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7화
267. 복귀 1
굴렁쇠 엔터 6층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각 실의 실장과 팀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그중 김동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영입하려던 박희태와 최성락이 사고를 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는지 그의 시선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쓰러지던 날 나도 저랬었지······.’
회귀 전 구민지 기자에게 아내의 외도 소식을 듣고 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었다.
그리고 차후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순간 처음 마주한 거울 속 내 얼굴이 딱 저랬다.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
‘그러게 왜 날 건드렸어. 김동수.’
만약 김동수가 굴렁쇠 엔터를 쪼개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그리고 날새를 시켜 내 뒷조사를 시키고 짓밟으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다.
회귀한 이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먼저 손을 쓴 적은 없으니까.
그러나 김동수는 내가 예상했던 딱 그대로 움직였고 기어코 굴렁쇠 엔터를 쪼개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도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모든 팀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이자 이기철 이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희태랑 최성락 때문에 불렀다.”
회의실에 모인 팀장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박희태랑 최성락이랑 저희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설마······ 우리 회사에도 쟤들이랑 어울려 논 배우들이 있습니까?”
구성철 실장의 질문에 이기철 이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 우리 회사에 오기로 예정된 배우들이야. 왜 김동수 실장이 전에 얘기했잖아.”
순간 술렁이는 소란이 퍼져 나간다.
“그러면 저번 회의에서 데려온다던 S급 배우들이 걔들이었습니까?”
“그래.”
김동수가 S급 배우를 데려온다고 말은 했었지만 성호준을 제외하고는 누굴 데려온다고 언급한 적이 없었다.
비록 강지영 본부장과 구성철 실장과 몇몇 이들이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이름이 언급된 건 처음이기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기철 이사의 충격적인 발언에 방상영 실장이 급히 입을 열었다.
“김 실장. 계약은 어디까지 진행된 거야? 설마 계약금도 줬어? 아니지?”
김동수가 파리한 입술을 떨며 입을 열었다.
“계약금. 이미 나갔습니다.”
방상영 실장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다.
“야 이! 새X야! 그러면 우리 굴렁쇠도 얽혀버린 게 되잖아!”
소란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모든 직원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강지영 본부장이 다급히 묻는다.
“김 실장님. 계약금 전액을 다 줬어요?”
김동수가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반만 줬고. 이번 주에 반을 주기로······.”
강지영 본부장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감이 어린다.
“됐어요. 그 정도면.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 입부터 맞추죠.”
강지영 본부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상황을 이끌기 시작했다.
“우리 굴렁쇠는 두 사람을 영입하려던 중 예상치 못한 일탈을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려는 중이라고 다들 입 잘 맞추세요. 아시겠죠? 기자들에게 이상한 소리 흘러나가지 않게 주의하고.”
그와 동시에 패닉 상태였던 팀장들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역시 제법인데 본부장.’
강지영 본부장은 내가 말하려던 걸 딱 짚어 말하고 있었다.
강지영 본부장이 방법을 제시하자 방상영 실장이 즉각 맞장구를 쳤다.
“저도 본부장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성 팀장! 즉각 보도자료 준비해!”
홍보팀장인 성민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완성되는 대로 보도자료 바로 뿌리겠습니다.”
사회면에 실릴지도 모르는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일까 다들 긴장이 조금은 풀려 버렸다.
그 탓에 난 긴급히 발언을 신청했다.
“정 팀장도 의견 있으면 말해봐요.”
“그 보도자료 며칠만 늦추면 안 됩니까?”
“왜? 지금 한시가 급한데······.”
순간 다들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 굴렁쇠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섣부른 대응으로 회사 이름이 언급되면 그게 더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파장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일부는 내 의견에 동감했지만 배우 3실은 달랐다.
주호성 팀장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정 팀장! 어디서 그런 설익은 발언을 해? 이런 일일수록 선제적 대응이 중요한 건 상식이라고!”
‘내가 너보다 업계 경력이 몇 년은 더 많아 주호성!’
