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5화
265. 태풍 속으로 3
재계 17위인 대천그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인 유송 식품은 주로 백화점에 도시락을 납품하는 일을 하는 회사다.
하지만 유송 식품의 고일준 이사는 도시락 납품이 아닌 김애자 부회장이 시키는 ‘더러운’ 짓을 처리하는 일종의 전문가였다.
난 고일준 이사의 전화번호를 가리키며 이대호 매니저에게 되물었다.
“혹시 이 번호와 통화해 보셨나요?”
“좋게 거절했는데도 계속 연락이 오더라고요. 아는 번혼가요?”
잠깐 고민하던 난 전화를 건 상대가 김애자 부회장의 측근이라는 걸 밝혔다.
“잠깐 김애자 부회장이라면 저번에 집으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던 그 여자 맞죠?”
김애자 부회장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이대호는 충격에 빠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충분히 대비하고 있으니까요.”
난 김애자 부회장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대호가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을까요? 김애자 그 여자. 큰 언론사도 쥐락펴락하는 거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죠. 하지만 이번엔 쉽게 못 빠져나갈 겁니다. 그 여자를 꼼짝 못 하게 제압할 약점을 찾았거든요.”
이대호의 얼굴에 희망이 살짝 어렸다.
그 순간 물리치료실에서 이태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호 혀~엉! 선생님이 보호자 들어오래.”
“가보세요. 태풍이가 찾네요.”
이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대호가 부리나케 물리치료실로 뛰어가는 걸 보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순간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최소혜 기자의 전화였다.
아마도 김애련 전무와의 딜이 끝난 모양이다.
“어떻게 됐습니까? 최 기자님.”
-아 미치겠다. 그냥은 결정하기 힘든가 봐.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기 전에는 결정을 보류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 있지. 아무래도 정 팀장이 한 번 만나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김애련 전무는 자신의 언니인 김애자 부회장과 맞설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니와는 달리 철두철미한 성격 탓인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좀 더 고민해 봤겠지만 고일준 이사가 연락을 해 오고 있는 이상 서둘러야 했다.
적이 더러운 술책을 쓸 게 뻔한데 기다리고만 있느니 빨리 선수를 쳐야 했다.
더군다나 지금 김애자 부회장을 날리지 않는다면 박희태와 최성락이 굴렁쇠로 이적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니까.
난 심호흡을 한 뒤 최소혜 기자에게 답했다.
“최 기자님. 보안을 철저히 하고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알았어. 기다려. 바로 연락할게.
최소혜 기자와 전화를 끊고 5분이 지나자 내일 당장 만나자는 연락이 도착했다.
* * *
아침 9시 30분.
강남의 H 호텔에 도착해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이 호텔은 김애련 전무 소유의 호텔.
그녀는 10층을 통째로 비우고 우리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최소혜 기자에게 전화를 걸자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다.
-로비에서 아이린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알아서 안내해 줄 거야.
전화를 끊고 1층 로비로 올라갔다.
로비에 있던 남자 직원에게 들은 대로 말했더니 공손히 인사하고서 날 직접 VIP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10층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이 엘리베이터 앞에 나타났다.
“잠시······ 녹음이나 녹화를 할 수 있는 장비가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금속 탐지기까지 사용해 확인한다.
폰과 스마트워치를 건네고 검사를 받은 뒤 1004호의 앞으로 향했다.
짙은 오크색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애련 부회장과 최소혜 기자가 밀크티를 마시는 게 보인다.
키는 160cm 정도 되는 김애련 전무의 나이는 올해 48살.
겉으로 보기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대천그룹 김부호 명예회장의 둘째 딸이었다.
“정 팀장. 인사해. 이분이 김애련 전무님.”
최소혜 기자가 맞은편을 가리키자 김애련 전무가 날 빤히 쳐다보며 웃는다.
“뭐야? 이 사람이었어? 날 만나보라고 한 배후가?”
최소혜 기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여기 정 팀장이 모든 플랜을 세웠습니다.”
김애련 전무가 활짝 웃는다.
“젊네. 나 김애련이야.”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팀장입니다.”
악수를 하자 부드러운 손과 상반된 강한 악력이 느껴진다.
