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27. 선택?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대답 안 하면 죽여버릴 거야?’
마치 마녀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 같은 느낌이다.
내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눈 채로.
심중으로는 이미 김솔잎 작가의 작품을 선택한 상황이지만 대답은 신중해야 했다.
이지연 작가 앞에서 함부로 말했다간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하고선 차기작에 불러주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고민을 정리한 나는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매니저인 제 생각보다 배우가 욕심내는 작품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솔잎 작가의 표정이 밝아졌다.
S급 작가인 이지연 작가의 유혹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대신 이지연 작가의 뜨거운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유노. 그 눈빛 마음에 안 들어. 나 눈치 100단인 거 몰라?”
설마 이미 결정을 내린 걸 눈치채기라도 했나?
난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이지연 작가의 시선을 피했다.
“어허. 이 작가. 얘 좀 그만 괴롭혀라. 얼굴 새하얘진 것 좀 봐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강 대표님. 그냥 본 건데. 왜요? 보지도 못해요?”
그게 그냥 쳐다본 거였다고?
눈에서 불이 나오던데?
강감찬 대표의 타박에 이지연 작가가 툴툴거리다 김솔잎 작가의 옆구리를 찔렀다.
“꺅. 선생님!”
화들짝 놀란 김솔잎 작가가 옆구리를 만지작댄다.
“솔잎~. 뭐 해? 네 상황도 말해줘야지.”
이지연 작가를 힐끗 쳐다보던 김솔잎 작가도 자신의 드라마 진행 상황을 알려줬다.
“제 작품 ‘파란 하늘’은 외주 제작사 블루드래곤의 컨트롤 하에 빠르게 진행 중······”
하지만 진행 상황을 듣다 보니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작가 추천으로 바로 꽂을 배역이 얼마 없어요. 여주인공은 당연히 오디션을 봐야 하고 제가 자신하는 캐릭터인 둘째 노을이는 제작사 쪽에서 미는 애가 생겼어요. 셋째 가을이 정도가 가능할 거 같아요.”
<파란 하늘>의 배역 중 가장 뜨는 역은 둘째 딸 노을이 역이었다.
그 배역에 유진이를 추천할 생각이었는데 제작사에서 그 배역에 배우를 밀고 있다고 한다.
‘피해야 하는 건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유진이의 실력이라면 오디션에서 누구와 경쟁하든 충분히 해 볼 만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김솔잎 작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작가님. 만약 유진이가 둘째 노을이 역을 지원하면 어떻게 됩니까?”
김솔잎 작가가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그땐 오디션으로 승부를 봐야죠?”
“만약 제작사가 자기들이 미는 배우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요?”
“그럼 저도 유진 씨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죠. 뭐!”
생각지도 못하게 제작사와 싸워 보겠다는 답변이 단박에 나왔다.
김솔잎 작가의 강단 있는 답변에 이지연 작가도 황당한 모양이다.
“너 왜 이리 겁이 없어? 제작사가 그리 만만한 줄 알아?”
김솔잎 작가가 배시시 웃었다.
“작가님과 배우를 놓고 다투려면 공수표라도 날려야죠. 아닌가요?”
“어머! 얘 간 큰 것 좀 봐? 너 이번 드라마 제작 내가 도와주는 거 알긴 아는 거지?”
“저도 작가님이 힘 써주신 덕분에 입봉하는 거 알거든요? 그래도 승부는 정정당당하게 하자고 하셨잖아요.”
김솔잎 작가의 도발에 이지연 작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과는 달리 마치 장성한 아이를 보는 부모의 얼굴이다.
“좋아. 한판 붙어.”
김솔잎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그러겠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덕에 굴렁쇠 엔터의 식구들은 모두 진땀을 흘려야 했다.
누구를 택하든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김솔잎 작가가 폰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다급히 말했다.
“선생님. 12시에 일식집 예약해 뒀잖아요!”
“하긴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끼니는 거르면 안 되겠지?”
