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4화
284. 인연 1
대흥 저축은행의 광고 제안 문자를 보자 고민에 잠겼다.
‘최은태 회장의 지시일까?’
저축은행이 대출 광고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인기 배우를 광고 모델로 쓰려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더는 우연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잠깐 고민하던 난 결론을 내렸다.
‘직접 만나보자.’
김동수와 최만식의 이목을 숨기고 이수찬에게 대흥 저축은행에 대한 정보를 부탁했지만 여전히 결과가 없다.
이제는 아무래도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지 최은태 회장이 왜 이 시점에서 아들을 찾으려는 건지 또 찾아서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사이 유진이의 인터뷰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유진이는 기자들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에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빠. 끝났어요.”
“수고했고 여기 생수 마셔.”
그때 스타 특종의 장문기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부리나케 뛰어왔다.
장문기 기자는 숨을 헉헉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유진 씨. 인터뷰 스킬이 갈수록 좋아지네요. 그래. 이런 건 자꾸 하면 늘어요.”
“장 기자님이 질문을 잘 뽑아주신 덕분이죠 뭐.”
“하하. 그런가?”
장문기 기자가 연신 유진이를 칭찬하다 슬그머니 제안을 꺼냈다.
“정 팀장. 약속은 지켜야지?”
조금 전 인터뷰가 순조롭게 진행된 건 장문기 기자가 중간중간 바람을 잡았기 때문이다.
난 그 역할을 부탁하며 단독 인터뷰를 주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장 기자님. 그런데 오늘은 좀 곤란하고 조만간 날을 잡겠습니다.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요.”
장문기 기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인터뷰 하나로는 계산이 안 맞는데?”
“그러면 정 팀에 다른 배우 한 명 골라서 단독 인터뷰 더 해드릴게요.”
그제야 장문기 기자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오케이~ 그리고 오늘 기사는 기대해도 좋아. 내 필력 알지?”
오늘 <신의 이름으로>는 10화가 방영될 차례.
스타 특종은 유진이에 관해 특집 기사를 쏟아내기로 약속해 주고 있었다.
“그럼 홍보자료도 같이 보내드릴까요?”
“역시 일 잘해. 그렇게 해주면 좋지. 사진도 잘 나온 것들로 몇 장 보내 주고.”
씨익 웃으며 용건을 끝낸 장문기 기자는 인터뷰를 정리하던 기자들 틈 사이로 뛰어갔다.
기자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한 뒤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만나는 스태프마다 엄지를 치켜들며 응원을 보내왔다.
“유진 씨. 조금 전에 기자들이랑 인터뷰한 거 벌써 떴더라?”
“저 미안한데 촬영 끝나면 사인 2장만 해 줘. 우리 쌍둥이들이 유진 씨 사인 받아다 주면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하도 협박을 해 대서.”
“우리 딸은 글쎄 출가해서 무속인이 되겠대. 청명처럼 돈도 많이 벌 거라며. 유진 씨가 그러지 말라고 좀 이야기해주면 안 돼?”
스태프들의 터무니 없는 요구에도 유진이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차수연 실장이 유진이를 급히 찾았다.
“유진 씨! 빨리빨리! 앞 씬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벌써 유진 씨 차례예요.”
“네! 지금 가요~”
스태프들 사이에서 연신 이름이 들리는 광경을 보자 괜스레 가슴이 뿌듯했다.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스태프들이 이름조차 모르던 단역 배우 정유진이 이제는 현장을 씹어먹는 인기 배우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 * *
유진이가 촬영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 난 이수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찬아. 혹시나 대흥 소식 들어온 거 있냐?”
이수찬이 곤란한 듯 대답한다.
-워낙에 상대가 조심해서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
피붙이가 걸린 문제다 보니 최은태 회장도 조심하는 모양이다.
그 순간 이수찬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형님. 흥신소 애들을 쓰는 것보다 저희가 직접 나서 볼까요? 명동 사채 시장 쪽으로 우리 애들 몇몇을 위장 입사시키면······.
난 딱 잘라 말했다.
“됐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내가 조만간 직접 만나볼 게.”
이수찬이 당황한 말투로 묻는다.
-형님이······ 직접 나서신다고요?
“그래.”