이것만으로도 그녀가 가진 자신감이 느껴졌다.
역시나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래. 굴렁쇠 엔터의 매니저가 어떻게 우리 회사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었을까? 외부 사람들은 내가 완전히 후계 구도에서 밀렸다고 알려졌을 텐데?”
불쾌해하고 있지나 않을까 걱정했더니 다행히도 재미있어하는 표정이다.
“현재 아버님인 김부호 명예회장님께서 여전히 지분을 쥐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아직 후계는 확정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그 정도 소스로 내가 건재하다는 데 배팅했다고?”
김애련 전무는 적과 아군이 분명한 사람.
그 탓에 내가 누구의 편인지를 알고자 계속 알아보려 하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반 정도 확신했지만 지금은 100%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최 기자님이 들고 있는 김애자 부회장의 사진이 아버님이신 김부호 회장님에게 들어가면 게임 끝 아닙니까?”
탐색을 끝낸 김애련 전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말처럼 그리 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 맞아. 아빠가 그 사진을 보면 집안 망신 혼자 다 시킨다며 노발대발하시겠지. 언니는 아마 한동안 경영에 손도 못 대게 하실 거고.”
“그러면 더 확인시켜 드릴 게 있습니까? 없으면 최 기자님의 기사 보도를 도와주시죠.”
“그전에 잠깐만······.”
김애련 전무가 뒤쪽을 바라본다.
그곳엔 키가 190cm 정도되어 보이는 정장의 사내가 정자세를 한 채 꼿꼿하게 서 있었다.
“윤 비서. 가지고 와.”
“예.”
정장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검은 케이스를 꺼내온다.
정장의 사내는 007가방을 테이블에 놓았다.
딸칵!
007가방에는 5만 원짜리 빳빳한 지폐 다발이 가득 차 있었다.
“받아.”
“이런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고? 그쪽에서 넘긴 사진이 얼마짜린 줄은 알고?”
“대천그룹의 시가총액이 약 5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진이 그 정도 가치는 하지 않겠습니까?”
사진 한 장으로 경쟁자인 언니를 쓰러뜨리고 그룹을 통째로 삼킬 무기이니만큼 그 가치야 말할 필요도 없다.
김애련 전무의 눈빛이 변했다.
“젊은 친구가 아주 총명하네. 근데 왜 돈을 안 받지? 보상이 부족해?”
“돈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글쎄? 난 상대가 내 돈 안 먹어주면 엄청 불안해. 돈 안 먹는 것들은 꼭 배신하더라고. 그러니까 말해. 돈이 아니더라도 따로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치?”
역시나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 제가 김애자 부회장을 치려는 이유를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순간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 좀 해봐. 대체 언니랑 무슨 관계길래 이런 위험한 짓을 벌이는 거지? 날 움직여 언닐 치려 하는 이유를 말해봐.”
난 김애련 전무가 알아듣게 말했다.
“사실 몇 달 전 김애자 부회장님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분의 약점을 캐다 이번에 알려드린 정보를 얻었고요.”
“충돌?”
나는 김애자의 미남 연예인 컬렉션에 대한 설명을 했고 사정을 안 김애련 전무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어릴 때부터 그렇게 남자를 밝히더니. 명색이 언니라고 하나 있는 게 집안 망신은 혼자서 다 시켜.”
“또 김애자 부회장이 제 배우인 이태풍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김애련 전무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뭐야? 그러니까 고작 자기 배우를 노렸다고 재계 17위 그룹의 부회장을 날릴 생각을 했다고? 와~ 이거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사람이네?”
김애련 전무가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한다.
“윤 비서도 들었지?”
목석같이 서 있던 정장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젊은 친구가 제법이군요.”
“그치?”
김애련 전무가 밝아진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오케이. 아빠가 실망이 좀 크긴 하겠지만 말해줘야겠네. 3일 이내로 처리할게.”
“그럼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십시오.”
“믿어 봐. 정 팀장보다 내가 더 그러고 싶거든. 어릴 때부터 내가 가진 거라면 전부 빼앗아 간 년. 이번엔 내 차례야!”
