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7화
277. 만신 월아 3
이지연 작가의 집.
거실로 들어가니 김성운 PD와 이지연 작가가 우릴 반겼다.
“세상에! 강 대표님.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예요?”
“반가워. 이 작가.”
“그동안 휴가 갔다더니 왜 이렇게 말랐어요? 휴가가 별로였어요? 아니 너무 놀아서 그런가?”
“하하. 지중해 음식이 나랑 안 맞더라고.”
극소수의 사람을 빼고는 강감찬 대표가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탓에 강감찬 대표는 휴가가 별로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여간 다시 봐서 반가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거실로 들어간 우린 곧장 현재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짧은 토론이 끝나고 대략적인 결론이 정해졌다.
우선 ‘만신 월아’의 진짜 정체는 MBS <오늘 아침!> 팀을 현장에 불러 공개하는 쪽으로 정해졌다.
이지연 작가가 아쉬운 표정으로 날 달랬다.
“조금 아쉽긴 해도 이게 최선이야. 알지?”
김성운 PD 역시도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호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애써 아쉬움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촬영은 언젭니까? 26일 날 현장에 오는 건가요?”
“예. 9화가 방영되는 26일 아침 8시 30분부터 생방송으로 촬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성운 PD는 의외성을 위해 <오늘 아침!>의 이헌제 PD에게 현장 분위기를 인터뷰하자는 정도로만 말해줬단다.
그리고 그날은 <신의 이름으로> 9화가 방영되는 날.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엔 딱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맞춰서 준비해 두겠습니다.”
김성운 PD가 고개를 끄덕인 뒤 언론 대응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아 언론은 제가······.”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강감찬 대표가 나섰다.
“아니. 언론 쪽은 내가 맡지.”
강감찬 대표가 자신을 믿어보라 말한다.
“보안을 위해서라도 보도자료는 철저히 우리 쪽에서 만들어 보내야 해. 그러려면 내가 나서는 게 나을 거다.”
강감찬 대표의 말대로 팀장인 내가 부탁하면 기자들은 삐딱 선을 탈 가능성이 있었다.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싣는 기자들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강감찬 대표가 나서면 기자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강감찬 대표가 내 쪽을 쳐다보며 안심을 시킨다.
“염려 마라. 돈이 얼마가 되었든 간에 확실히 지원해 줄 테니까.”
이게 아버지를 둔 아이들의 심정일까.
내 등 뒤에 믿음직한 아군이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예.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흐뭇하게 웃으며 김성운 PD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방송국 윗분들도 내가 감당하도록 하지. 아무래도 나랑은 여러 해 술친구로 지내왔으니 자네보다는 내가 말하는 게 파장이 적을 거라고 보네만.”
김성운 PD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이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신세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아닙니다. 사실 방금도 우리 CP님에게 쪼일 거라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만신 월아’의 정체를 세상에 알릴 계획이 정해졌다.
이야기를 다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김 PD님. 이번 일정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아직 이시연 AD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기에 이 일정만큼은 그녀에게 숨기고 싶었다.
김성운 PD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시연 AD도 말입니까?”
“예. 아는 사람을 최소한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김성운 PD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지연 작가가 눈치 빠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김 PD.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는 사람은 최소한이 좋겠어.”
이시연 AD를 의심하는 이야기를 꺼낸 탓에 김성운 PD가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김성운 PD가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으로 날 선 분위기를 한 번 더 흐려준다.
“그동안 한 고생이 헛걸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심에 또 조심들 하자고.”
“예. 대표님.”
회의를 마친 난 도둑고양이 두 마리를 잡기 위해 몇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8월 25일 오후 2시.
팔당대교 인근 6번 국도.
‘스타 패치’의 강일구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초조한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최근 며칠간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에게 붙었지만 매번 뒤를 쫓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랜 파파라치 생활 동안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사진 한 장을 못 건진 터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에잇! 라이터는 왜 또 안 돼?”
차에서 내린 강일구가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 순간 조수석에 있던 최재윤 기자가 냉큼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는 차에서 내렸다.
“여기 불요.”
칙칙!
강일구는 말없이 불붙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최재윤이 강일구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한다.
“그런데 팀장님. 그냥 의혹을 바로 보도해 버리면 안 됩니까? 만신 월아를 연기하는 배우의 정체가 사실은 정유진이라고. 의혹만으로도 어그로 좀 끌 것 같은데요?”
