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0화
270. 왕룽 팀장 1
강감찬 대표가 웅성거리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왜 이리 시끄러워?”
“저기 정 팀장은 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 성호준의 이적 문제 때문에 불편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강감찬 대표가 코웃음을 치며 팀장들을 몰아쳤다.
“이 사람들이! 언제까지 지난 일로 얼굴 붉힐 생각이야?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가득한데 다들 얼이 빠졌구만 아주!”
쩌렁쩌렁한 강감찬 대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팀장들이 기가 팍 죽어버렸다.
강감찬 대표가 이기철을 쳐다본다.
“이 이사. 불편해?”
“아 아닙니다. 대표님.”
“이 이사가 중국어도 잘하고 중국 친구도 많으니까 이 일에 적임일세. 그리고 정 팀장도 이 기회에 두 사람을 따라서 해외 업무도 좀 익히고.”
이기철 이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강감찬 대표는 김동수를 쳐다본다.
“김 실장. 설마 정 팀장이 불편한 거 아니지?”
김동수가 날 힐끔 쳐다보다 한숨을 내쉰다.
“솔직히 불편합니다.”
김동수의 덤덤한 고백에 강감찬 대표가 눈을 부릅뜬다.
“자네······.”
“그래도 공과 사를 잊을 만큼 얼빠진 놈은 아닙니다.”
그제야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래야 평소의 김 실장이지.”
주호성 팀장이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니 원래는 김동수가 주호성 팀장을 데려가려 한 모양이다.
강감찬 대표가 내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난 아무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다.
강감찬 대표가 뜻한 바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감찬 대표는 파트너십 계약을 하는 동안 내가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를 견제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VIP 의전용 차량을 쓸 테니 정 팀장이 비서실에 들러서 키를 받아 가도록.”
“예. 대표님.”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 * *
중국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에서 나온 손님들을 반기기 위해 인천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
이기철 이사는 뒤쪽에 그리고 내 곁에는 김동수 실장이 앉아 있었다.
회귀 전에는 같은 배우 3실이었기에 공항으로 가는 동안 온갖 이야기를 나눴지만 지금은 아무런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인천대교를 넘어가던 도중 이기철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만나는 손님들에게 실수 같은 거 절대 없도록 해.”
“예.”
“정 팀장은 중국어 가능해?”
이기철과 김동수는 중국어를 꽤 능통하게 하는 편이었기에 질문에 자신만만함이 어려 있었다.
“조금은 합니다.”
“그건 다행이군.”
내가 중국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 김동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큼. 어쨌건 넌 왕룽 팀장만 맡으면 돼. 어차피 그 친구는 파트너십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테니까 기분만 안 거슬리게 하고. 난 이기철 이사님과 함께 장쉬안 이사를 밀착 마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실장님.”
중요한 일에서 배제되어서 기분이 안 좋다는 듯 대꾸했지만 실은 왕룽 팀장이 핵심인사다.
왕룽 팀장은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해외사업부 1팀장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의 정체는 선전시 부서기 왕민의 유일한 아들이다.
그리고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 내에서는 대표만 그 사실을 알 정도로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있는 친구였고.
아무튼 그 사실을 모르는 김동수는 이기철 이사와 함께 장쉬안 이사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뒷좌석에 있던 이기철 이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 팀장. 자네는 왕룽 팀장을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구경이나 시켜줘. 그동안 우리가 장 이사를 구워삶아서 파트너십 계약을 맺을 테니까.”
이기철 이사는 내가 이 협상에 공을 세우지 않게 하려는 모양이다.
난 계약보다는 왕룽 팀장과의 친분이 우선이었기에 아무런 불만조차 없었다.
“알겠습니다.”
고분고분한 내 태도에 이상해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자신들에게 이득이라 생각했는지 군말 없이 넘어갔다.
인천공항으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보며 왕룽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인천대교를 건넌 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미리 준비한 팻말을 꺼내 입국장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9시 30분 도착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승객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키 170cm 정도의 키에 퉁퉁한 체구의 장쉬안 이사가 선글라스를 낀 채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180cm 정도의 키를 가진 모델 체형의 왕룽 팀장이 루이비통 캐리어와 일반 캐리어를 양손으로 끌며 나오고 있었다.
왕룽 팀장은 연예인으로 착각할 외모인 탓에 공항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흘낏흘낏 훔쳐보고 있었다.
