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6화
276. 만신 월아 2
부우웅!
차량의 속도를 살짝 높이자 뒤따라오던 흰색 승합차도 속도를 따라 올린다.
뒤 차는 내가 차선 변경을 하면 따라서 하고 속도를 늦추면 똑같이 늦추고 있다.
난 속도를 줄인 뒤 후방카메라로 차량 번호를 확인했다.
“70오6387. 누구지?”
아무리 회귀를 했다지만 차량 번호까지 외우고 있진 않다.
난 조금 더 속도를 늦춰 뒤쪽의 흰색 승합차와 거리를 좁혔다.
운전자와 조수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운전석과 보조석에 앉은 두 사람 모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짐작 가는 바가 있다.
바로 다이어리가 알려준 ‘스타 패치’의 기자들.
추격전이 일어나자 분장도 지우지 못한 유진이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 괜찮을까요?”
“내릴 때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단 파티션 좀 올릴 거니까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해.”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는 운전석과 뒷좌석을 구분하는 전동식 파티션이 설치되어 있다.
지잉!
버튼을 누르자 검은 파티션이 올라와 뒷좌석과 운전석을 완전히 가렸다.
이제 뒤 차가 내 앞으로 온다고 해도 유진이가 찍힐 리는 없다.
남은 문제는 놈들을 따돌리는 건데······
하지만 벤츠 스프린터가 워낙 큰 데다 속도 제한 장치까지 달고 있어 도저히 흰색 승합차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공권력의 힘을 빌려야지.’
난 곧장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112죠?”
-예. 신고자분. 말씀하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미친 스토커가 우릴 따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우리 차에는 연예인이 타고 있는데 이러다가 사고 나면 뉴스 톱에 나게 될지도 모른다며 도와달라 말했다.
-지금 위치가 어디 십니까?
“6번 국도요. 양서초등학교 근처를 막 지났습니다.”
-알겠습니다. 곧 출동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5분이나 지났을까.
후방카메라에 경찰차 한 대가 경광등을 울리며 흰색 승합차를 멈춰 세우는 게 보였다.
‘됐다.’
가슴을 쓸어내린 난 속도를 조금 더 올려 첫 번째 나오는 갈림길에서 빠져나갔다.
대략 10분 정도를 더 달린 다음 차를 잠깐 갓길에 세우고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8월 27일]
-PM 10:00 [NEW. 정유진] ‘스타 패치’ 기사 <‘만신 월아’의 정체는 바로 정유진> 관련 긴급회의. (회의 내용 : 정유진 메이크업 제거 사진 공개.)
역시나 아직 일정은 여전히 그대로다.
하긴 스타 패치가 어떤 놈들인데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지.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나는 아차산 근처의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정상봉에게 유진이를 인계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보는 사람이 없는 안전한 장소라 차를 갈아타기 가장 적합한 장소다.
“운전 조심하고.”
“예. 팀장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에게서 집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전 잘 들어왔어요.
“그래. 난 회사로 들어가서 오늘 우리 뒤를 밟은 놈들이 누군지 조사해 볼게.”
-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태연하게 전화를 받긴 했지만 솔직하게 녹록한 상황은 아니었다.
‘스타 패치’는 자극적인 내용으로 조회수를 올리는 신문사.
그렇다면 유진이의 정체에 관한 기사는 절대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정유진 시청자를 기만하다!” 같은 후속 기사도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유진이가 지난 시간 동안 고생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막아야 했다.
유진이와 전화를 끊자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XXX들······.”
한바탕 욕을 하니 조금은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게 되는 거지?”
잠깐 생각을 해봤지만 결론은 간단히 나왔다.
그토록 보안을 철저히 했는데도 사진이 샌다는 건 유진이가 ‘만신 월아’라는 걸 아는 이가 ‘스타 패치’에 직접 제보 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 생각과 동시에 누가 사진을 찍어 넘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정 팀에서 강일구 기자에게 사진을 넘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와 김수희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이번 일의 성공을 위해 조심했었으니까.
그다음은 방송국 사람들.
