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283. 정유진의 시간 5
주영인이 타고 있는 고급 밴.
밤잠을 설친 주영인이 폰을 살펴보고 있었다.
“여기도 정유진······ 저기도 정유진······.”
주영인이 마치 넋이 나간 듯 정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진심으로 느껴보는 패배감에 어쩔 줄 몰랐다.
<파란 하늘> 때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에도 최선을 다하진 않았다.
그 탓에 정유진이 자기 이름보다 앞에 걸려도 분하긴 해도 진짜 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스스로 역대급 연기를 보였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에선 조연인 정유진이 펼친 ‘만신 월아’의 연기력만을 칭송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거슬리는 문구들이 있었다.
‘연기 천재 정유진’.
자신도 한때는 듣던 평가였다.
하지만 정유진에 대한 평가는 주영인이 그런 이야기들 듣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존경하던 업계의 선배 제작자 현장의 스태프들까지.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정유진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 탓에 주영인은 기사를 읽을 때마다 점점 감정을 절제할 수 없게 되고 있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열등감이었다.
급기야 머리를 벅벅 긁어대자 옆자리에 앉아 폰을 보던 안영희 실장이 주영인의 폰을 빼앗아 버렸다.
“폰 그만 봐.”
“아! 뭐야? 짜증 나 정말! 어서 폰 줘요!”
주영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안영희 실장은 이 정도로 기가 꺾일 여자가 아니었다.
“왜? 질투 나? 열 받아?”
주영인이 안영희를 째려본다.
“몰라서 물어요?”
안영희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솔직히 정유진. 장난 아니더라. 동급 최강 뭐 그런 느낌?”
너무 뻔뻔한 태도에 주영인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뭐예요? 지금. 나 열 받게 하려고 작정했어요?”
주영인의 고성에도 안영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말을 끝까지 들어. 난 네가 걔한테 뒤진다고 생각지 않으니까.”
주영인이 안영희를 노려본다.
“지금 장난해요? 여기도 저기도 정유진인데?”
안영희가 코웃음을 친다.
“기억이 잘 안 나나 본데 너도 한때는 그랬어. 연기 천재 주영인! 혜성과 같이 나타난 괴물 신인. 언론이 그렇게 도배하던 시절이 불과 2년 전이지 않았어?”
“그랬었죠. 그런데 그때랑 비교가 안 되잖아요.”
안영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래. 하지만 내가 볼 때 넌 아직 발전 가능성이 있어. 뭔가 여유를 남겨 둔 느낌이란 말이야. 그 포텐만 터트리면 정유진한테서 그 타이틀 뺏어오는 건 일도 아닐걸?”
“모르는 소리 마세요. 나 이번 작품은 정말 죽어라 했단 말이에요!”
안영희가 코웃음을 친다.
“글쎄? 진짜로 모든 걸 잊고 연기에만 올인했어? 딴생각한 적도 없고?”
“아니 그 그건······.”
주영인의 말문이 막혔다.
이 순간에도 정유진의 성공에는 정윤호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를 뺏어오려는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안영희가 말이 없어진 주영인을 토닥인다.
“정유진 걘 천재 맞아. 하지만 너도 천재야. 차이점은 단순해. 걘 연기만 생각하고 넌 다른 생각이 너무 많다는 거.”
업계 경력 12년 차의 베테랑 매니저의 말.
한동안 생각에 잠긴 주영인이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이란 건 뜻대로 안 된다.
연기를 더 열심히 해서 이기겠다는 마음이 커가는 만큼 정윤호를 가지고 싶은 마음도 똑같이 커져만 가고 있었으니까.
승부와 남자. 둘 다 포기하기 싫었다.
결국 주영인이 내린 결론은 두 배로 더 노력해 어떻게든 두 가지 모두를 가지겠다는 거였다.
입술을 꽉 깨문 주영인의 눈빛이 여느 때와는 달리 번뜩이고 있었다.
주영인의 속내를 모르는 안영희 실장은 주영인의 굳은 표정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 이젠 네가 따라가는 입장이란 걸 인정해. 그래야 진짜 걔를 뛰어넘을 수 있어.”
주영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 *
김성운 PD를 만나고 유진이의 대기 의자로 향하는 길.
HK 섬유의 차녀 홍현주가 차수연 제작 실장과 협찬 이야기를 하는 게 보인다.
그런데 HK 섬유의 빽 때문인지 마치 주연처럼 당당해 보인다.