장쉬안 이사를 발견한 이기철 이사가 능숙한 중국어로 인사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장 이사님!”
장쉬안 이사가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인사를 받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 이사님!”
“2년 만이네요. 신수가 더욱 좋아지셨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거기에 김동수도 끼어들어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왕룽 팀장은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명함을 내밀었다.
“해외사업부 1팀장 왕룽입니다.”
어색한 한국어였지만 겸손한 태도가 묻어 나왔다.
왕룽 팀장은 아버지가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다른 권력자나 부잣집 아들과는 달리 권력에 기대는 짓을 혐오하는 성격이다.
“굴렁쇠 엔터 배우 2실 소속 정윤호 팀장입니다. 한국에 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조금은 미흡한 중국어로 답하자 왕룽 팀장이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인사를 마치자 이기철 이사가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자. 그럼 가실까요?”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는 장쉬안 이사의 양쪽에 딱 달라붙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인을 잃고 우리 앞에 놓인 캐리어를 카트에 담으려고 하자 왕룽 팀장이 웃으며 자기 상급자의 루이비통 캐리어만 옮겨달라 부탁한다.
“중국이나 한국이나 상급자들은 똑같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난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왕 팀장님은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하신 거로 압니다만. 전 중국어보다는 영어가 편한데······ 영어로 말해도 될까요?”
더듬더듬 중국어로 말했더니 왕룽 팀장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저도 가끔은 영어가 더 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3일간 원하시는 한국 드라마와 예능 현장 안내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왕룽 팀장이 놀란 눈을 하고 날 쳐다본다.
“제가 한국 제작 현장을 다니고 싶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귀하신 손님들이 오신다기에 미리 조사했습니다. 왕 팀장님께서 한국 드라마의 광팬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주영인 씨의 팬이시고요.”
왕룽 팀장이 날 호의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본다.
“3일간 꽤 즐거울 것 같군요.”
왕룽 팀장과 난 앞에 간 상급자들이 기다리는 것도 잊고 천천히 걸어가며 대화를 나눴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뜨거운 햇살 아래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세 사람이 보였다.
“정 팀장! 왜 이리 늦어?”
이기철 이사가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흔들어댄다.
그러기에 차 키를 가진 나랑 함께 움직였어야지.
* * *
굴렁쇠 엔터의 1층 주차장에 차를 댄 뒤 로비로 향했다.
간단한 환영 인사를 마친 뒤 강감찬 대표와 임원진들과 함께 회의실에 참석했다.
간단한 티타임을 가지려 했지만 장쉬안 이사는 계약 논의부터 하자며 적극적으로 나왔다.
파트너십에 대한 기본적인 서류는 이미 주고받았지만 세부적인 조항에서 협상이 전혀 진척이 안 되는 중이다.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수익 배분 문제가 역시나 문제였다.
강감찬 대표는 중국에서는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이 7 그리고 굴렁쇠 엔터가 3의 수익 배분을 하고 한국에는 그 반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장쉬안 이사는 대번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견이 좀 있군요. 저희 뉴미디어는 본국에서는 저희가 9 귀사가 1. 한국에서는 귀사가 6 저희가 4 정도로 했으면 합니다.”
장쉬안 이사는 한한령이 있는 현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강감찬 대표부터 강지영 본부장까지 모두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아무리 중국 시장이 크다지만 이 정도는 공정한 파트너십 대상이 취할 태도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협상은 돌고 돌았고 결국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호텔로 가려는 두 사람을 강감찬 대표가 붙잡았다.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면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쉬안 이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술도 있습니까?”
낮술을 하자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했지만 강지영 본부장은 아무렇지 않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은 술로 준비해뒀습니다.”
장쉬안 이사가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하하. 이거 제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군요.”
“자. 그럼 가시죠.”
그 순간 왕룽 팀장이 장쉬안 이사에게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한다.
장쉬안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감찬 대표에게 말했다.
“우리 왕 팀장은 식사보다 드라마 촬영 현장 구경을 좀 했으면 한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식사도 안 하시고요?”
“예. 우리 왕 팀장이 술을 잘 못합니다. 하하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빠져주려는 거니 오해는 마십시오.”
회귀 전에도 왕룽 팀장은 현장에 가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예의에 어긋나는 건 알지만 이번에 온 김에 한국 촬영 현장 상황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날 쳐다본다.