방송국에서 현재 유진이가 ‘만신 월아’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단 두 명.
이번 드라마를 연출하는 김성운 PD와 스케줄을 조정하는 이시연 AD이다.
하지만 이내 김성운 PD를 리스트에서 지웠다.
입봉작을 찍던 도중 잘린 경험이 있는 김성운 PD는 이번 작품으로 최고의 결과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
결국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은 현장 스케줄을 관리하는 이시연 AD였다.
이시연 AD는 빈번하게 바뀌는 스케줄을 조정하기 위해 우리가 특수 분장을 하는 차 안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사람.
더군다나 그녀는 김성운 PD보다 6개월 정도 일찍 입사한 선배로 김성운 PD가 일찍 진급하며 상하 관계가 바뀐 걸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현장에서 김성운 PD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설마 김 PD에게 엿을 먹이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이시연 AD가 의심스럽다고 해도 심증만으로 몰아붙일 순 없다.
이랬든 저랬든 그녀는 방송국 쪽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회사부터 가봐야겠군.”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윗선에 보고는 해야했다.
* * *
회사에 도착하자 구성철 실장이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면서 미리 전화한 덕분이다.
“스타 패치가 확실해? 스토커는 아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예. 2인 1조인데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쓰고 추적하는 걸 보니 백 프로 스타 패치입니다.”
구성철 실장이 씩씩거린다.
“허! 그 거머리 같은 놈들이······.”
한동안 씩씩거리던 구성철 실장이 겨우 화를 가라앉혔다.
“어떻게 할 거야? 설마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건 아니지?”
“예.”
“그러면 윗선에 보고부터 하자. 스타 패치 놈들이 달라붙었으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예. 말씀드려야죠.”
구성철 실장과 난 급히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대표이사실에는 강감찬 대표와 강지영 본부장이 나란히 앉아 업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강감찬 대표가 우리를 보곤 묻는다.
“무슨 일이기에 둘 다 그렇게들 표정이 심각해?”
구성철 실장과 난 유진이가 ‘만신 월아’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어떻게 분장을 하고 현장에선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말이다.
한참 동안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강감찬 대표 부녀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허! 어떻게 그런 일이······.”
“죄송합니다. 보안 때문에 아는 사람을 극소수로 하다 보니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구성철 실장과 난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강감찬 대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뭐 정 팀의 운영이야 네게 맡겨뒀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너 하는 걸 보니 원래라면 끝까지 숨기려고 한 거 같은데?”
“스타 패치가 붙었습니다.”
순간 강감찬 대표의 표정이 변했다.
“그놈들이 붙었으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겠군. 그래. 어떻게 할 생각이냐? 대책은 있고?”
난 잠깐 숨을 돌린 뒤 대응책을 말했다.
“스타 패치보다 제가 먼저 기사를 터트릴 생각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묻는다.
“계속해 봐라.”
“원래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 특집 프로에서 공개하려 준비해 둔 자료가 있습니다.”
그동안 촬영을 하며 유진이가 진유정 여사로 그리고 ‘만신 월아’로 변신하는 모습을 모조리 촬영해 놓았다.
탈을 쓰고 어색해하던 처음부터 머리가 안 들어간다고 발을 동동 굴리던 장면 그리고 탈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좋은 연기를 보였던 장면까지도 말이다.
“그 영상들을 공개하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유진이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차후 재방송 시청률이나 해외 판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이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많이 컸구나. 우리 윤호.”
뜬금없는 칭찬에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많이 아쉽기도 한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급하게 프로그램을 편성해 ‘만신 월아’의 정체를 알린다면 아무래도 구성이 빈약해질 수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물론 허무하게 이 기회를 날릴 생각 따윈 없지만 말이다.
강감찬 대표는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답답해할 것 없다. 일을 하다 보면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니까. 대신 내가 조금 거들어 주마.”
“예?”
“이왕 멋지게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도 완벽하게 지어야지.”
강감찬 대표가 소파에서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난 당분간 윤호와 함께 이 일을 처리할 테니 본부장이랑 구 실장은 회사에 남아서 지원 좀 해줘.”