그 순간 두 작가는 언제 싸웠냐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연 작가는 떠나가기 전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 작품은 한날한시에 방영될 거야. 난 MBS 그리고 얜 SBC. 이지연 작가와 제자 김솔잎 작가의 시청률 대결. 꽤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
어떤 작품에 들어가더라도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강감찬 대표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하하하. 일주일. 일주일 안에 답변 줄게. 이 작가.”
그러자 이지연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길어요 3일 안에 답변 줘요.”
이지연 작가는 자신의 품을 떠나가는 제자에게 모든 것을 다해 주고 있었다.
드라마 편성을 잡아주고 제작까지 도와주는 데다 자신과 동 시간대에 맞대결을 시켜 존재감을 부각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스승과 사제의 대결을 정면으로 펼친 결과.
그 패배는 이지연 작가의 것이 된다.
강지영 본부장이 이지연 작가를 배웅하는 사이 난 혹여 이 만남이 미래에 변화를 일으키진 않았을까 싶어 다이어리를 펼쳤다.
하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 * *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4월 1일]
-PM 10:00 MBS <신의 이름으로> 모니터링. (보고 사항) 최준우 스캔들로 인해 시청률 3.5%로 출발.
-PM 10:00 SBC <파란 하늘> 모니터링. 시청률 7.5% 출발.
두 사람의 작품이 이렇게 극명하게 벌어지는 건 작품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신의 이름으로>의 주인공으로 내정된 탑스타 최준우가 여성 팬들에게 몹쓸 짓을 한 정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수십 명이 나온 탓에 대한민국이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탓에 드라마도 4화 만에 방영 중지되어 버렸고.
어떻게 이지연 작가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회의실에선 유진이를 두 작품 중 어떤 작품에 꽂을지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
이지연 작가를 배웅하고 돌아온 강지영 본부장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까지 배웅해 드리고 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강감찬 대표는 우릴 보더니 의견을 말해보라 일렀다.
그러자 강지영 본부장이 구성철 실장과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일단 실무자 의견부터 들어보죠.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구성철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이지연 작가님 쪽에 한 손 들겠습니다. 두 작품이 다른 시기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붙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흥행 보증 수표 최준우까지 잡았다면 결과야 뻔하죠. 뭐 더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당연한 판단이다.
유진이 같은 신인이 이지연 작가의 신작에 들어가는 것은 그 자체로 기삿거리가 되니까.
거기다 이지연 작가는 비중 있는 조연에 바로 배역을 꽂아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솔잎 작가는 이지연 작가를 스승으로 뒀다고 해도 갓 데뷔하는 신인일 뿐.
거기다 김솔잎 작가와는 아직 배역을 확정 짓지도 못하고 있고.
강지영 본부장이 이번엔 내 의견을 물었다.
“윤호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유진이 차기작은 김솔잎 작가님과 함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실에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신인 작가의 데뷔작은 한마디로 복불복이다.
크게 터지거나 쪽박을 차거나.
다들 납득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구성철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윤호야. 혹시 유진이가 김 작가 대본을 보고 꽂히기라도 했냐?”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아직 읽고 있을 겁니다.”
배우가 배역을 강력히 주장한다면 소속사도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자 웅성대는 소란이 일었다.
다들 ‘아니 그럼 왜?’라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소란을 가라앉힌 강감찬 대표가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김솔잎 작가가 쓴 대본은 읽어 봤고?”
“예. 꼼꼼하게 읽어 봤습니다. 통속적이지도 않고 누구나 공감하는 배경에 캐릭터들이 이뤄내는 케미가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다 대히트작인 <대답하라!> 시리즈처럼 과거의 향수를 자극한 점도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거로 생각됩니다.”
사실 <파란 하늘>의 대본을 읽어보진 않았다.
회귀 전 드라마를 여러 번 봤을 뿐.
‘내 최애 드라마 중 하나지.’
구성철 실장이 내 의견에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 말대로 파란 하늘이 대본 하나는 좋습니다. 젊은 층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넓은 연령대에 어필할 요소도 충분하고 20년 전 시대 배경이라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더군요.”
연이어 강지영 본부장도 답했다.
“저 역시 근래 이만한 대본은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과연 이지연 작가님이 추천할 만하더군요. 하지만······.”
