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화
28. 승진?
홍보팀 성민석 팀장은 태블릿을 든 채 유진이의 광고 제의에 관한 보고를 연이어 가고 있었다.
“1년 계약에 3천만 원이라고 했나?”
“예. 신인치고는 조건이 꽤 괜찮습니다.”
강감찬 대표뿐 아니라 강지영 본부장 그리고 구성철 실장까지 얼굴이 밝아졌다.
통상적으로 신인 배우의 몸값은 1년 계약에 1천만 원에서 2천만 원 사이니까.
거기다 CF로 얼굴을 노출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도 좋은 일이긴 하다.
‘3천만 원이라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회귀 전의 나라면 절대 수락하지 않을 조건이다.
이지연 작가의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잘만 이용하면 최소 5천만 원 정도까지는 올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를 제외한 모두는 이쯤에서 만족하자며 버거퀸의 제의를 받아들일 분위기였다.
‘어떻게 한다. 이번에는 그냥 이대로 넘어갈까?’
불편한 내 속과는 반대로 다들 웃기 바빴다.
“참 자기네도 사정이 급하다며 내일까지 결정을 내려 달랍니다.”
그 정도로 급해 보이더라는 성 팀장의 첨언을 들은 강감찬 대표가 갑작스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 우리 윤호. 네 생각도 한번 들어보자.”
강감찬 대표가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저기······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도 되는 겁니까?”
“그럼. 편하게 말해 봐.”
강감찬 대표의 허락에 난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그 계약. 좀 미루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구성철 실장이 당황해서 외쳤다.
“윤호야. 저쪽도 급한 것 같다는 말 못 들었어?”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성민석 팀장은 무슨 이런 당돌한 놈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하지만 강감찬 대표만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언제까지 미루는 게 좋을까?”
설마 내 의도를 눈치챈 건가?
“다음 주면 어떨까요? 딱 한 주 정도만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강감찬 대표가 황당해하는 구성철 실장을 토닥였다.
“구 실장아. 일단 진정하고 상황 파악 좀 해라. 너 이 업계에 들어온 지 몇 년이나 됐냐?”
“저야 올해로 꽉 찬 15년 차 아닙니까?”
구성철 실장의 대답에 강감찬 대표가 장난스레 말했다.
“15년이라. 흠 아직 파릇파릇한 연차구나. 껄껄.”
구성철 실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밀당하다가 버거퀸에서 다른 모델을 찾기라도 하면 우리만 손해 아닙니까?”
구성철 실장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눈치였지만 강지영 본부장은 달랐다.
“아니에요 구 실장님. 그 정도로 서두르는 거 보니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아쉬운 기색 보이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제야 좀 이야기가 통하네.
강지영 본부장의 판단을 들은 강감찬 대표가 약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곁에 있는 홍보팀의 성민석 팀장을 불렀다.
“성 팀장아. 지금 실검 순위 좀 불러 봐라.”
“예. 어? 어. 이게. 그러니까······”
당황하던 성민석 팀장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태블릿을 클릭했다.
“1위 쁘띠모 4위 버거퀸 얼짱알바 정유진 5위 체리블라썸······”
현장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명색이 엔터 회사에 다닌다는 놈들이 버거 회사보다 느려터져서는. 다 헛똑똑이들이냐? 어째 윤호보다 못해!”
“아······.”
“면목 없습니다. 대표님.”
이제야 모두가 확실히 알았단 반응을 보였다.
“윤호. 아니 정 스타.”
“예.”
“넌 그만하면 대리 달아도 되겠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3년 차에 대리를 다는 것도 빠른 편이었는데 고작 1년 차에 대리라니!
곁에 있는 구성철 실장이나 강지영 본부장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뭘 그리 놀라고 그러나. 우리 회사는 실적제로 돌아가는 거 몰라?”
하긴 김동수 그 인간도 그놈의 실적제 덕에 빠른 출세를 했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릅니다. 대표님.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은데······.”
구성철 실장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강감찬 대표는 강경했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래? 김동수도 2년 차에 대리 달아줬잖아?”
그러자 강지영 본부장이 반박했다.
“김동수 실장이 대리를 단 건 정확히 입사한 지 2년 다 되었을 무렵이잖습니까? 그런데 만 1년도 안 된 윤호 씨가 대리를 달면······”
그러자 강감찬 대표가 손을 들어 본부장의 말을 끊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셈이냐? 소소한 소란은 니들이 커버하고. 윤호는 유진이 차기작이 정해지는 대로 대리 달아 줘!”