-그러면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아냐.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알겠습니다. 대신 대흥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나 한 통 주십시오.
이수찬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노라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수찬이 안도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은기 형님한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은기는 뭐라던데?”
너무 바빠서 은기 면회를 못 갔더니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들은 이후의 반응을 전해 듣지 못했다.
-은기 형님 성격은······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강은기는 대흥이든 최 회장이든 자기와는 관계없는 이들이라며 혹여 자신 앞에 나타나 개소리를 늘어놓으면 죽여버릴 거라 엄포를 놓고 있단다.
역시나 예상대로다.
“날새 쪽은 어때?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날새가 최대한 김동수와 주호성의 눈을 가리고는 있는데 갑자기 재촉한답니다. 앞으로 2주 안에 무조건 결과를 내라네요.
중국 쪽 계약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김동수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단다.
“내가 대흥 저축은행 만날 때까지만 버티라고 해. 그다음에 빼내자.”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이수찬과의 전화를 끊은 난 호흡을 가다듬고 앞서 온 문자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입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장기호 이사라는 사람이다.
몇몇 이야기를 나눈 난 다음 주로 약속을 잡았다.
-그날 저희 행장님이랑 부행장님이 오실 수도 있습니다. 두 분 다 엄청난 유진 씨의 팬이시거든요.
유진이에게 건달들과 관련된 대부업체 광고를 줄 수는 없다.
이건 그저 만날 핑계일 뿐.
“죄송합니다. 그날은 유진 씨가 스케줄이 안 되어서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그러십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아쉬워하는 티가 안 나는 걸 보니 날 만나기 위해 연락한 게 확실했다.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은 뒤 직접 만나 확인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세트장 앞에서 촬영을 준비 중인 유진이와 주영인이 뭔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쟤들은 또 왜 저래?’
저럴 사이가 아닌데 저러고 있으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결국 하던 일을 멈추고 촬영장 가까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고풍스러운 외관의 카페.
홍현주가 미간을 찌푸린 채 카페 앞에 대기하고 있다.
그녀의 곁에는 TNT 엔터의 매니저가 붙어 연신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고.
현장이 첫날인 조연치고는 지나치게 위세가 등등하다.
그러나 HK 섬유의 차녀라는 말이 돈 이후 스태프들이 그녀를 어려워하자 그때부터 점점 뻔뻔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기······ 현주 씨. 촬영 들어갈 거예요.”
스태프 한 명이 다가가 조심스레 말하자 홍현주가 미간에 잡힌 주름을 풀고 자세를 잡았다.
“아 죄송해요. 너무 더워서 정신이 없었나 봐요.”
홍현주가 준비됐다고 말하자 그녀의 매니저가 얼른 카페 앞을 벗어났다.
곧 찍을 씬 120에서 홍현주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들이 추적 중인 귀신들린 범인의 애인 역할.
주문 실수를 한 카페 알바생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그 일을 계기로 주인공들과 충돌하는 역할이다.
알바생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카페의 계산대에 섰다.
그런데 단역의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다.
‘잠깐 여기서 쟤가 왜 나와?’
오성연.
우는 연기가 일품인 배우로 차후 ‘눈물의 여왕’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드라마를 흥행시킨 A급 연기자다.
하지만 올해 21세인 그녀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만한 배역을 따내기까지는 아직 여러 해가 남았다.
“AD님. 저 알바생 역할을 맡은 분은 단역인가요?”
“네. 오늘 알바로 나왔어요. 왜요?”
“아 아닙니다. 관심이 좀 가서요.”
“마음에 드시면 연락처라도 드려요? 소속사는 없는 거 같던데······.”
난 괜찮다며 필요하면 직접 연락해 접촉해 보겠노라 대답했다.
그사이 촬영 준비가 끝이 났다.
“자 씬 120. 샷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하세요.”
유진이와 주영인이 카페 안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 홍현주가 카페의 문 앞에 서서 촬영 시작을 기다렸다.
준비가 끝났단 신호가 오자 김성운 PD가 호쾌하게 외친다.
“자 씬 120. 레디~ 액션!”
촬영 시작과 동시에 홍현주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홍현주는 고개도 들지 않고 폰을 만지작거리며 주문을 넣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재차 물었지만 알아서 하라며 버럭 화를 낸다.
