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9화
269. 복귀 3
강감찬 대표는 원래부터 촉이 좋기로 유명했다.
천호동에서 버거퀸 알바를 하던 유진이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스카우트도 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번엔 그 촉이 날 향해 주시하고 있었다.
김동수를 회사에서 쫓아낼 생각이냐고.
대답을 고민하느라 약간은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이미 반쯤은 확신하고 물어보는 기색인 데다 내게 베풀어준 그의 은혜와 보살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예. 하지만 사심은 아닙니다.”
내 대답이 떨어진 순간 강감찬 대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으음······.”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강감찬 대표가 소파에 몸을 기댄다.
강감찬 대표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지영 본부장도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회의실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강감찬 대표가 날 쳐다본다.
“왜냐고 물어봐도 되겠냐?”
“굴렁쇠가 쪼개지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날 빤히 쳐다본다.
“굴렁쇠가 쪼개지다니?”
“그냥 쪼개지는 게 아니라 큰 상처를 남기고 쪼개질 겁니다. 어쩌면 준비하시던 회사의 상장을 못 할 수가 있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있고 여기 지영이가 있어도? 그리고 네가 있는데도?”
“김동수 뒤에는 최만식 대표가 있습니다.”
회귀한 이후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일정이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1]
[날짜 : 2022년 11월 11일]
-PM 01:00 탑 엔터테인먼트 창업식.
회귀 후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미소를 살리겠다는 첫 번째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
하지만 두 번째 목표인 굴렁쇠 엔터의 붕괴를 막고 정실모들을 탑스타로 만드는 건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탑 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된다는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안심할 수 없었다.
강감찬 대표가 한숨을 내쉰다.
“결국 최만식 그 뱀 같은 놈이······ 문제구나.”
최만식 대표의 별명은 명동의 살모사.
강감찬 대표는 내 말을 듣는 즉시 사정을 알아차렸다.
“나도 최만식 그 인간에 관해서는 따로 방법을 찾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랬으면 좋겠지만 탑 엔터테인먼트가 설립되는 일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턱대고 기다릴 순 없었다.
“예. 대표님.”
고개를 끄덕인 강감찬 대표가 날 빤히 쳐다본다.
몸은 쇠약해졌지만 눈빛은 더욱 번뜩이고 있었다.
“아 그리고 김 실장을 쫓아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최만식 대표뿐만 아니라 다른 주주들도 내 차기로 기철이보다는 동수를 밀고 있으니까.”
그럴 줄 알고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
“만약 비리가 엄청난 게 있다면요? 가령 사회면에 실릴 정도로 심각한 죄를 지었다면······.”
“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아직은 의혹 단계입니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진행 시키며 경과를 보고해라. 대신 너무 무리수는 두지 말고. 큰일을 할 때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적게 하는 게 몇 배는 더 중요한 거 잊지 말고.”
“그런데 어떤 죄를 캐고 있는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강감찬 대표가 씨익 웃는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날 향한 무한한 믿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하여간 굴렁쇠를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그런데 그때 강감찬 대표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말이다. 윤호 넌 이기철 이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냐?”
이기철 이사는 쳐낼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분은 회사에 남아 주시는 게 저희한테 유리하겠던데요?”
무능한 동료는 아군의 발목을 잡는 법.
이기철이 회사에 남아 있으면 지속적으로 김동수의 발목을 잡게 할 수 있었다.
한때는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이말순 선생님의 일로 그런 일도 없어졌다.
거기다 강감찬 대표도 복귀했으니 오히려 퇴사하지 못하게 붙잡아야 했다.
회사 내 서예종 라인들이 실망하게 되면 강감찬 대표의 라인에 줄 서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강감찬 대표는 김동수를 쳐내려는 내 포부보다 이기철 이사를 내버려 둘 거라는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허허. 그놈 참 머리 쓰는 것하고는. 하긴 네 말대로 그런 친구가 상대 파벌의 리더라는 게 어쩌면 다행한 일이지. 그렇게 하자.”
강감찬 대표는 앞으로가 시작이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려 준다.
두툼한 그의 손이 내 어깨에 닿는 순간 비어 있던 가슴 한구석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 * *
삼성동 고급 레스토랑 페르소나의 VIP 룸.