강감찬 대표는 더 이상의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카리스마 있는 그의 발언에 더는 반론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구 실장.”
“예.”
“버거퀸 광고. 협상은 쟤한테 맡겨 봐.”
“예? 윤호한테요?”
“그래. 윤호가 밀당을 할 줄 아네. 대신 네가 옆에서 돕되 웬만한 건 윤호가 하자는 대로 해 줘봐라. 이놈 한번 키워 보잔 말이다.”
강감찬 대표의 파격적인 발언에 심장이 미친 듯 두근대기 시작했다.
1년 차에게 광고 협상을?
아무리 강감찬 대표의 눈에 들었다고 하지만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다.
“대표님. 저기······.”
강감찬 대표가 내 말을 끊었다.
“겸양은 됐다. 원래 일은 해봐야 느는 거니까 맡아서 해봐. 지금 유진이의 가치에 대해서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이 방에는 없다.”
다들 경악하는 눈빛이었지만 강감찬 대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내 발언이 꽤 인상을 깊게 남긴 듯하다.
그렇다면 더는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니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판을 깔아준 강감찬 대표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지금 난 회귀 전보다 몇 배는 빠른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 * *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은 이지연 작가가 김솔잎 작가에게 말했다.
“솔잎~.”
“예? 작가님.”
“아까 유노 얼굴 봤지?”
“예.”
“걔 같은 눈빛 가진 애는 쉽게 뜻 안 바꿔. 내가 압박을 해도 콧방귀도 안 뀌잖아.”
“그 말씀은······?”
“그래.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미 선택한 눈치더라고. 너도 알잖아. 귀신도 내 눈은 못 속이는 거.”
“······”
이지연 작가의 말에 김솔잎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작가도 자존심이 있어야 하지만 자기 배우에게 그 정도 자신감이 있는 매니저도 안 많아. 배우만큼이나 걔를 담당하는 매니저도 볼 것. 앞으로 좋은 배우 고르는 데 도움 될 거야.”
“예.”
김솔잎 작가의 대답에 이지연 작가가 아쉬운 듯 말했다.
“솔잎.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조언이야. 앞으론 혼자야. 알지?”
애틋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지연 작가를 본 김솔잎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워낙에 성격이 독특해 모시기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날수록 그녀가 신경 써 주는 세심함에 감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만 하더라도 자신을 밀어주기 위해 제작사도 구해주고 편성도 잡아주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굴렁쇠 엔터까지 찾아가 자신과 경쟁할 작가로까지 추켜세워 주고 왔으니까.
무안해진 김솔잎은 눈에 고인 눈물을 감추느라 괜히 말을 돌렸다.
“작가님. 어디 아프신 거나 시한부 그런 거 받으신 거 아니죠?”
이지연 작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쪽팔리게 왜 이래? 천하의 이지연이 까였으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거지. 와 그러고 보니 걔 내 대본도 안 보고 깠네? 그치?”
이지연 작가의 뒤끝은 생각보다 길었다.
“아냐. 다시 생각해보니 솔잎이 너한테 주긴 유진이가 아까워. 내가 데리고 갈게. 그래도 되지?”
“호호. 싫은데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이미 선택했다고.”
그 말을 들은 이지연 작가는 평소 때처럼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침까지 김솔잎 작가는 이지연 작가에게 시달려야 했다.
-내 작품을 보지도 않고 거절하다니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은 못 하게 하겠어!
-꼭 끝내주는 대본을 완성해서 차기작엔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하게 해 주겠어!
-유노 전화번호 내놔! 걔한테 전화해서 당장 유진이 바꾸라고 해!
-뭐? 잔다고? 내가 안 자는데 지가 잠이 와?
-아니지. 천하의 이지연이 왜 차기작까지 기다려?
-솔잎. 걔한테 이번 작품 나랑 안 하면 영원히 안 볼 거라고 전화해!
원고를 수정하느라 카페인을 과도하게 섭취한 이지연 작가의 광기 어린 헛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는 7시까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도 김솔잎의 귓가엔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전날 최고급 초밥을 얻어먹은 터라 그 정돈 버텨낼 여력이 있었다.
* * *
2019년 12월 25일.
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유진이의 집으로 와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유진이와 미소가 웃으면서 둘이서 힘을 합쳐 만든 케이크를 들고 왔다.
삐뚤빼뚤한 시트지에 생크림을 발라 놓았는데 파워터프걸 모양의 초콜렛으로 장식되어 있다.
미소가 초를 한데 모아 불을 붙였다.
