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6화
286. 인연 3
“정유진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본 하나만 골라 와. 그게 뭐가 됐든 제작해 줄 테니까!”
300억의 비용 손실을 막아낸 대가는 엄청난 기회로 돌아왔다.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편성이다.
제작사가 펀딩을 하고 탑스타를 잡으려는 이유도 편성권을 따기 위해서고.
언제 드라마가 방영되는지 잡히지 않는다면 뛰어난 작가와 시놉시스 그리고 주연 배우가 준비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방송국이 갑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최상병 대표는 제작비 전액과 함께 편성을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터무니없는 제안이라 나도 모르게 폴더 인사를 하고 말았다.
강감찬 대표 역시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우리 회사가 졸지에 제작사의 역할을 겸하게 된 셈이니 말이다.
“너무 큰 선물입니다 최 대표님.”
“아닙니다. 저도 이쯤은 해야죠. 덕분에 크게 터질 사고를 미리 막았으니까요. 만약 일이 잘못되었다면 이사회에서 절 경질하겠다 들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최상병 대표가 다시금 날 쳐다본다.
“아 그리고 내가 출연료는 1억이라고 말했었나?”
“아. 예. 그건 CP님께 미리 전해 들었습니다.”
“출연료는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변동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어떤 드라마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출연자들의 출연료는 변동이 있다.
그런데 장르를 불문하고 출연료로 1억을 챙겨주겠다고 한다.
MBS가 다른 방송국에 비해 처음으로 유진이를 S급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 준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조금 전 선택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게 해드리죠.’
최상병 대표의 과감한 수 덕에 한우주 작가의 <화란전>을 방송할 행운의 방송국이 MBS로 정해져 버렸다.
* * *
대표이사실을 나오자 미리 대기 중이던 MBS PD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자기! 유진 씨 다음 작품도 우리랑 할 거지?”
“좋은 대본이 들어왔는데 같이 좀 안 볼래?”
“아침 방송에 출연할 생각 없어? 의외로 주부층에서 유진 씨 팬덤이 많던데.”
“급도 안 되는 아침 방송은 빠지시지? 정 팀장! 주말 예능 금 토 일 중 입맛 가는 대로 마음대로 골라! 어디든 넣어줄게!”
시사교양국에서부터 예능국 드라마국까지 유진이를 출연시켜달라는 온갖 제안이 빗발치고 있었다.
강감찬 대표가 곁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하루 종일 잡혀 있을 뻔했다.
인산인해를 헤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강감찬 대표 역시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런 기분. 오래간만이구나.”
어제 오늘에 한해서라면 유진이는 한국 최고의 배우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힘은 들었지만 우리 둘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윤호야. 이제부터는 얼마나 잘 버티는가가 중요하다. 알지?”
“예.”
인기가 한 번 올라간 뒤엔 그 인기를 잃지 않도록 유지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어느 계통이든 마찬가지지만 경쟁자들을 이기고 위로 올라가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정상에서 버티는 건 더욱더 힘이 든다.
“당분간 필요한 회사의 자원은 모두 가져다 써라. 내가 책임지고 모든 걸 뒷받침해 줄 테니 한번 쭉쭉 올라가 봐. 좋은 경험이 될 거다.”
강감찬 대표는 위로 치고 올라가는 스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흐뭇하게 웃는다.
“그런데 차기작에 대한 대비는 있고?”
“예. 대표님. 눈여겨 봐둔 작가가 있습니다.”
난 <화란전>을 쓴 한우주 작가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글 자체를 맛깔나게 쓴다고.
그리고 이어서 지금쯤 간략한 아이디어만 있을 <화란전>의 줄거리를 이야기했다.
“신라 시대? 평범하진 않은 것 같은데 대본은 나왔고?”
“아직 시놉시스 단계입니다. 작가를 만난 다음에 협상이 잘 되면 보여드리겠습니다.”
한우주 작가는 현재 스타 작가인 유선정 작가의 보조 작가.
그녀의 작품을 컨택 하기 전 유선정 작가의 저작권 고소로부터 어떻게 한우주 작가를 보호해야 할지부터 대비해야 했다.
강감찬 대표는 나를 믿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을 골라놓았으니 다행이긴 한데······ 제작비에 제한도 없고 이 정도 권한을 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하나에 매몰되지 말고 몇 가지 추려 봐라.”
“예. 그래서 2안도 준비해뒀습니다. 곧 정리해 보고드리겠습니다.”
<화란전>을 드라마로 만들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 두 가지 대본을 더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화란전>을 만들 생각이다.