강일구가 연기를 내뿜으며 대꾸했다.
“야. 넌 그게 믿어지냐? 정유진이 그 노파 연기를 했다는 게?”
최재윤이 머리를 긁적인다.
“아뇨. 솔직히······.”
“거봐 너도 못 믿겠지? 막말로 우리도 못 믿는 걸 사람들한테 어떻게 이해시켜?”
최재윤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렇게 가다가는 사진 한 장 못 건지겠는데? 기사 펑크 내시려고요?”
강일구가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할 수 없지 뭐. 이시연을 다시 써먹는 수밖에.”
스타 패치의 ‘거머리’ 강일구는 배우 뺨칠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기에 방송국이나 기획사의 여자 스태프들에게 정보를 얻는 데에 능수능란한 편이다.
담배를 다 태운 강일구는 다정한 목소리로 이시연 AD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 나야.”
이시연 AD가 콧소리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강일구는 한동안 어울려 주다 슬그머니 상대를 몰아세웠다.
“그나저나 저번에 말한 사진은 어떻게 됐어?”
아직 정유진이 ‘만신 월아’라는 걸 증명하는 사진을 못 구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강일구는 짜증을 내며 상대를 몰아세웠다.
“시연 씨. 날 위해 그 정도도 못 해줘? 들키면 내가 차 안에다 몰카 설치했다고 한다니까? 설마 나 못 믿어?”
몰카를 설치하라는 강일구의 거센 압박에 이시연 AD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강일구가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를 낸다.
“하여간 난 자기밖에 없어. 그래. 나만 믿어. 그리고 이번 드라마 끝나면 같이 괌이나 다녀오자. 오케이?”
사랑한다는 말이 오간 뒤 강일구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강일구가 피식 웃는다.
“결국엔 해줄 거면서 왜 이렇게 튕기는지 원······.”
“팀장님. 진짜 괌 가시게요? 이 AD. 솔직히 강 팀장님 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좀······ 떨어지던데?”
<신의 이름으로>의 이시연 AD는 평범한 외모의 여성이다.
최재윤은 배우 뺨칠 정도로 잘생긴 강일구가 이시연 AD와 데이트를 한다는 게 납득가지 않았다.
하지만 최재윤의 생각과 달리 강일구에게는 숨겨둔 애인이 있었다.
강일구는 최근에 해체한 걸그룹 스쿨 파티의 리더 이선아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
지금 이시연 AD와 사귀는 흉내를 내는 건 철저한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강일구는 씨익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야! 이런 좋은 소스를 받았으면 한동안은 제대로 서비스해줘야지. 그리고 난 만나는 동안은 언제나 진심이야. 이거 왜 이래?”
강일구가 그동안 온갖 미남계를 쓰고도 곤란을 겪지 않은 비법을 말하자 최재윤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강일구가 낄낄 웃으며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자 그럼 오늘은 좀 쉬자. 며칠 잠복을 했더니 몸이 부서질 것 같네. 사우나나 갈까?”
“예. 팀장님.”
최재윤도 강일구를 따라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곁을 지나가던 경찰차가 갑작스레 속도를 줄이며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경찰차가 스피커로 출발하려는 강일구를 붙잡았다.
-70오6387. 잠깐 출발하지 말고 그대로 계세요.
강일구와 최재윤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 경찰이 다가와 과태료 스티커를 내밀었다.
“담배꽁초 투척으로 범칙금 부과됩니다.”
“예? 제가요?”
강일구가 시치미를 뗐지만 경찰은 블랙박스에 다 찍혔다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 순간 강일구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속으로 이 모든 게 정윤호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며 온갖 욕을 해대면서.
* * *
8월 25일 오후 6시.
<신의 이름으로> 양평 세트장.
세트장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나는 이수찬에게서 온 까톡을 확인했다.
[A팀 주간 조(강일구 기자) > (현 위치 : 6번 국도 팔당대교 인근. 현장에서 22km 부근) (특이사항 : 담배꽁초로 과태료 뭄)]
[B팀 주간 조(스타 패치 2팀) > (현 위치 : 굴렁쇠 엔터 입구에 잠복 중) (특이사항 : 소프트아이스크림 먹는 중)]
······
꼼꼼한 감시 덕에 ‘스타 패치’는 내 주위를 얼씬도 못 하는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이어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결국 강일구나 이시연 AD를 잡아야 이 일이 끝날 거라는 이야기다.