질책하는 주호성 팀장에게 맞서 외쳤다.
“사람들이 모두 집중하는 이때. 박희태 최성락과 함께 굴렁쇠의 이름이 오르내릴 게 뻔한 일을 왜 합니까?”
주호성 팀장이 이를 빠드득 갈며 날 쳐다본다.
“경력도 안 되는 놈이 어디서 함부로 나서? 팀장이라고 다 같은 팀장인 줄 아냐?”
하지만 그 순간 방상영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그게 아니지. 이번엔 정 팀장의 말이 맞는 거 같은데.”
방상영 실장은 자신도 너무 섣불리 결정을 내린 것 같다며 앞선 의견을 뒤로 물렸다.
샤워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방상영 실장은 내 편을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기철 이사가 방상영 실장의 말을 반박한다.
“방 실장 왜 그래? 우리가 해명도 하기 전에 엉뚱한 찌라시가 먼저 돌면 어쩌려고? 그땐 아무리 변명해도 늦는 거 몰라?”
“그렇다고 해서 저지르지도 않은 일의 공범이라는 멍청한 자백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허! 이 친구 말하는 것 좀 보게? 멍청한 자백이라니!”
그때부터 니가 맞니 내가 맞니 하면서 격한 말다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격론에 휘말린 배우 1실과 2실에는 미안했지만 차후 박희태와 최성락이 굴렁쇠로 오는 걸 막으려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삐이이~~
회의실에 있는 인터폰이 울렸다.
순간 이기철이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다들 조용!”
소란이 잦아들자 이기철이 인터폰을 받아들었다.
“뭐? 성호준이 왔다고? 여기로?”
다시 한번 회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희태와 최성락의 대마 사건이 큰 문제이긴 하지만 성호준의 이적 건을 터트리면 대중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 탓에 인터폰을 받는 이기철 이사 역시도 기쁜 표정을 짓는다.
“성호준이 김동수 실장에게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럼 회의실로 오라 그래! 지금!”
‘타이밍 예술이네.’
성호준이 오늘 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하필 이 순간에 올 줄이야.
그러나 어차피 벌어질 일.
난 심호흡을 가다듬은 채 성호준이 회의실로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성호준이 자신의 매니저 성영준과 함께 들어왔다.
“다들 표정이 왜 이리 어둡습니까? 내가 혹시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요?”
이기철 이사가 과장된 손짓으로 외친다.
“아냐~ 아냐~ 무슨. 자자. 이리 들어오십시오. 호준 씨.”
이기철 이사가 인사를 하며 김동수를 툭 건드렸다.
김동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우리 배우 3실을 책임지게 될 성호준 씨입니다. 다들 환영의 박수로 맞아······.”
하지만 성호준은 안색을 굳히며 김동수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아니 김 실장님.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예?”
성호준이 김동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배우 3실로 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기 전 성호준이 선을 그어 버렸다.
김동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호 호준 씨.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연이은 충격에 어찔한 표정이다.
그런데도 성호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가 분명히 말했죠. 이한수 감독님 차기작에 넣어주면 김 실장님이랑 한다고.”
김동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은석 실장이 오디션만 보면 무조건 주연으로 해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성호준은 코웃음을 친다.
“김 실장님. 지금 ‘천벌’ 스태프들 사이에서 정 실장 내보내라고 난리 난 거 몰라요? 정 실장이랑 카메라 감독 아내랑 불륜인 거 스태프들 사이에 퍼져서 오디션도 못 열리게 생겼는데!”
김동수가 말을 버벅거렸다.
“그 그럴 리가······ 아 아니 지금이라도 제가 연락을 해서 확인을······.”
성호준은 김동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기철 이사를 쳐다본다.
“전 정보도 느리고 약속도 어기는 김 실장이랑은 일 못 합니다.”
이기철 이사는 성호준이 이렇게 쏘아붙일지는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다.
“호준 씨. 진정하시고······.”