그녀의 눈이 번뜩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니가 아닌 일생의 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하긴 지분 싸움까지 벌인 두 자매의 관계는 앞으로도 절대 나아지진 않는다.
내가 죽기 전까지도 계속 싸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대천그룹과는 아예 관계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
“하여간 중간일보 편집장과의 일은 내가 처리할게.”
김애련 전무가 기사를 싣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그 순간 난 이왕이면 김애자 부회장을 저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싶어 한 명의 이름을 더했다.
“혹시 유송 식품이라고 아십니까?”
“언니네 자회사잖아. 근데 거긴 왜?”
“거기서 일하는 고일준 이사가 김애자 부회장과 모든 연예인의 연결 고리입니다.”
김애련 전무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진짜야?”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 인간 뒤를 캐보면 그동안 김애자 부회장이 만났던 연예인이 누군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순간 김애련 전무가 급히 뒤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윤 비서. 지금 당장 유송 식품 좀 알아봐! 그리고 그동안 유송 식품 감시했던 애들 탈탈 털어! 언니한테 돈 먹었을 수도 있으니까!”
윤 비서라는 남자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시를 내린 김애련 전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탐욕 가득한 얼굴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정 팀장. 매니저 관두고 그냥 나한테 오는 건 어때?”
* * *
김애련 전무.
향후 대천그룹의 지배권을 두고 혈투를 벌이는 여걸이 나를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게는 그저 상대하고 싶지 않은 상대일 뿐이었다.
“전 매니저가 천직입니다.”
김애련 전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다.
“천직? 아직 젊어서 잘 모르나 본데 연예인 관리하며 연예계 언저리를 전전하니 세상이 전부 자기 것 같지? 하지만 아니야. 나한테 와. 진짜 넓은 세상을 보여줄 테니까.”
김애련 전무는 언니 김애자 부회장의 숨겨진 약점에 대한 실마리를 듣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애련 전무는 즉각 테이블에 놓인 돈의 2배인 10억을 보상으로 주고 연봉 10억에 대천 건설의 홍보이사 자리도 주겠노라 제의했다.
매니저가 아닌 홍보이사가 되어서 굴렁쇠 엔터의 배우들을 마음껏 회사의 광고 모델로 써서 도와주라고.
순간 최소혜 기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무님! 지금 뭐 하세요? 왜 정 팀장을······.”
“최 기자는 잠시 입 좀 다물지?”
일갈한 김애련 전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아빠가 살아 있는 한 언제 또 복귀할지 몰라. 내겐 인재가 필요해.”
김애자 부회장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야 한다 이건데.
하지만 그렇다면 그럴 필요가 없게 하면 되는 거다.
“김애자 부회장이 다시 못 돌아오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처리하시면 되잖습니까? 밟을 땐 확실히 밟아야죠.”
“뭐라고?”
뜻밖의 대담한 답변에 김애련 전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바 방법은?”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김 전무님에게 지금 부족한 건 결심입니다. 혈육의 정보다 대천을 손에 넣겠다는 마음이 크시다면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일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밟을 수 있을 때 확실히 밟으세요. 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요.”
김애련 전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날 위아래로 훑어본다.
“내게 와서 직접 밟아 볼 마음은 없고? 대가는 확실히 해줄게. 방금까지의 제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지만 돈으로 유혹할 생각 따윈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김애련 전무의 눈이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내가 사람은 잘 보는 편인데 정 팀장은 도통 읽을 수가 없네. 그쪽. 뭐 외계에서 살다 온 그런 건 아니지?”
외계는 아니고 회귀를 한 거지만 그리 대답할 순 없었다.
김애련 전무가 포기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오케이. 대신 앞으로도 협력은 하자. 어때?”
“이미 저희는 동맹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그럼 가 봐. 기사 나가고 나서 연락해 줄 테니까.”
최소혜 기자는 내가 오기 전 이야기를 끝냈는지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했다.
“최 기자님. 이만 돌아가시죠.”
“그 그래.”
날 따라 일어나는 최소혜 기자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최소혜 기자에게 도움이 될 몇 가지 정보를 더 풀었다.
이제 기사가 나오기까지 남은 기간은 3일.
김애자 부회장과 박희태 그리고 최성락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도 딱 그만큼만 남았다.