하지만 잠시 후.
홍현주는 오성연이 내민 커피를 보고 소리를 빽 하고 내질렀다.
『야! 이건 뭐야? 이딴 걸 커피라고 타왔어?』
그때였다.
촤악!
홍현주는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아르바이트생의 머리 위로 뿌려 버렸다.
‘미친······.’
대본대로라면 홍현주는 커피를 손으로 쳐 계산대에 엎질러야 한다.
하지만 막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 홍현주가 맛을 살린답시고 애드립을 쳐버린 것이다.
오성연의 머리부터 온몸이 축축하게 젖자 김성운 PD가 급히 컷을 외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오성연이 생각 이상으로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 정도 일로 NG를 낼 수 없다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손님. 금방 다시 타 오겠습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걸까.
머리에서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오성연은 태연히 자기 대사를 읊었다.
그와 동시에 김성운 PD가 들어 올리던 손을 내렸다.
아무리 단역이라고 해도 배우가 연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니 기특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 한 홍현주는 흥이 나 더욱 소리를 질러댄다.
대본대로 막장녀를 연기하곤 있었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진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갑작스레 홍현주의 머리채를 꽉 부여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애드립으로 말이다.
『잡았다! 요 X!』
『꺄아아악! 놔! 이 미친!』
홍현주가 비명을 꺅꺅 내지르며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기를 이어갔다.
『미친 건 너겠지! 하찮은 잡귀 주제에 사람 몸을 차고앉아서 행패를 부려?』
『아아악. 내 머리! 놔! 안 놔?』
뒤이어 일어난 주영인은 능청맞은 얼굴로 말리지도 않고 유진이에게 말한다.
『야. 아무리 봐도 걔는 사람 같은데? 정말 귀신 들린 거 맞아?』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그런 눈썰미로 무슨 검사를 해? 이 영험하신 청담동 신녀님이 언제 틀린 말 하는 걸 봤어? 내 눈엔 딱 보이거든. 이X 이거 귀신이야. 그것도 아주 악질! 죽어라~ 이X!』
유진이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홍현주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댔다.
카페 알바생에게 애드립으로 갑질한 홍현주는 그 대가를 애드립으로 톡톡히 치러야만 했었다.
* * *
“컷~ 오케이!”
김성운 PD가 컷을 외친 순간 유진이는 홍현주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재빨리 놓았다.
“현주 씨. 괜찮아요? 제가 좀 심했죠? 미안해요.”
유진이는 머리카락이 가득한 손을 뒤로하며 태연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영인 역시 유진이의 편을 들었다.
“유진이 얘가 확 몰입하는 스타일이라서~ 기분 나빠도 이해 좀 해?”
먼저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기에 홍현주는 아무런 대꾸도 못 했다.
게다가 스태프들이 리얼했다며 칭찬하자 홍현주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홱 하고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 순간 유진이와 주영인의 눈빛이 맞닿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러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엎질러진 커피 때문에 어수선해지자 유진이가 대뜸 온몸이 젖은 배우 오성연을 우리 차 쪽으로 데려왔다.
“오빠. 저희 차에 옷 남은 거 많죠?”
“어. 그래. 이리 와.”
오성연은 괜찮다고 했지만 유진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오성연을 이끌었다.
단역들이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 다니는 일은 드물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잠시 후.
유진이가 건넨 옷을 입고 깔끔해진 오성연을 보자 회귀 전 모습이 떠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성연에게 전업 연기자가 될 생각이 있다면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진짜요? 저를요?”
“예. 아까 놀랐을 텐데도 잘 대처하시더라고요.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 진지하게 해 보실 마음이 있다면 저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잠깐 고민하던 오성연이 답한다.
“부모님이랑 이야기하고 연락드려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아직 학생이다 보니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단다.
하지만 이미 반 이상은 넘어온 표정이었다.
그렇게 오늘 촬영도 성공적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 * *
현장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유진이를 집에 내려준 후 쉴 틈도 없이 MBS로 행선지를 돌렸다.
<명성왕후 2021> 때문에 MBS의 최상병 대표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MBS의 주차장에 차를 댄 순간.
유진이의 이름이 다시 한번 실검 1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 순위]
1위 정유진 대인배
“대인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유진이가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놓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