하지만 성호준은 숨도 쉬지 않고 이기철 이사를 밀어붙였다.
“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배우 2실이 잘 나간다니 그냥 배우 2실로 가겠습니다.”
김동수는 다시 한번 넋이 나가버렸고 이기철 이사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배우 3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배우 2실로 쏟아졌다.
그 시선에 구성철 실장이 뭘 째려보냐며 버럭 화를 낸다.
“뭘 봐? 본인이 오고 싶으시다잖아?”
“2실에서 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거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정말! 증거 있어?”
배우 3실과 2실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지만 이기철 이사는 말릴 생각도 않고 성호준에게 매달렸다.
“호 호준 씨. 그 이야기는 따로 합시다. 부서를 옮기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그건 제가 신경 쓸 바가 아니죠. 전 굴렁쇠랑 계약했지 김동수 실장이랑 개인적으로 계약한 게 아닌데요? 그리고 정 그게 힘들다면 그냥 계약 해지하시죠.”
성호준의 압박을 보다 못한 강지영 본부장이 절충안을 꺼내며 끼어들었다.
“호준 씨. 그러지 마시고 일단 배우 3실의 케어부터 한번 받아보시죠.”
하지만 성호준은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애초에 굴렁쇠에 올 이유도 없죠. 아니 일도 시작하기 전부터 이렇게 삐거덕거리는데 무슨 기대를 하고 같이 일을 합니까?”
성호준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기에 강지영 본부장도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박희태와 최성락에 이어 성호준까지 놓치게 되자 김동수가 악에 받쳐 외쳤다.
“다 좋은데 왜! 배우 2실입니까? 배우 1실도 있는데!”
성호준이 김동수를 빤히 쳐다본다.
“처음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요즘에 2실이 굴렁쇠에서 제일 잘 나간다고 들었다고요?”
그 순간 김동수의 눈이 내 쪽을 향한다.
“설마······ 정윤호 저 새X 때문입니까?”
화가 잔뜩 난 김동수가 이성을 잃고 욕설을 퍼부었다.
살짝 찔렸지만 난 시치미를 뚝 떼며 김동수의 눈길을 외면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김동수는 다시금 성호준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호준 씨. 제가 요즘 다른 일로 바빠서 신경을 못 쓴 면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대신 이한수 감독을 다시 만나서 설득하겠습니다. 그게 안 되면 그때는 저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김동수의 열변에도 성호준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다른 일로 바빠서 신경을 못 써요? 아니 매니저가 배우 사정을 봐줘야지 배우가 매니저 사정을 봐줘?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성호준은 이제까지의 겸손한 태도를 버린 후 오만한 발언을 시작했다.
사실 성호준 정도의 탑스타가 되면 제멋대로 해도 말릴 수 있는 엔터 회사는 없다.
그들이 벌어다 주는 매출은 한 회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탑스타의 일정을 바빠서 못 챙겼다?
최악의 변명이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린 성호준이 내 쪽을 쳐다본다.
“정 팀장. 그쪽도 이 사람들이랑 의견이 같습니까? 생각 잘해서 대답하세요.”
굴렁쇠에 온다고 한 이후부터 어느 정도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만 지금 성호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여기서 내가 멍청한 대답을 한다면 나와의 약속도 깨버릴 태세였다.
난 결단을 내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는 무엇보다 스타의 일정 관리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만약 저희 팀으로 와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관리하겠습니다.”
김동수와 다투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자 회의실이 다시 한번 웅성거린다.
성호준은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배우 2실에서 내 일정 관리를 해줘요. 그게 굴렁쇠로 오는 유일한 조건이니까.”
지난번 이말순 선생님에 이어 성호준마저 내게 뺏기게 되자 이기철 이사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그따위 일이 일어나는 걸 허락해 줄 거 같아? 절대 허락 못 해!”
이기철 이사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덜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중저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허락하지.”
꽃무늬 티셔츠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강감찬 대표가 회의실에 나타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