷이나 챙겨가면 되는 거지 어디 함부로 디자이너의 작품에 손을 대는 거야? 내가 한동안 바빠 현장에 못 왔더니 아주 엉망이야?”
조진희 이사는 LM 의류에서만 20년을 일한 공신.
명품을 내세운 L.M.L이라는 신생 브랜드는 이영아 실장이 직접 관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속 회사인 LM 의류 이사를 무시할 순 없었다.
안상연 팀장은 이영아 실장이 허락한 거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조진희 이사는 듣지도 않고서 이미리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당신······ 어디서 봤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조진희 이사가 화를 버럭 낸다.
“뭐야? 쟤 그때 그 싸가지잖아? 미국물 먹었다고 거들먹거리던 걔!”
조진희의 거친 말투에 이미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상대가 자신을 알아차렸다.
거들먹거리기는커녕 어떻게든 합격시켜달라고 애원했던 걸 왜곡해 기억하고 있었다.
“야! 내가 말했지. 너 같은 애 받아줄 데 없다고. 그래서 스타일리스트가 된 모양인데. 왜? 패션쇼 오니까 네가 뭔가 된 거라고 티라도 내고 싶었어?”
이미리는 자신만의 일이었다면 지금도 참았을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 정유진의 옷을 맡겨 준 이영아 실장과 정윤호 팀장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이미리는 조진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실장님이 수선해도 괜찮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이영아 실장이 허락했다고?”
안상연 팀장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실장님이 유진 씨 옷 좀 봐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오자 조진희가 안상연 팀장에게 짜증을 부렸다.
“야! 이 실장이 그런 판단을 하면 너희라도 말렸어야지. 니들은 뭐 했어? 명색이 디자이너라는 것들이 스타일리스트 나부랭이한테 작품을 맡겨?”
안상연 팀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자 이미리는 이대로 물러서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쇼에 나갈 정유진의 옷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미리는 조진희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이사님! 혼내는 건 저만 혼내세요. 그리고 유진 씨 옷부터 수선해야 하니까 좀 비켜주세요. 그리고 펑크 나면 이사님이 책임지실 건가요?”
조진희가 코웃음을 치며 삿대질한다.
“네가 없다고 무대가 펑크 나? 이거 완전히 미친 X이잖아? 건방진 건 알았지만 싸가지도 제대로네 이거?”
“말조심하세요 이사님! 제가 그쪽 직원도 아니잖아요!”
조진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이거 봐. 이거. 하여간 미국물 먹은 애들 따박따박 대드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야! 너 이번엔 무슨 거짓말로 이 실장을 꼬드겼어?”
“거짓말이라뇨? 그게 무슨······.”
“네 딸이 아파서 일 구해야 한다며?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이제 보니 너 거짓말하는 것도 스케일이 아주 국제적이었네?”
이미리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의 딸이 아파서 한국에 왔다는 걸 믿어주지 않던 여자였다.
그런데 감히 자기 딸이 아프단 사실을 거짓말이라 말하고 있었다.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주기도 싫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 억울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자신과 남편 그리고 딸을 구해준 정윤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이 자리에서 씹어 먹고 싶은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참는 거니까!”
이미리가 이를 빠드득 갈며 정유진의 3번 의상을 붙잡았다.
그 순간 조진희가 말한다.
“그 옷에 손 한번 대기만 해봐. 정유진이고 뭐고 오늘 무대에서 빼 버릴 테니까.”
상대는 LM 의류의 공로 이사.
이미리는 이대로 3번 의상은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든든한 음성이 들려왔다.
“철수하시죠 이 대리님!”
이미리 대리가 고개를 돌리자 정윤호 팀장이 표정을 굳히고 쳐다보고 있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