최만식과 김동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최고급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한 입도 대지 않았다.
“입맛 떨어지는 소식이군.”
최만식 대표가 찬물이 담긴 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성호준도 날려 먹고 박희태랑 최성락까지도 저렇게 날려 먹었다?”
룸 안에 있는 TV 화면에선 수갑을 찬 박희태와 최성락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검찰 호송차에 실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최만식의 싸늘한 표정과 말투에 김동수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미리미리 관리해야 하는데 배우들을 통제하는 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서······.”
“죄송? 김 실장. 나한테 죄송한 일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 안 해?”
순간 김동수가 의자에서 내려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돈만 날려 먹고 영입에 성공도 못 하는 무능한 인간 주제에 뻔뻔하긴. 내가 왜 김 실장을 살려줘야 하지?”
김동수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힘을 내며 외쳤다.
“큰일을 하시려면 더러운 일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시잖습니까?”
최만식이 천천히 팔짱을 끼며 노려본다.
“자네 말고도 내게 연예인들을 대줄 사람은 많아.”
김동수가 빠르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했다.
“이 이사요? 이 이사는 눈치가 아둔해서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주 팀장이요? 주 팀장은 개인적인 욕심이 많아서 여자를 공급하다가 분명히 중간에 사고를 칠 겁니다!”
최만식 대표가 피식 웃는다.
“그래. 그건 틀린 말이 아니군.”
김동수의 얼굴에 약간의 희망이 담긴다.
하지만 그때였다.
최만식이 오른손을 뻗어 김동수의 목울대를 잡았다.
“컥컥컥······ 대······ 대표······님!”
숨이 막힌 김동수가 몸을 바둥거린다.
하지만 최만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엔터 회사는 굴렁쇠만 있는 게 아닌데?”
“죄······ 죄송······합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김동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최만식 대표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다.
“허억- 헉!”
김동수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고 목젖이 떨어져 나간 듯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최만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김동수.”
“예! 예.”
최만식 대표는 테이블에 있는 물티슈로 손을 벅벅 닦았다.
“일어나서 앉아.”
김동수가 벌떡 일어나 의자에 다시 앉았다.
“앞으로 계획은 뭐야?”
“가수 1실에 비어 있는 공석에 한소유 실장을 앉힐 생각입니다. 트레비앙이라고 신인 팀을 키우는 데 곧 골든로드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골든로드는 아예 가망성 없어?”
“일본에 간 차상진 실장이 어떻게든 곡 작업을 시켜보려고 하는데 통제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최만식 대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렇다면 날려버리면 되지. 뭘 질질 끌어?”
“그게 저······ 이기철 이사가 워낙에 공을 들여 키운 그룹이라 그런지 통 놓아줄 생각을 않습니다.”
최만식 대표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미련하긴. 거긴 그냥 없는 셈 쳐. 들어보니 복귀는 글렀네.”
“알겠습니다.”
김동수가 이기철 이사의 험담을 하는데도 최만식 대표는 신경조차 쓰질 않았다.
“그나저나 당장 돈이 되는 배우 쪽은 어떻게 할 거야?”
“예. 제가 약점을 쥐고 있는 배우들 몇 명을 굴렁쇠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새끼 무슨 몰카라도 찍었어?”
김동수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최만식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게 뭐든 알아서 하고. 그중에 S급은 있어?”
“S급은 없고 A급만 두 명······.”
최만식 대표가 말을 끊었다.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어떻게 말입니까?”
“다음 주 중에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미팅이 있다지?”
굴렁쇠 엔터는 소속 스타들의 중국 진출을 타진하기 위해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과 만날 계획을 잡고 있었다.
한한령이니 뭐니 해도 알게 모르게 진출할 사람들은 하니까.
인맥 사회인 중국은 줄만 잘 타면 안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 상하이에서 이사 한 분이 수행을 위해 팀장급 한 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출장 나오기로 했습니다. 저랑 주 팀장이 맞이할 계획입니다.”
“나도 줄이 있어서 알아봤는데 거기 이번에 한국으로 나오는 그 이사가 실세 중의 실세라더군. 비위만 잘 맞춰 협력 관계를 맺으면 한한령도 문제가 아니라는 정보가 있어.”
순간 김동수의 눈이 번뜩였다.