“하지만?”
“대사가 워낙에 섬세해서 어설프게 배우를 캐스팅하면 드라마의 맛을 못 살릴 위험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섬세한 대본이라······. 그렇다면 표현력이 떨어지는 배우를 캐스팅하면 오히려 극을 살리지 못할 수도 있겠군.”
강감찬 대표가 고민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강감찬 대표가 한가지 예리한 질문을 던져왔다.
“솔잎 작가의 작품이 가진 장점은 이지연 작가의 작품에는 없는 건가?”
역시 짬은 못 속이네.
강감찬 대표의 말대로다.
생생한 캐릭터와 찰진 대사는 이지연 작가의 전매특허이기도 하니까.
한국 드라마가 가진 통속성의 한계를 가진 대신 안정성도 있고.
“아닙니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다르긴 해도 이지연 작가님이 어디 하나 빠진 게 있는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럼 우리 회사가 왜 검증되지 않은 김솔잎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야 할까? 대답해 봐.”
회의실이 다시 한번 조용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면 끝이다.
말단이 경영진 앞에서 이런 발언을 할 기회를 잡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니까.
이지연 작가와 김솔잎 작가가 동시에 유진이를 원했기에 기적적으로 생긴 일이다.
결국 나만 알고 있는 미래의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이지연 작가의 작품에 주연배우 최준우에게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습니다.”
약과 여자.
짧고 간단한 내 설명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강감찬 대표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젠틀맨 최준우가? 그거 확실해? 누구한테 들었어?”
에이스 엔터의 최준우는 꽤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들 놀란 표정이다.
앞으로 한 달 뒤.
장문기 기자가 최준우에 관해 기사를 터트린다.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1월 15일]
-PM 11:05 (보고 사항) 주간 스타 속보. 최준우 클럽 BLUE 입구에서 약에 취해 난동. 현행범으로 체포.
하지만 이 다이어리를 내밀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한다?’
고민하는 사이 강감찬 대표의 닦달이 더욱 거세졌다.
“어허! 답답하기는! 제대로 설명을 해 보라니까!”
강감찬 대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회의실을 울리자 곁에 있던 강지영 본부장이 나섰다.
“대표님······ 저기······”
“왜?”
“그렇게 몰아치시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습니까.”
“몰아친 게 아니라 마음이 급해서······ 끄으응.”
강감찬 대표를 진정시킨 강지영 본부장이 차분한 태도로 물었다.
“정보의 출처. 그것만 말해 봐요.”
잠깐 고민하던 난 이야기를 각색했다.
“가스 누출 사고 현장에서 저를 취재한 기자가 통화하는 걸 엿들었습니다. 자기 말고도 연예부 기자 몇 명이 최준우 뒤로 캐고 있다며 터트릴 시기를 조율하더라고요.”
순간 회의실에 직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꽤 그럴싸한 이야기였으니까.
강감찬 대표가 침음을 삼키자 구성철 실장이 나섰다.
“대표님. 연예부 기자들 하는 말이야 반은 구라지만 그래도 주연 스캔들은 부담이 너무 큽니다. 확인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저도 동감입니다. 대표님.”
강감찬 대표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내가 따로 사람을 써서 알아보도록 하지. 그전까진 모두 함구하도록.”
강감찬 대표는 내가 말한 정보의 진위를 확인한 뒤 결정짓자 말했다.
다행이다.
강감찬 대표라면 알아볼 능력이 있겠지.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증거를 못 찾아내면?’
다이어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역시 일정에 변화는 없다.
기사가 터지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젠틀맨 행세를 한 게 최준우니까.
불안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갈 순 없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은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보니 어느새 다음 주제로 대화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 팀장. 이제 광고 이야기도 좀 듣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대표님. 현재 대형 패스트푸드 업체인 버거퀸에서 유진 씨에게 광고 문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버거퀸에서 유진 씨의 광고 모델료로 측정한 금액은······.”
그런데 성민석 홍보팀장이 말해준 유진이의 광고 금액이 터무니없이 낮았다.
‘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