난 폰을 넣은 채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벤츠 스프린트의 뒷좌석에는 진유정 여사로 변장을 한 유진이가 축 늘어져 있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 탓에 새벽부터 계속 촬영한 까닭이다.
난 탈을 반쯤 벗은 채 손 선풍기로 목에 바람을 넣고 있는 유진이에게 물었다.
“힘들지?”
유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요. 그래도 뭐 이제 2시간만 더 촬영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조금만 더 수고하자. 그리고 이것 좀 마셔.”
탈을 쓰게 되면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없었기에 식사 대용으로 밀크티를 건넸다.
유진이가 입을 쭉 내밀고 차가운 밀크티를 단번에 빨아 마신다.
“하아~ 살 것 같다. 오빠 고마워요.”
현재 밖의 날씨는 오후 6시인데도 28도 언저리.
이 날씨에도 유진이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연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저기 정 팀장님. 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이시연 AD의 목소리다.
그 순간 난 미리 준비한 차량 내부용 CCTV의 작동 버튼을 꾸욱 하고 눌렀다.
혹시나 하고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아서 걸려든다.
인기척이 들리자 유진이는 반쯤 벗고 있는 탈을 얼른 고쳐 썼다.
곁에 있던 양소리 대리는 서둘러 유진이의 특수 분장을 고쳤고.
눈 깜작할 사이 준비를 마친 뒤 차 문을 열었다.
“에이~ 어차피 전 다 아는데 뭘 또 그렇게까지 숨기세요?”
이시연 AD가 오늘따라 유독 친한 척 굴며 차에 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김 PD가 정 팀장님을 찾네? 내일 촬영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이시연 AD는 김성운 PD의 입사 선배다.
그래도 직책은 낮으니 서로 존대를 하면 좋을 텐데 매번 이렇게 은근슬쩍 낮게 부른다니까.
“빨리 안 가요? 김 PD 엄청 급해 보이던데.”
이시연 AD는 오랜만에 유진이랑 수다나 떨고 가겠다며 먼저 가보라고 손짓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선 내가 빠져줘야 했다.
“그러면 유진이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와 폰으로 차량용 CCTV에 원격 접속했다.
[다보여 VER 1.0]
차 안의 모든 광경이 네 방향에서 선명히 보인다.
실시간으로 보고 있지만 동시 녹화도 되는 상황.
그때부터 난 이시연 AD가 뭘 하려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이시연 AD는 유진이에게 뭔가를 말하며 박장대소를 해댔다.
그런데 유진이가 잠깐 고개를 돌린 순간 이시연 AD가 차량 시트에 뭔가를 몰래 끼우고 있었다.
‘몰카를 쓰는 거였군.’
강일구에게 어떻게 사진이 유출되는지 증거를 잡았다.
그 순간 김성운 PD에게 달려가는 속도를 높였다.
나 혼자 돌아가서 난리를 치는 것보단 김성운 PD에게 보여주는 게 더 좋을 테니까.
50m를 빠르게 달려 김성운 PD가 모니터링 중인 장소에 도착했다.
숨을 헉헉 몰아쉬자 큐시트를 검토 중이던 김성운 PD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어 정 팀장님. 여긴 어쩐 일로······.”
“김 PD님. 혹시 저 부르셨습니까?”
김성운 PD가 고개를 갸웃한다.
“누가 그래요? 부를 일이 있으면 그냥 전화하고 말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 AD가 범인이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이시연 AD가 날 따돌린 뒤 저지른 일이 녹화된 영상을 내밀었다.
영상에는 이시연 AD가 내 차에 뭔가를 설치하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김성운 PD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지금 막 찍은 겁니다. 김 PD님이 절 찾는다고 해서 자리를 비웠더니 이런 짓을 하더군요.”
김성운 PD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의 이름을 팔고 그 틈을 타 몰카를 심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결국 김성운 PD가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XX. AD가 어디 삼류 찌라시 기자도 아니고!”
흥분하면 거친 소리는 해도 어지간하면 욕을 하지 않던 김성운 PD였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가보죠.”
김성운 PD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난 그 뒤를 따르며 슬쩍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8월 27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NEW. 정유진] ‘스타 패치’ 기사 <‘만신 월아’의 정체는 바로 정유진> 관련 긴급회의. (회의 내용 : 정유진 메이크업 제거 사진 공개.))
드디어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이시연 AD와 강일구 기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