홍현주와는 첫 만남이 좋지 않았기에 굳이 부딪히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연기하는 동안 난 대기석을 정리하면서 강지영 본부장에게 까톡을 보냈다.
오늘 밤 <명성왕후 2021>의 작가 문제로 MBS의 대표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정윤호 팀장 : 오상종 작가 밑에 있던 대학원생 중에 이지애 성유연 유지혜. 이 세 사람을 집중적으로 알아봐 주세요.]
[강지영 본부장 : 그 세 사람이 피해자예요?]
[정윤호 팀장 : 예. 고소 준비 중일 테니까 법무 팀장님하고 같이 가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내 기억 속 인물들을 직접 언급했다.
어디서 들었냐는 이야기에는 이수찬이 데리고 있는 흥신소를 핑계로 대었고.
그런데 그때였다.
까톡을 주고받는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갸름한 얼굴에 유달리 흰 피부.
그리고 긴 생머리의 전형적인 미녀.
조금 전 현장에 도착한 HK 섬유의 차녀 홍현주였다.
“뭐야? 당신? PD가 아니라······ 매니저였어?”
내 정체를 알아차린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잘 지내셨습니까?”
태연하게 대꾸하자 홍현주가 씩씩거리며 날을 세운다.
“잘 지냈냐고? 당신 나한테 PD라고 사기 쳐놓고서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내가 언제 PD라고 말을 했었나요? 그쪽이 혼자 오해해 놓고.”
속이 아파 보여서 게토레이도 줬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순간 홍현주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20살도 안 된 홍현주의 행동이 너무도 버릇없어 따끔하게 한마디를 쏘아주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거기! 선배들 대본 보시는데 왜 언성을 높여?”
홍현주가 발끈해 고개를 돌렸다.
“뭐?”
그런데 그곳에는 눈에 쌍심지를 켠 주영인이 서 있었다.
“주영인······?”
주영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걸어온다.
두 사람의 코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뭐? 주.영.인? 내가 네 친구야?”
주영인이 코앞에서 침을 튀기며 쏘아붙이자 홍현주가 몸을 부르르 떤다.
그러나 아무리 홍현주가 재벌가 딸이라고 해도 여배우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주연 여배우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연예계는 위계질서가 꽤 엄격한 판이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좀 흥분해서 말이 잘못 나왔어요.”
홍현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주영인이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윤호 오빠가 너한테 욕먹을 위치는 아니지 않나? 이분이 너희 회사 매니저도 아닌데?”
주영인은 홍현주를 씹어먹을 듯한 표정을 짓자 홍현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정작 주영인이야말로 다른 회사 소속 매니저를 감싸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었으니 답할 수밖에 없다.
“그 그게 이 새끼······ 아니 이 오빠가 클럽에서 절 속이고 신분을 사칭했거든요. 그 일을 따지러 왔다가 화가 나서 그만······.”
홍현주가 난감해하는 모습에 그녀의 매니저인 전희상 팀장이 나선다.
“영인 씨. 우리 현주가 좀 억울한 일을 당해서 그러는데 조금 자리를 피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가 나중에 섭섭지 않게 보상을······.”
주영인이 전희상 팀장을 째려본다.
“그쪽이 뭔데 보상을 하니 마니 하죠?”
전희상 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말을 안 드리려고 했는데. 우리 현주 씨는 HK 섬유의 자녀분입니다. 그리고 전 현재 TNT 엔터의 소속이긴 하지만 사실은 HK 섬유에서 파견 나온······.”
전희상 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홍현주의 기가 다시 살아났다.
HK 섬유는 HK 의류의 방계 회사.
HK 의류에 섬유 납품은 물론 자체 아웃도어 브랜드까지 가지고 있는 꽤 이름 있는 중견 회사.
하지만 주영인은 눈도 끔뻑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떻게? 내가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까? HK 섬유가 뭐가 대수라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런데······ 말이 좀 심하신 거 아닌가요?”
홍현주가 빈정이 상해 투덜거렸다.
주영인이 피식 웃는다.
“네가 진짜 심한 욕을 못 들어봤구나? 여기서 한번 들어볼래?”
말없이 주영인을 노려보던 홍현주가 분한지 발을 작게 굴렀다.
홍현주는 할 말이 없어지자 곁에 있던 TNT 전희상 팀장을 쏘아본다.
“전 팀장님! 나 촬영할 시간 다 된 거 같은데. 맞죠?”