다른 두 가지 드라마는 <화란전>에 비해 시청률이 7%와 9%씩은 차이가 나던 작품이었으니까.
시원시원한 내 대답에 강감찬 대표는 기꺼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 * *
명동의 일식집 스시료.
굴렁쇠 엔터의 주주 네 명은 늘 모이던 단골집에 모여 월례회의를 진행하는 중이다.
그런데 오늘 식사는 손님 한 명이 함께 하고 있다.
익숙하지 못한 한국어로 다양한 제안을 해 오는 중년의 남자.
그는 굴렁쇠 엔터의 일본 파트너사 ‘아리스 프로덕션’을 이끄는 다나카 대표였다.
다나카는 그간 8 대 2였던 일본 현지 수익 분배를 앞으로는 5대 5로 하자는 전향적인 제안을 해왔다.
스스로 불리한 계약을 감수한다는 게 이상했지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최근 한국의 거물 정치인 박상곤이 파트너 중 한 사람인 최만식을 사위로 맞이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최은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은 일본의 시장 규모를 앞세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던 아리스 프로덕션이었으니까.
“다나카 대표. 이렇듯 우리에게 유리한 제안을 해 주는 이유가 뭐요?”
다나카가 어색한 한국말로 대답했다.
“최근 굴렁쇠 엔터의 성장세가 무섭다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모회사 측에서 굴렁쇠가 곧 한국 1위가 될 것 같으니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또······.”
“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나카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초대해 주신 최만식 대표님께서 저희 모회사 야마모토 회장님을 설득하셨습니다.”
최은태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조건은 그것뿐인가? 우리가 맞춰 줄 건?”
“없습니다.”
최은태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최근 강감찬 대표로부터 일본 쪽 파트너를 다른 회사로 바꾸려 한다는 보고가 들어온 게 바로 며칠 전이다.
강감찬 대표와 강지영 본부장은 용케도 새 파트너 후보로부터 5대 5라는 조건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양자이자 정적인 최만식 대표가 똑같은 조건을 따와 버렸다.
더군다나 아리스 엔터는 주주들에게도 별도의 제안을 한 터라 모두가 최만식의 편을 들고 있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군!’
LSP 그룹의 이상필 회장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난 일본 연예인들의 초상권이 필요한데 가능할까?”
LSP 그룹을 운영하며 화장품과 의상을 일본에 파는 사업가인 이상필 회장은 정작 일본 쪽 파트너사 소속 연예인의 초상권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했었다.
다나카가 씨익 하고 웃는다.
“그 정도는 제가 책임지고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그 틈을 놓칠세라 트루엔젤스의 대표 박형문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그러면 금융 투자 쪽도 연결해 줄 수 있나? 당신네들은 금융계 쪽으로도 아는 인맥이 많다고 들었는데?”
다나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박 대표님.”
최은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이사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최만식의 발 빠른 한 수에 최은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최만식이 해냈으니까.
“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최만식을 포함한 네 사람이 꼿꼿한 자세로 최은태를 쳐다본다.
그 오만한 눈길들을 본 순간 최은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해 눈앞의 인간들을 짓밟아 버릴까를 고민했다.
아무리 늙은 호랑이라지만 놈들의 숨통을 물어 끊을 힘 정도는 숨겨뒀으니까.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아들에 관한 미련이 그 분노를 차갑게 식혔다.
만약 어딘가에 자신의 아들이 있다면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인내해야 할 때였다.
잠시의 침묵 후 최은태의 입이 열렸다.
“만식이가 큰일을 했다.”
최은태의 승낙에 최만식의 입가로 승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즉각 계약조건을 수정하겠습니다.”
“그래. 강 대표한테는 네가 말해 주거라.”
“안 그래도 다나카 대표와 같이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끝낸 최은태가 다나카를 향해 잠시 나가 달라 말한다.
다나카 대표는 차에서 기다리겠다 말하고 자리를 떴다.
네 사람만 남자 다들 상기된 표정으로 최만식을 칭송했고 최만식은 별것 아니라며 겸양을 떨었다.
“제가 한 게 아니라 굴렁쇠의 김동수 실장 그 친구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실상 최만식이 모든 것을 다 했지만 그는 김동수를 키우기 위해 공을 돌렸다.
이대로 놓아두면 굴렁쇠 엔터에서 김동수의 자리가 사라질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상필 회장과 박형문 대표가 껄껄대며 웃는다.
“허허허. 동수가 정윤호 그 친구에게 밀려서 힘을 못 쓰나 했더니. 역시 한 방이 있군.”