강지영 본부장과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알겠어요. 뒤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본다.
“일단 이 작가랑 김 PD부터 만나보자.”
“예. 대표님.”
오랜만에 강감찬 대표와 함께 현장을 뛴다고 생각한 탓일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 *
이지연 작가의 집으로 가는 동안 강감찬 대표에게 그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던 강은기와의 재회.
중국에서 온 류신 실장과의 충돌.
김애자 부사장과 김애련 전무의 후계 싸움에 끼인 일.
그리고 배우 1실의 방상영 실장의 제의까지도.
하나같이 나를 스카우트하려 들었다는 이야기에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허허허. 우리 윤호가 인기 많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난 그 정도까지는 해줄 수 없다. 형평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다.”
강감찬 대표의 솔직한 고백에 웃음으로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전 굴렁쇠에서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흐뭇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렇다면 나도 말로만 때울 순 없지. 차후 굴렁쇠가 상장하면 그 사람들이 한 제의만은 못 해도 최대한 스톡 옵션을 많이 챙겨 줄 수 있도록 해주마.”
강감찬 대표의 생각과는 달리 돈은 내 1순위가 아니다.
굴렁쇠를 업계 1위로 만들고 쭉쭉 승진하면 어차피 따라올 테니까.
하지만 날 잡기 위해 노력한다는 그 태도가 가슴을 찡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목적지인 이지연 작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전동식 주차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리버스 엔터의 이수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 수찬아.”
-형님. 알아냈습니다.
조금 전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 이수찬에게 우리를 추적하던 차량 번호를 알려줬다.
비용을 낼 테니 차주를 알아봐 달라고.
그리고 더불어 가장 의심되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스타 패치’의 강일구 팀장.
일명 ‘거머리’라고 불리는 사람부터 알아봐 달라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맞았다.
-형님이 알려주신 대로 강일구라는 놈의 차가 맞답니다.
누가 내 뒤를 쫓는지 분명해졌으니 대비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고생했다. 나중에 한턱낼게. 비용은 따로 청구하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콕 짚어주신 덕에 별로 어렵지도 않았는데요.
“계산은 철저히 해야지. 그보다 앞으로 3일간만 계속 뒤를 추적해 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일구 그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 추적팀을 붙여서 계속 위치를 쫓죠 뭐.
그런데 가만히 날 지켜보던 강감찬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아 예. 대표님.”
강감찬 대표는 이수찬의 전화를 받은 뒤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굴렁쇠 엔터의 강감찬이네.”
-아 예. 강감찬 대표님. 윤호 형님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도 정 팀장한테서 자네들 이야기는 들었어. 하던 일을 관두고 이쪽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지?”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표님.
인사를 나누고 나자 강감찬 대표가 묻는다.
“그나저나 강일구 기자에게 사람을 붙이면 몇 명이나 붙일 생각인가?”
-두 팀이 교대로 돌아갈 수 있게 붙일 생각입니다.
“그러지 말고 한 팀당 2명씩 해서 4팀까지 붙여 줄 수 있나? 24시간 물샐 틈 없이. 필요한 경비는 모두 내가 내지.”
너무 과하다 생각했지만 이수찬은 한술 더 떴다.
-대표님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대신 비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윤호 형님에 관한 건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선을 긋는다.
“그럴 수야 있나. 정 팀장은 굴렁쇠의 사람일세!”
어이없게도 누가 비용을 내냐는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서로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처럼.
그 탓에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수찬아. 마음은 고마운데 이쯤 하자. 굴렁쇠에서 비용 낼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 줘.”
이수찬이 마지못해 뚱한 목소리로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형님이 그러신다면야······.
이수찬의 깍듯한 인사를 받고 전화를 끊자 강감찬 대표가 장난스레 웃는다.
“널 뺏어 가려는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네. 이거 조심해야겠는데?”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 사이 주차장의 문이 열렸다.
이지연 작가의 집 안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안 슬쩍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이어리의 일정은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기사를 먼저 터트리는 거로는 부족하다는 뜻.
결국 난 강일구와 이시연 AD 모두를 한 데 엮을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