“삼촌! 어서 후 하고 불어요!”
“후욱!”
내 호흡 한 번에 가볍게 불이 꺼지자 미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소야. 그러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
“나 비밀 무기 생겼어요!”
미소는 주방으로 달려가 조그마한 소화기를 들고 왔다.
주인아줌마와 함께 근처 소방서에 가서 실습을 받고 받아왔는데 아직 써먹질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잠깐 당황했지만 미소의 표정이 귀여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빠. 이거.”
유진이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케이크 커터칼을 건넸다.
“이걸 왜 날 줘?”
“그야······ 오빠 덕분에 맞는 크리스마스니까.”
유진이의 말에 난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 민망하게.
가슴 한편이 막 간지러운 기분이다.
“알았어. 그럼 자른다?”
“네!”
케이크를 자르자 미소가 밝은 미소를 띠고 손뼉을 쳐댔다.
유진이가 앞접시에 케이크 한쪽을 덜어 줬다.
달다.
버터크림 양파링 초콜렛 거기다 딸기 잼까지.
“양파링은 여기 왜 있어?”
“미소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거든요.”
“응! 난 양파링이 최고로 좋아~!!”
미소가 양손에 양파링을 들고 볼에다 가져다 댔다.
조금 이상한 조합이지만 행복의 맛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케이크를 먹던 중 유진이가 물었다.
“맛없어요? 우리 미소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양파링 빼 드려요?”
양파링을 몰래 들어내려다 들켰다.
미소가 볼까 두려워 얼른 양파링을 입에 넣고 말했다.
“아 아니? 맛있는데? 음흠. 그게 아니라 네 차기작 때문에. 넌 어떤 작품이 좋아? 이지연 작가님? 아니면 김솔잎 작가님?”
유진이는 이미 두 작품을 모두 다 읽었다.
어젯밤 받은 이지연 작가의 <신의 이름으로> 대본도 받자마자 바로 보내줬으니까.
어떤 배역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미리 하지 않았다.
유진이 개인의 생각도 듣고 싶었으니까.
잠깐 고민하던 유진이가 자신의 선택을 알려왔다.
“음. 전 파란 하늘의 노을이요.”
“노을이?”
<파란 하늘>은 횟집을 하는 성파란 네 집안과 고깃집을 하는 김하늘의 네 집안 식구들 간의 일상이 20년 전 배경으로 벌어지는 로맨틱 가족 코미디물이다.
그중 김노을이라는 등장인물은 고깃집을 하면서도 고기를 못 먹는 첫째 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맡아 꾸려가는 명랑 쾌활한 둘째다.
여주인공에 버금가는 인기로 최고의 사랑을 받은 조역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 배역을 ‘박진희’라는 배우가 맡았다.
김노을 역을 맡은 덕분에 그 한 해 따낸 CF만으로 몇억은 너끈히 벌었었다.
아무튼 유진이가 고른 배역이 노을이 역이라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졌다.
씩 하고 웃자 유진이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 혹시 제가 잘못 골랐어요?”
“아니. 내가 추천하고 싶은 역할도 노을이었거든.”
순간 유진이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갑작스레 오른손을 내밀며 외쳤다.
“찌찌뽕!”
“아야! 왜?”
유진이는 자기랑 생각이 같다고 웃으며 내 팔뚝을 꼬집었다.
아니 왜?
찌찌뽕이 뭔데?
“나도 찌찌뽕!”
미소야. 넌 왜 꼬집어?
난 고통을 참으며 유진이에게 물었다.
“아야······.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야?”
“해제할 때까지요!”
미소는 해맑은 표정으로 해제를 말해야 풀어준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상황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어떻게 해제하는데?”
힐끔 눈치를 보던 미소가 내 귀에 속삭였다.
‘뽕찌찌!’
아니 그건 또 뭐야?
뭔가 이상했지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뽕찌찌!”
그러자 두 사람이 손을 떼며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말을 하거나 같은 생각을 하면 해야 하는 거라나?
멍들었다고 엄살을 떨자 미소가 입으로 호~하고 자신이 꼬집은 부위에 입김을 불어준다.
병 주고 약 주는 미소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삼촌 미안~.”
잠깐.
그런데 유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미소 넌 왜 꼬집은 건데?
살짝 따져 볼까 싶었지만 배시시 웃는 미소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다.
귀여우니 넘어가 줘야겠다.
“그런데 유진아. 왜 이지연 작가님이 아니라 김솔잎 작가의 작품을 선택했어?”
“아. 그거요?”
유진이의 설명이 이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