“정 팀장······ 어때?”
이왕이면 이기철 이사와 다 같이 있으면서 계약 진행을 하기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왕룽 팀장의 의견에 따른다고 대답했다.
장쉬안 이사가 어떤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룽 팀장이 돌아간 뒤 대표를 만나서 말하는 몇 마디 말이 더 가치 있을 테니까.
강감찬 대표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정 팀장이 수고 좀 해.”
“예. 대표님.”
난 왕룽 팀장과 함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 * *
나는 왕룽 팀장과 <신의 이름으로>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밥이라도 먹고 가자 했더니 김밥 두 줄이면 된다고 하기에 회사 앞 김밥 체인점에서 기본 김밥 네 줄을 사서 차에 올랐다.
“진짜 이렇게 드셔도 됩니까?”
왕룽 팀장은 쿠킹 호일로 싼 김밥을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김밥 짜장면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더라고요. 저도 꼭 이렇게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왕룽 팀장은 생각보다 맛있다면서 김밥 두 줄을 단번에 먹어 치웠다.
현장으로 가는 동안 왕룽 팀장은 한국 촬영 현장에 관한 질문을 쏟아내었다.
그때는 중국어로 대화를 했기에 서로 몇 마디를 못 나눴었지만 지금은 만나자마자 서로 영어를 사용한 터라 대화를 끊이지가 않았다.
1시간 30분 정도 만에 양평에 있는 <신의 이름으로>의 촬영 현장에 도착한 나는 차수연 제작실장에게 인사부터 시켰다.
“상하이 뉴미디어 해외사업부 팀장이라고? 저렇게 젊은 사람이?”
“예. 잘만 하면 우리 작품도 중국 판권 수출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요? 방법은 있고?”
“당장은 힘들지만 한번 추진해 봐야죠. 협조나 잘해주세요.”
대충 왕룽 팀장이 하는 일을 말해줬더니 차수연 제작실장의 얼굴이 환해지며 현장 참관을 허락했다.
김성운 PD와도 인사를 마친 뒤 유진이가 앉아 있는 대기 의자로 향했다.
대본을 보고 있던 유진이가 나와 왕룽 팀장을 보고 인사를 꾸벅한다.
“왕룽 팀장님. 배우 정유진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눈 뒤 난 유진이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유진이가 흔쾌히 사인을 해주고 밑에다 왕룽 팀장의 한자 이름을 적었다.
왕룽 팀장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진다.
“제 이름을 어떻게······.”
“윤호 오빠가 미리 부탁했거든요. 어제부터 연습했죠.”
왕룽 팀장이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감사합니다. 정 팀장님.”
“아닙니다. 한 명의 팬이라도 안 놓치려고 애를 쓰는 것뿐입니다.”
“일기일회. 스쳐 지날 수 있는 한 번의 만남에도 정성을 다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왕룽 팀장이 만족스럽게 웃음을 짓는다.
유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촬영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오늘도 수고해. 추격 씬에서 몸조심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시키는 대로 보호대 다 했으니까요.”
재개발 지역 세트장 촬영을 해야 했기에 몸 안에 보호대를 가득 둘러놓았다.
유진이가 팔을 걷어 몸 안에 찬 보호대를 보여준다.
“보세요 됐죠?”
“어. 오케이.”
난 다시 한번 보호대의 상태를 점검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늘도 파이팅?”
“네!”
씩씩하게 대답한 유진이가 촬영장으로 향했다.
유진이가 촬영장에 가는 걸 본 뒤 왕룽에게 TVM에서 방영하는 <먹방의 대가> 촬영 현장부터 강하나가 현재 촬영 중인 <바닥 찍고 다시 하나!> 현장까지 모조리 오픈하겠노라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왕룽 팀장이 주저주저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정 팀장님. 고마운 제의 감사한데 혹시 주영인 씨의 사인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제 약혼녀도 주영인 씨의 광팬이거든요.”
그 순간 난 심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왕룽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차후 그의 배경과 상하이 뉴미디어 대표가 되는 그의 미래도 있었지만 다이어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일정 하나 때문이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0년 9월 5일]
-PM 07:00 왕룽 팀장의 약혼녀 ‘릴리’ 장례식.
내 인생에 몇 없던 내 친구 중 한 명인 왕룽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제부터 난 왕룽과 그의 약혼녀인 릴리의 미래를 지옥에서 건져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