중국은 노다지가 쏟아지는 황금의 땅이다.
광고 한 건에 100억씩 받고 무대 하나에 수억을 받는 게 비일비재한 곳.
“알겠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최만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최 회장의 아들 찾는 건 어떻게 되어 가나?”
김동수가 손자국이 난 목을 비비며 대답했다.
“이제 9명만······ 더 확인하면 됩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서 결과를 가지고 와. 기다리는 게 점점 지쳐가고 있으니까.”
“예.”
김동수는 고개를 푹하고 숙였지만 잔잔히 몸이 떨리고 있었다.
한한령을 우회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실수를 역전시킬 수 있다.
김동수의 머릿속으로 회사 내의 모든 배우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하는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윤호를 발아래 꿇리는 미래도.
‘두고 보자 정윤호.’
* * *
강감찬 대표가 돌아온 이후 회사는 빠르게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성호준의 이적도 급물살을 탔다.
이제 양측 변호사 입회하에 도장을 찍고 기사만 나가면 끝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난 오늘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현재 난 팀장급 전체 회의에서 유진이가 출연 중인 <신의 이름으로>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 중이다.
“여길 보시면 알겠지만 드라마에 관한 기사 지분이 30% 정도 됩니다.”
노트북으로 클릭하자 유진이에 관한 기사들이 회의실의 대형 LCD에 떠올랐다.
[<신의 이름으로> 정유진. 참신한 캐릭터로 변신!]
[정유진. 연기의 폭을 넓히다!]
[정유진. 올해 드라마 신인상 유력!]
[정유진의 명품 브랜드 L.M.L 브랜드 쇼케이스 8월 29일. 삼성동 아트홀]
[칠성 전자. 신형 건조기 광고 모델 정유진]
기사를 보는 강감찬 대표가 껄껄대며 웃는다.
“이제 유진이는 엄연히 스타의 반열에 올랐구나.”
“부족합니다. 아직 주연 한번 못 해봤잖습니까?”
이어서 정 팀의 다른 배우들에 관한 실적을 늘어놓자 강감찬 대표가 회의실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이거. 이러다가 배우 2실이 배우 3실을 넘어서는 거 아냐?”
구성철 실장과 배우 2실 팀장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반대로 김동수와 배우 3실의 팀장들 얼굴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보고를 다 들은 강감찬 대표가 기꺼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다. 그런데 보고서를 보니 다른 실에도 기회를 양보했더군. 왜지?”
“다 같은 굴렁쇠 아닙니까?”
김동수와 일부 사람들은 빼놓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개월간 기회가 올 때마다 나 스스로의 성공 말고도 다른 실에 기회를 열어 준 게 가산점을 받았다.
덕분에 강감찬 대표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럼 공을 세웠으니 상을 받아야지.”
순간 방상영 실장이 냉큼 끼어들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 1실도 정 팀장에게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으니 대표님 의견에 찬성합니다.”
“허. 천하의 방 실장까지 도움을 받았다? 좋아. 그럼 배우 2실에 보너스를 지급하고 정 팀장에게는 특별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하지. 반대하는 사람 있나?”
방상영 실장이 내 실적을 띄워주자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보너스를 줄까 기대하는 동안 강감찬 대표가 중국 파트너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내일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에서 손님들이 온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예. 대표님.”
“내일 오는 사람은 엔터 사업을 총괄하는 장쉬안 이사와 왕룽 팀장이다. 여기 사진과 프로필. 확인하고 숙지하도록.”
상황이 바뀌었다.
회귀 전에는 장쉬안 이사가 아니라 장훈 실장이라는 사람이 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장훈 실장 대신 더 상급자인 장쉬안 이사가 오게 된다고 한다.
상대가 더 높은 직급의 담당자를 보냈기에 회귀 전과는 달리 제대로 된 파트너십을 맺을 가능성이 생겼다.
그런데 강감찬 대표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이기철 이사. 저쪽에서 이사진을 보낸 이상 우리도 최소한 급은 맞춰야지. 자네가 김 실장이랑 정 팀장과 함께 손님맞이를 하도록.”
차후 상하이 뉴미디어 그룹의 대표가 되는 왕룽 팀장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건 다행이었다.
그를 만나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3일간이나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와 같이 다니라니!
‘대표님!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