“동수 그 녀석이 해외와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큰 건을 터트릴 줄은 몰랐어.”
최만식의 말에 이상필과 박형문도 한참이나 김동수에 관한 칭찬이 늘어놓았다.
마치 최은태에게 들으라는 것처럼.
최은태도 마지 못해 맞장구를 치며 자신을 기만하는 세 사람에 대한 분노를 억지로 삼켰다.
김동수에 관한 칭찬이 끝난 순간 최은태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 그리고 강 대표가 최근에 큰 공을 세운 정윤호 그 친구의 상여금 액수를 정해 달라더구나.”
최만식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팀장급 상여금까지 저희가 의논해야 합니까? 그냥 강 대표에게 맡겨두시죠?”
“상여금을 3억 정도 지불할 생각이라고 하던데?”
세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연말 수익 배분도 아니고 상여금으로 3억이나 준답니까?”
“강 대표 그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닙니까?”
사실 강감찬 대표가 요청한 금액은 1억이다.
하지만 최은태는 3억으로 관철시킬 생각이었다.
오늘 일본 쪽 라인이 트였기에 앞으로는 김동수에게 판이 기울어질 수 있었다.
일본 시장의 수익은 한국의 몇 배나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쪽에 힘이 쏠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추를 반대쪽에 올려야 하는 법.
굴렁쇠가 온전히 최만식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최은태는 강경한 태도로 3억을 고집했다.
물론 그 판단엔 정윤호가 자기 아들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은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정윤호에게 주는 상여금에 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굴렁쇠의 최대 주주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를 양보했으니 하나를 받아낸 것이다.
거기다 일본 협력사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 것도 정윤호의 실적 덕분이라는 어필이 먹혔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것까지 반대하는 세 사람을 보며 최은태 회장은 내심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이놈들······.’
최은태가 키웠던 세 사람이 이제는 그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최만식이 박상곤 의원의 손을 잡으며 급격히 세력을 확장할 기미를 보이자 최측근이던 두 사람까지 최만식에게 붙어버렸다.
그러나 호랑이는 늙어도 호랑이.
최은태의 드러난 힘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자 미소가 내게로 달려와 무르팍에 앉았다.
“삼촌! 삼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부 엄마 팬이래요!”
얘가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미소가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가리켰다.
[대한민국을 사로잡은 정유진의 매력! (작성자 : 장문기 기자)]
-국민 배우 정유진! 충격적인 연기력을 보여준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정유진. 그녀의 변신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나날이 변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댓글)
-뒷골목대인배 : ㅋㅋㅋ. 기자도 드립을 치네. 하여간 나도 오늘부터 정유진 팬임!
-무료상담 : 오늘 아침 보고 우리 엄마하고 할머니도 정유진 팬 됐음! 정유진이 광고하는 상품만 보면 다 사 오래. ㅋㅋ
-방구석여포 : 정식 팬카페는 아직 없나요?
-떡볶이집빵순이 : 태어나 처음으로 덕질 한번 해 보려고 하는데 팬싸 같은 건 언제 함?
-양치기소년가장 : 우리 엄마는 아직도 안 믿고 있음. 정유진이 만신 월아라고 하니까 헛소리하지 말라고 내 등짝 때림.
댓글 대부분이 유진이의 연기력을 칭찬하며 오늘부터 팬이 될 거라는 내용들이다.
난 기뻐하는 미소를 보며 싱긋이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하지만 삼촌은 벌써 알고 있었지롱!”
“헤헤! 그럴 줄 알았어요. 우리 원장선생님도 엄마 팬이라고 그랬고······.”
나를 만나기 전 미소는 사람들이 전부 엄마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단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어린 여자가 혼자 애를 키우니 뒷담화를 듣는 건 예사였기에.
-나 때문에 엄마가 힘들어요.
또 유진이도 부족한 엄마 때문에 미소가 힘들어한다고 괴로워했다.
-내가 부족해서 미소가 자주 울어요. 언니와 형부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두 사람에게서 어두운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대한민국에서 유진이와 미소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으니까.
기뻐하는 미소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우리 미소. 행복하니?”
미소가 눈웃음을 빵긋 지으며 외친다.
“응!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요!”
미소의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소를 살리고 유진이의 영혼을 구했지만 정작 구원을 받은 건 나 자신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삼키며 TV로 시선을 돌렸다.
“미소야. 이제······ 드라마 볼까?”
“네~!”
미소의 대답과 동시에 <신의 이름으로>의 10화 방송이 TV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이번에도 김성운 PD가 시청률을 알리는 전화를 해왔다.
-정 팀장님~ 대박입니다!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