“아 예. 예. 어서 가셔야죠.”
홍현주는 촬영이 급해서 간다는 듯 몸을 홱 돌려 사라져버렸다.
주영인이 그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친다.
“겨우 단역 주제에 위세는 주연 뺨치네.”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던 주영인이 다시금 내게 시선을 돌린다.
“오빠. 괜찮아요?”
누가 보면 깡패한테 위협당하는 사람을 구해준 듯 자신감 뿜뿜이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깐 고민이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란 게 있으니 감사하다 말했다.
“아 예. 뭐. 덕분에 괜찮습니다.”
주영인의 콧대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인다.
“그나저나 어쩝니까? 분위기를 보니 앞으로 영인 씨가 HK 쪽 일은 받기 힘들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HK 의류 쪽은 원래 안 받아요. 옷이 안 이뻐서.”
황당한 변명에 함께 온 안영희 실장이 한숨을 내쉰다.
HK 섬유의 차녀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경력이 있는 매니저.
연예인의 돌발 행동 정도에 흔들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주영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 오빠를 찾아온 건 아니고 유진이 좀 보려고요. 그런 엄청난 걸 보여줬는데 축하는 해줘야죠. 그리고 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같이 좀 찍고요.”
주영인은 어제 현장에 없었다.
덕분에 세상이 발칵 뒤집힌 그 일을 집에서 봤다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촬영 곧 끝내고 내려올 겁니다.”
솔직히 ‘만신 월아’의 화제성에서 밀려 침울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업계 경력 12년의 베테랑 안영희 실장이 케어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그녀는 연예인들의 멘탈 관리에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안영희 실장이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넨다.
“저 안영희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 예. 실장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안영희 실장과 간단한 인사를 하는 사이 촬영을 끝낸 유진이가 돌아왔다.
안영희 실장이 있었기에 유진이가 높임말을 한다.
“선배. 무슨 일이세요?”
주영인이 피식 웃으며 어제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인 거니?”
주영인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연신 유진이를 칭찬해대고 있었다.
듣는 내가 당황스러울 만큼 말이다.
대화를 나눈 주영인은 태연하게 유진이와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직전 감춰뒀던 속내를 살짝 드러내었다.
“네 연기. 지금의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정도였어······.”
“예?”
자기 할 말만 한 주영인이 몸을 홱 돌려 사라져 버렸다.
유진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쟤······ 왜 저래요?”
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더위를 먹었나?”
자존심 강하기로 대한민국 둘째라면 섭섭해할 주영인이 유진이를 인정할 줄이야.
말하는 투로 봐서는 진심인 것 같은데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이 묘하게 거슬렸다.
‘아직 완전히는 포기 안 했군.’
안영희 실장이 어떻게 주영인의 멘탈을 관리했는지 몰라도 절대 기가 죽은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만신 월아’로 대번에 입지를 높인 유진이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테니까 말이다.
난 얼떨떨해 있는 유진이에게 말했다.
“자자. 유진아. 이제 인터뷰 준비해야지.”
그제야 유진이가 정신을 차리고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썰!”
* * *
현장에 모인 기자들이 전부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웅성웅성.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인터뷰 안 할 겁니다.”
‘스타 매일’의 최한선 기자가 외친다.
“아 그러니까 빨리 인터뷰만 좀 하자고!”
거기에 동조해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자들이 성화를 부렸지만 난 조건을 들어줘야 인터뷰를 하겠다고 엄포했다.
이상한 질문을 하면 그 신문사와는 앞으론 절대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거라고.
대신 사전 질문지를 보내는 언론사에 한해 얼마든지 인터뷰를 받겠다고 말이다.
다들 어쩔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기자들이 얌전해진 터라 난 그제야 양해를 받고 유진이를 불렀다.
유진이는 기쁜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고 곧바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저기 유진 씨. 어떻게 ‘만신 월아’를 맡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유진이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기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가장 먼저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재빠르게 기사를 송고했다.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만신 월아’에 관한 기사가 다시 올라오자 실시간 검색 순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실시간 검색어]
1위 정유진
2위 만신 월아
3위 1인 2역
4위 신의 이름으로
······
유진이의 인기가 얼마큼인지를 재차 확인한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터무니없는 곳에서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자 : 010-97XX-8888]
-대흥 저축은행 홍보실입니다. 정유진 씨를 광고 모델로 쓰고 싶어서 문의드렸습니다. 최고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